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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고종과 민비가 도망갔던 길을 따라 다시 들여다본 갑신정변의 그날
    잘 알려지지 않은 흥미로운 역사 이야기 2023. 11. 12. 23:18

     

    우리나라 근현대사 가운데 가장 다이내믹한 사건이라 할 수 있는 갑신정변이 일어난 날을 달력에서 짚어보니 올해는 양력으로 11월 29이다. 갑신정변은 1884년 음력 10월 17일, 조선을 구태(舊態)로부터 개혁하고 부국강병을 이루려는 급진 개화파들이 일으킨 쿠데타로, 우연찮게도 나의 생일과 같아 자연스럽게 상기하게 된다. 그래서 매년 이맘때쯤에는 꼭 한 두 꼭지씩 올리고는 하는데, 올해는 그간 새로 발굴한 고종과 민황후의 도피 과정을 좇아가보려 한다. 
     
    우선 <우리역사넷>에 실린 갑신정변의 전개 과정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884년 12월 4일(음력 10월 17일) 오후 7시경, 우정국 신청사에서 개국(開局) 축하연이 베풀어졌다. 이 자리에는 주인격인 홍영식과 손님격인 김옥균, 박영효, 서광범, 윤치호, 민영익, 한규직, 이조연 등 조선측 인사들과, 외국인으로 미국 공사와 서기관, 영국 총영사, 청국 영사와 서기관, 일본 공사관의 서기관 및 통역관, 독일인 묄렌도르프 등 모두 18명이 참석하였다. 연회가 거의 끝나 가는 오후 10시경, 별안간 밖에서 불이 났다는 고함 소리가 들렸다. 연회장이 소란스러워지자, 민영익이 재빨리 앞장서서 밖으로 나갔다가 비명을 지르며 넘어질 듯 도로 들어와 쓰러졌다. 몸에 칼을 맞아 피투성이가 되어 있었다.
     
    연회장은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되었다. 김옥균, 박영효, 서광범 등 개화파는 재빨리 국왕이 있는 창덕궁으로 향하였다. 궁궐 문은 미리 내통한 문지기에 의해 열렸으며, 김옥균 등은 취침 중이던 국왕을 만났다. 김옥균은 국왕과 왕비 및 왕세자 일행을 이웃에 있는 경우궁으로 옮기게 하였다. 이때, 일본군이 궁궐 주변을 지키면서 청군의 습격에 대비하였으며, 궐내는 서재필이 지휘하는 사관 생도와 군인들이 수비하였다. 김옥균 등은 민씨 정권의 고관들을 처단하고, 개화파 인사들을 중심으로 새 정부를 구성하였다. 이렇게 하여 갑신정변은 일단 성공한 것처럼 보였다.
     

     

    갑신정변의 현장 인사동 우정국
    우정국 건물 내의 초대 우정총판 홍영식 상 / 홍영식은 자신이 추진한 세계우편기구 가입에 성공하여 우정국 낙성식 파티가 열리게 되는 날, 이를 기화로 무력 정변을 일으켰다.

     
    우정국 거사에 성공한 김옥균을 비롯한 정변의 주역들은 잰걸음으로 창덕궁으로 가 내통자가 열어준 금호문을 통과했다. 금천교를 지난 그들은 다시 진선문과 숙장문을 통과해 곧장 고종이 있는 편전까지 나아갔다. 이때까지도 거사는 무리 없이 진행되었으니 숙장문 앞에서 무수리 고대수를 만난 김옥균은 사전의 약속 대로 30분 뒤 인정전 부근에 묻어둔 대나무 화약통에 불을 붙이라고 지시한 후 협양문(協陽門)을 통해 편전으로 들어갔다.
     
    무수리 고대수는 갑신정변에 협력한 유일한 궁녀로서 거구였다는 것 외에 특별히 알려진 무엇이 없고, 덩치가 크고 박색이었던 까닭에 접근하기가 편했으므로 김옥균이 나서 포섭했다고 전한다. 짐작컨대 외모로 인해 평소 왕따 당하던 고대수는 갑신정변을 통해 인생역전을 노렸던 듯하다.

