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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구월산 유격대장 이정숙과 불암산 유격대장 김동원
    잘 알려지지 않은 흥미로운 역사 이야기 2025. 6. 13. 22:30

     

    앞서 쓴 '최후의 빨치산 정순덕 여사'는 조회수가 별로 높지 않은 본 블로그에서 제법 효자 노릇을 했다. 이유가 있을 것이다. 그 골수 빨갱이에 관해 쓴 글의 첫머리는 다음과 같이 시작한다. 

     

    기억하실 분은 거의 없겠지만 20년 전 오늘은 정순덕이 죽은 날이다. 제목대로 그는 최후의 빨치산이라 불리는 사람으로, 내가 여사라는 호칭을 붙인 것은 그저 그가 여자임을 강조하고 싶어서이다. 정순덕에 대해서는 "하동 사람은 아이들이 울면 '그러면 호랑이가 와서 잡아간다'가 아니라 '정순덕이 와서 잡아간다'고 했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공포의 대상이었다고 하는데, 놀랍게도 여자였던 것이다. 

     

    정순덕은 먼저 빨치산이 된 남편 성석근을 만나기 위해 1951년 2월 지리산으로 들어간 후 무려 13년간을 빨치산으로 활동하다 1963년 11월 18일 새벽 고향인 산청군 삼장면 내원리 농가에서 붙잡혔다. 이때 정순덕은 다리에 두 발의 총을 맞고 체포됐는데, 총알이 허벅지와 골반 뼈를 관통해 결국 한쪽 다리 전체를 절단하는 수술을 받아야 했다. 이후 그는 23년간을 복역하다 출소했으며, 나머지 기간을 비전향 장기수의 살림집인 봉천동 '만남의 집'에서 생활하다 2004년 인천의 한 병원에서 숨을 거뒀다.   

     

     

    둘 남았던 빨치산 중 이홍희는 이렇게 사살되고
    정순덕은 체포됐다. / 29년이라 쓰여 있는 것은 당시 연령이다.
    좌빨들이 모신 마지막 가는 길
    파주 '통일애국투사묘역'에 조성된 정순덕 묘 / 그런데 이게 과연 올바른 건가?

     

    앞서도 말했지만 빨치산은 게릴라를 의미하는 러시아어 '파르티잔(партиза́н)'에서 유래된 말로, 원어보다는 '산(山)에서 싸우는 빨갱이'로써 유명해진 조선 인민유격대를 가리키는 말이었다. 그래서 대한민국의 파르티잔은 빨치산이라고 부르지 않고 '유격대'라고 부르는데, 그중 구월산유격대는 지리산 빨치산과 마찬가지로 휴전 이후에도 적지에 남아 북한군을 괴롭히는 임무를 수행했다.

     

    북한 국군 파르티잔 중 가장 대표적인 유격대가 황해도 구월산유격대로, 이 부대를 이끌며 6·25전쟁 중 혁혁한 공을 세운 김종벽·이정숙 부부는 훗날 아들이 충무무공훈장을 받았다. 김종벽 구월산 유격대장(당시 대위)은 1914년 황해도 은율에서 태어났으며, 한국전쟁 전에는 육군본부 정보국을 창설하였고, 전쟁 당시는 정보국 대원으로 평양까지 진격했으나 중공군의 공격에 국군에서 낙오되자 고향 은율에 숨었다. 그리고 그곳에서 600명 규모의 구월산유격대를 조직했는데, 1951년에는 2500명까지 늘어나며 북한군의 불안한 후방으로 자리매김했다.  

     

    이들 가운데는 여성 대원들도 수십 명에 이르러 적군 정탐, 간호, 부식 조달 등을  담당했다. 그렇다고 이들이 전투에서 열외되지는 않았으니 그들 역시 총을 들고 싸웠는데, 놀라운 것은 이들 중의 한 명이 훗날 구월산유격대의 대장이 되어 전투를 이끌었다는 사실이다. 그 여성이 바로  '구월산 여장군' 이정숙 대장으로, 함흥 갑부의 외동딸 이정숙은 6.25 전쟁 직전에 공산 정권에 의해 부모와 남편을 잃었으며, 그 자신도 투옥되었던 전력이 투혼의 바탕이 됐다. 

     

    겨우 감옥에서 탈출한 그는 1950년 10월, 황해도 안악에서 '서하무장대'를 조직, 70여 명의 무장대원과 농민군을 이끌고 조선인민군에 맞써 싸우는 놀라운 일을 벌였는데, 이후 황해도 재령에서 육군장교 출신 김종벽의 구월산유격대와 합류하게 되었고, 함께 여러 번 사선을 넘으며 싹튼 전우애에 결혼까지 하였던 것 같다. 어릴 적 만화가게에서 탐독했던 고우영 화백의 만화 '구월산유격대'의 감동은 나이가 먹은 지금도 생생한데, 그것이 실화를 바탕으로 그려졌다는 사실이 새삼 놀라울 뿐이다.  

     

     

    '구월산 여장군' 이정숙(李貞淑, 1922~1959)

     

    김정숙 대장의 활약 중 특기할 것은 국군 북파 부대의 황해도 월사리 반도와 어양리 지역 상륙작전에 참여하여 북한군의 후방을 교란하고 북파 부대의 길 안내를 한 일과, 1952년 황해도 장연에 갇혀 있던 국군포로 89명을 구해내 탈출시킨 일로서, 그는 이 공로로 정일권 육군참모총장으로부터 표창을 받기도 했다. 이외에도 무궁무궁한 구월산유격대의 활약은 대부분은 알려지지 않다가 1998년 정부 문서 창고에서 관련기록이 발견되며 밝혀지게 되었다.