     
     

    개화파가 입궐한 금호문 / 안으로 금천교, 진선문, 숙장문이 보인다.

     

    지금은 남아있지 않지만 협양문은 희정당 앞에 있는 문이었다. 김옥균 등은 이 협양문을 통과해 편전으로 들어간 것으로 돼 있는데, 그렇게 보자면 당시 고종은 지금껏 알려졌던 대조전이 아닌 희정당에 있었을 가능성이 크다. 고종이 대조전에 있었을 것이라는 짐작은 당시 고종이 민왕후와 함께 있었다는 <윤치호 일기> 등에 기인한 것이나, 아무리 급박한 상황이라고 해도 개화파 무리들이 왕비의 침전인 대조전까지 들어갔을 가능성은 희박하다. 
     
    그리고 <윤치호 일기>와 <갑신일록> 등을 근거로 <우리역사넷>에서는 김옥균 등이 취침 중이던 국왕을 만났다 고 설명한 듯하나, 지독한 올빼미족으로 평균 새벽 3시쯤에 잠자리에 들었던 고종이 그 시각에 침전에 있었을 리 만무하다. 
     
     

    혁명의 주체들이 고종을 만난 희정당
    협양문은 필시 꽃밭 앞의 맨홀 자리에 위치했을 것이다.
    갑신정변 당시 김옥균의 일기라는 '갑신일록'
    빌려온 그림인데, 왕과 왕비의 거처가 대조전이 아닌 것을 제외하고는 비슷하다.

      

    왕과 왕후를 만난 정변의 주역들은 "한양에 주둔하고 있는 청군들이 변란을 일으켰으니 급히 몸을 피해야 한다"고 거짓말을 했다. 하지만 왕과 왕후는 믿으려 하지 않았으니, '그들이 변란을 일으킬 이유가 무엇인가?'하는 얼굴로서 서로를 마주 보았다. 김옥균은 재차, "빨리 천좌(遷座)해야 한다"고 독촉했으나 두 사람은 별로 움직일 의사가 없어 보였는데, 바로 그때 편전 밖에서 큰 폭발음이 들려왔다. 무수리 고대수가 터뜨린 화약의 폭발음이었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희정당 밖에서 숙위군 50명을 데리고 호위를 서던 윤계완이 뛰어들며 화급을 알렸다. 윤계완 역시 혁명에 가담한 자였다.  

     

    이에 고종과 민왕후는 지금까지 꿈지럭거리던 태도가 돌변하였으니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희정당을 나서 대기하고 있던 사인교 가마에 올라탔다. 가마는 앞서 걸은 혁명의 주체들을 따라 요금문을 향했는데, 즈음하여 김옥균이 "이제 일본공사관의 일병(日兵)을 불러 경호에 만전을 기해야 합니다" 하자, 고종은 "그리하라"며 따랐다. 그러자 김옥균은 문득 일본공사 다케조에가 공사관의 일본군을 보내주지 않으면 어쩌나 하는 불암감이 일었다. 그는 쿠데타를 지원하겠다는 약속에 역관 출신으로 일본어가 능했던 변수를 보내 이미 응원을 청했으나, 다케조에가 변수의 지위를 우습게 보고 무시할 수도 있는 노릇이었다. 

     

    그래서 옥균은 재차 "일본공사에게 이미 도움을 청해 놨습니다. 허나 혹 안 올지도 모르니 친필 칙서를 내려 주소서"라고 말하며 가마 안으로 종이와 연필을 디밀었다. 고종은 역시 군말 없이'일본공사내호아'(日本公使來護我/일본공사는 와서 나를 호위하라)라고 쓴 칙서를 가마 밖으로 내밀었다. 김옥균은 그것을 박영효에게 건네주며 일본공사관(지금의 경운동 천도교 중앙대교당 자리)으로 가라 일렀다. 그리고 왕과 왕후를 가까운 계동 경우궁(景祐宮) 사당으로 인도했다. 

     

     

    창덕궁 요금문
    고종과 민왕후는 중앙고등학교 길의 이 카페 앞을 지나 경우궁 후문으로 들어간다. (물론 당시에는 이 카페가 없었다 ^^)
    작년 겨울에 찍은 사진으로, 초창기 소아과 병원 중의 하나인 최익순 원장의 최소아과가 있던 자리이다. 카페로 바뀌었지만 당시의 문패가 보존돼 걸려 있다.
    계동 경우궁 터 표석 / 구두수선 부스에 가려져 찾기 힘들다.
    경우궁 / 지금은 청와대 옆 칠궁 안에 위치한다.

     

    우궁은 정조의 후궁이자 순조의 어머니인 수빈 박씨의 사당으로, 울타리 안에 재실(齋室)과 사당이 존재했다. 무리들이 고종을 이곳으로 이거시킨 이유는 곧 속개될지도 모를 청나라 군사의 공격에 대비하기 위해서였다. 당시 청나라는 약 3천 명의 병력을 한양에 주둔시키고 있었는데, 최근 발발한 베트남에서의 대(對) 프랑스 전쟁에 그 반을 빼갔지만 아직도 1,500명이 남아 있었다. 반면 아군과 우군은, 즉 혁명군과 지원을 약속한 일본공사관 병력은 모두 합쳐도 200명에 지나지 않았으므로 골목과 담장이 방어에 유리한 지형지세를 형성하는 경우궁을 택해 이곳으로 온 것이었다. 

     

    무리들은 왕과 왕후를 경우궁 재실에 두고 왕명을 빌려 앞서 우정국 거사 때 처지하지 못한 수구파의 나머지 중심인물인 민태호, 민영목, 한규직, 윤태준, 이조연, 내시 유재현 등을 불러들여 경우궁 입구에서 살해했다. 이때 당 20살의 일본 하사관학교 출신 서재필을 필두로 한 도야마 하사관학교 출신의 혁명파, 그리고 이규완을 비롯한 장정들의 칼날이 마구 춤을 추었다. 어두컴컴한 경우궁 앞길은 곧 피바다가 되었다. 그중 민영목이 살해되는 <갑신일록> 속의 장면은 다음과 같다. 

     

    민영목이 나타났다. 문밖 파수병이 잠시 제지하고 이름을 안에 알리니 안에서는 기다렸던 사람인지라 두말없이 허가하고, 따라온 사람들은 함께 들어가지 못하게 했다. 영목은 단신으로 대문에 들어섰고, 들어가자마자 대문이 닫혀 독 안에 든 쥐나 다름이 없었다. 경비병들이 도열한 사이를 걸어서 제2문에 들어설 때 자객이 나타났다. 일본군사들이 주변을 지키고 있기 때문에 도망갈 수도 없었고, 내리치는 단 칼에 쓰러졌다. 쓰러지면 길가에 구덩이를 파서 묻고 핏자국을 씻은 후 아무 일도 없었던 듯했다. 이 일은 일본 군사가 맡았다. 단지 자객은 한인(韓人)이며, 일본인들은 칼을 뽑지 않았다. 다음에 들아온 자는 조영하, 이어 민태호였다. 그들 역시 살해당한 상황은 다르지 않다. 

     

    왕과 왕후는 경우궁 재실에서 하룻밤을 보냈지만 불안하고 불편하기가 이루 말할 수 없었던지라 10월 18일 날이 밝자 민왕후는 경복궁이든 어디든 이처할 것을 강력히 요구했다. 이에 개화파는 곤란한 처지가 되었으나 궁궐로 가는 것은 아직 위험하다 우기며 경우궁 가까이 있던 연령군의 종가(宗家)로 이처시켰다. 이 집은 숙종의 막내아들 연령군의 후손인 완림군 이재원의 집으로, 그는 흥선대원군의 장조카이자 고종의 종형이기도 했다. 그와 같은 연유에다 집도 넓어서인지 고종과 민왕후는 앞서보다 한결 편안한 얼굴이 되었다. 

     

    ※  왕이 머문 집은 궁으로 승격되는 조선의 국법에 따라 이재원의 집은 계동궁(桂洞宮)이 되었다. 갑신정변 당시 계동에 있던 경우궁은 갑신정변 이듬해인 1885년 옥인동으로 이축되었으나, 계동궁은 이후로도 3대(이재원·이기용·이형길)가 이어 살며 1960년까지 존재했다. 하지만 1980년 현대 정주영 회장이 일대의 땅을 매입해 집들을 철거하였고, 이후 현대 사옥이 들어서며 경우궁·계동궁 및 관상감 자리를 모두 점해 경우궁과 계동궁이 어떤 모습이었는지, 아울러 이 일대가 어떤 모습이었기에 왕을 이거시켰는지 전혀 알 길이 없어졌다.

     

     

    현대사옥 앞 노변의 계동궁 터 표지석
    계동 현대사옥과 관상감의 잔해
    19세기 중엽 수선총도 속의 경우궁

     

    왕을 안심시킨 개화파는 이 집에서 개화파 인사와 종친으로 이루어진 연립내각을 조각했다. 얼떨결에 개화파에 협조하게 된 이재원은 요즘의 바지사장 격으로 혁명정부의 좌의정이 되었고 곧 다시 영의정에 올랐다.(그는 혁명정부가 3일천하로 끝나면서 부역자로서 처벌받을 처지가 되었지만 고종의 비호로 귀양을 면한다) 개화파의 좌장격인 김옥균은 기존의 종이품 호조참판에 머물며 적어도 겉으로는 권력욕을 드러내지 않았다. 

     

    그날 오후 왕과 왕후는 다시 환궁을 졸라대었고, 개화파들도 어느 정도 일이 마무리되었다 여겼는지 오후 5시경 왕과 왕후를 다시 창덕궁으로 이거시켰다. 이 과정에서 김옥균은 "궁으로 돌아가게 되면 청군의 공격에 방어하기 어렵다"하여 반대하지만 일본공사 다케조에가 방어에 문제없다고 큰소리치며 창덕궁으로 일본군 150명을 이동시키자 김옥균도 따를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왕과 왕후를 대조전에 모시지 않고 창덕궁 내의 높은 지대에 위치하며 문과 담장으로 둘러싸인 협소한 장소 관물헌(觀物軒)에 두는 신중함을 유지했다.   

     

     

    창덕궁 관물헌
    고종이 쓴 '집희(緝熙)' 현판이 걸려 있다.
    창덕궁 요휘문


     

    다음날인 10월 19일 오전 9시, 개화파들은 밤 늦게까지 다듬은 80개조의 정령(政令, 정책 및 공약)을 발표했다. 그 중요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1. 대원군을 불일내(不日內)로 모셔올 것.

    1. 문벌을 폐지하여 인민(人民)이 평등한 권리를 갖는 제도를 마련하고, 사람으로서 벼슬을 택하되 벼슬로서 사람을 택하지 말 것.

    1. 온 나라의 지조법(地租法)을 개혁하여 관리의 부정을 막고 백성의 어려움을 펴게 하는 동시에 국용(國用)을 유족하게 할 것.

    1. 내시부(內侍府)를 혁파하되, 그 가운데 우수한 인재가 있으면 모두 등용할 것.

    1. 전후(前後) 간에 간악하고 탐욕하여 나라를 병들게 하기로 가장 드러난 자는 정죄(定罪)할 것.

    1. 각 도의 환상(還上) 제도는 영구히 와환(臥還)할 것.

    1. 규장각을 폐지할 것.


    고종은 정령을 받기 이전 이미 개화파에 수상함을 감지하고 있었다. 그리고 정령의 제정과 인사 등에서 국왕인 자신이 배제되고 있음에 모종의 불안감과 불쾌심을 느끼고 있었는데, 아니나 다를까, 정령 두루마리를 펼치는 순간, 눈이 돌아가버리고 말았다.

     

    '이럴 수가..... 아버지 흥선대원군을 조만간 데려온다고....?' 세상이 바뀌었으니 내시부가 혁파되고 그중 능력 있는 자는 관료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또 이들이 발표한 각료 명단에서 보았듯 정3품의 고위직에 건달들이 임명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아버지를 데려오는 것은 안 된다. 이미 권력을 맛을 본 아버지인 터, 다시 권력을 차지하기 위해 날뛸 것이 뻔하다..... 민왕후하고는 또 얼마나 싸울런가.....'

     

    "전교형식(傳敎形式)으로써 이 80개 개혁 조항을 공포하겠사옵니다. 정오까지 조서(詔書)를 내려 정식으로 공포할 수 있게 해 주소서."

     

    김옥균이 마지막 강압조의 말도 고종의 귀에는 들어오지 않았다. 그의 아버지 흥선대원군도 권력의 화신이었지만 그 역시 권력의 화신이었다. 따라서 그는 자신의 권력에 도전하는 모든 것들을 가차 없이 제거했으니 이를테면 앞서의 구식군대들, 당장의 김옥균, 1894년 한양을 향해 쳐들어왔던 전봉준, 을미사변 이후 친일내각을 이끌었던 김홍집, 입헌군주제를 주장했던 독립협회와 만민공동회..... 이상은 모두 고종의 역린(逆鱗)을 건드려 박살 난 케이스였다.

     

    '이 자식이, 보자 보자 했더니.....'

     

    개화파가 대원군을 데려오겠다는 건 청나라에 대한 독립에의 표방일 뿐 다른 뜻이 있을 리 없었다. 하지만 고종은 이미 분노로 달아올라 있었던 바, 대답 대신 자리에서 일어나 관물헌 밖으로 나갔다.(그가 사람을 시켜 몰래 청군을 불러들였는지에 대해서는 자신 있게 답할 수 없지만, 민왕후가 그리 했을 개연성은 차고도 넘친다)

     

    고종은 곧 돌아오기는 했으나 누군가를 기다림인지, 오후가 한참 지나서도 조서를 내리지 않고 버티다 3시가 가까워질 무렵, 체념한 듯 조서를 내려 공포한 정강의 실시를 선언하였다. 이제 이 갑신년의 정변은 성공한 셈이었다.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김옥균이 개화파를 대표하여 조서를 받아 들려는 순간, 갑자기 밖에서 대포의 굉음에 이어 요란한 총소리 소리가 들려왔다. 교전이 벌어진 듯 총소리는 끊어짐이 없었다. 김옥균을 비롯한 개화파들이 밖으로 뛰어나갔을 때 이미 청군 1,500명은 창덕궁의 돈화문과 함양문 양쪽으로 나뉘어 꾸역꾸역 밀려들고 있었다. 돈화문 쪽의 군대는 원세개, 함양문 쪽의 군대는 창경궁 선인문으로 들어온 오조유의 부하들이었다.

     

    개혁파와 이들을 지지했던 민간인 건달 및 일본공사관 병력은 사전에 나름대로 3중의 튼튼한 방어선을 구축했다. 즉 외위(外衛)인 돈화문은 조선군이 지키고, 중위(中衛)인 인정문은 150명의 일본군이, 편전 앞인 선정문은 서재필이 이끄는 약 20명의 친위군과 혁명파 장정이 지켰다.

     

    그러면서 박영효는 전·후영(前·後營)의 영장(營將)을 교체해 전후영 소속 병사에 대한 지휘권을 확보했으나 청군의 영향 하에 있던 좌·우영(左·右營) 영장은 교체하지 못했다. 외위가 쉽게 무너진 것은 이 좌·우영이 청군에 대한 적극적인 방어를 펴지 않은 까닭이었다. 아니 그들은 아예 총을 쏘지 못했고, 괜히 서 있다 총에 맞을까 도망가기 바빴다. 지휘관인 영장이 개화파가 아닌 까닭이었는데, 그로 인해 청군과 적극적으로 교전하던 인정문의 전·후영 군사마저 무너져 달아날 수밖에 없었다. 혁명은 순식간에 위기로 치달았다.

     

    * 2편으로 이어짐. 

     

     

    전투가 벌어졌던 창덕궁 돈화문
    청군이 들이닥친 창경궁 선인문
    서재필이 지킨 창덕궁 선정문
    일본군이 지킨 창덕궁 인정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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