     

    기록에 따르면 구월산유격대의 대원은 총 3329명이었으며, 조직과 편제가 명확하였고, 공식 마크까지 달았던 실전부대로서, 미군의 협력 하에 공동 작전을 펼친 전력도 있다. 이와 같은 분명한 기록에도 불구하고 이후 좌빨들이 설치는 세상이 된 때문인지 지리산 빨치산의 활약상(?)에 가리어진 채 지금까지도 별로 회자되지 않는다. 이들이 구출해 남으로 내려보낸 북한 동포가 무려 40만 명에 이른다 함에도....

     

     

    구월산유격대의 여성대원
    오른쪽부터 구월산 유격대장 김종벽 대위와 이정숙 유격대원
    구월산의 위치
    황해남도 은률군 구월산 / 평화문제연구소 사진
    대전 현충원의 김종벽·이정숙 묘 / 커머스 갤러리

     

    다행히 뒤늦게나마 조명된 덕에 2012년 남편 김종벽에 이어 2015년 고(故) 이정숙이 국가보훈처가 선정하는 '이달의 전쟁영웅'에 여군으로 처음 선정되었고, 이어 국방부가 수여하는 충무무공훈장 수훈자가 되었다. 부부가 동시에 무공훈장 수훈자로 결정된 것은 건국 이래 처음이며, 부부 무공훈장 수훈은 전 세계적으로도 드문 사례라고 한다.

     

    하지만 일생은 내내 불행하였던 것 같으니, 아들 김광인씨는 "어머니는 1959년 서대문형무소에 눈을 감으셨다. 아버지는 비정규 군인이었던 부하들의 생활 걱정을 들어주다 본인을 챙기지 못한 채 2004년 폐암으로 돌아가셨다. 가족들의 생활이 말이 아니었다"고 증언했다.

     

    앞서 월북작가 이태준을 논하며, 한국전쟁 중 구월산유격대가 2번이나 출격해 이태준 구출작전을 폈으나 실패했는데, 한 번은 행방을 찾지 못했고 한 번은 본인 스스로 월남을 거부했다고 말한 적이 있다. 시기적으로 보면 이정숙이 유격대장으로 활약하던 시기였는데, 이 천재일우를 기회를 스스로 걷어차버린 이태준은 결국 비참한 최후를 맞고 말았다. 공산주의에 경도되어 문학도 사상도 인신의 자유도 잃은 불행한 천재, 아니 불행한 바보이다. 

     

     

    고향 철원에 흉상으로 남은 상허 이태준

     

    잘 알려지지 않은 국군유격대 중에서는 불암산유격대도 있다. 대한민국 내 좌빨들은 아직도 믿지 않는 경이로운 현실이 지속되고 있지만, 1950년 6월 25일 새벽 4시 북한군의 기습공격으로 6.25전쟁은 시작됐다. 이후 서부지역은 황해도 옹진반도, 개성·장단·연천지방에서 전투가 벌어졌다. (그때는 이곳이 모두 3.8도선 안에 속한 남한의 영토였다) 하지만 워낙에 방비가 미약했던 탓에 방어선은 곧 무너졌고 문산·동두천·포천·의정부지역이 속수무책으로 뚫리고 말았다.

     

    급했던 군국은 포천 의정부 방면의 북한군을 막기 위해 태능에 있던 육사 생도들을 긴급 투입했다. 임관 20일을 남겨둔 262명의 장교 후보생이었다. 육사 생도들이 최전선의 전장에 투입된 예는 세계 전사에서 유례를 찾기 힘든 일이지만 FM(필드 메뉴얼)을 따질 계제가 아니었다. 그들은 치열하게 싸웠지만 중과부적이었던지라 후퇴하지 않을 수 없었는데, 일단 태릉으로 철수해 불암산 일대에 배치되었다.

     

    그러나 그것은 오히려 고립을 자초하는 꼴이 되었다. 북한군은 6월 28일 새벽 1시경 미아리 최후방어선마저 뚫고 서울로 진입했고, 홍천 양평 쪽으로 진격한 북한군도 서울을 향해 다가왔던 바, 불암산의 국군은 자칫 적의 가운데 놓일 위험한 처지가 되어 버렸다. 이에 불암산 군대는 철수를 하지 않을 수 없었으나 육사 생도 김동원은 후퇴를 거부했다. 명색이 장교 후보생인 자신이 무턱대고 후퇴만 하는 것이 너무 부끄럽다는 변(辯)이었다.

     

    김동원은 자신은 여기 남아 불암산을 근거로 유격활동을 할 터인즉 뜻이 있는 자는 함께 하자고 했다. 아니면 나 혼자라도 싸우겠노라고.... 그러자 그의 결기에 감화된1기생 10명과 2기생 3명(그 2기생 생도들은 아직도 인적사항이 확인되지 않고 있다) 및 7사단 9연대 김만석 중사 등 부사관 2명과 병사 5명 등 전체 20명이 동참 의지를 표했다. 나머지 생도와 부대원들은 28일 아침 망우리 고개와 용마산을 거쳐 한강 광나루를 건넜다. 

     

    불암산에 남은 국군은 유격대를 결성했고, 전 대원의 투표로서 최초 유격활동을 제안했던 김동원 생도를 유격대장으로 선출했다. 이어 조영달·박인기·김만석 중사를 각 조장으로 선출하고 암호명은 '호랑이'로 정했다. 불암산유격대는 총 4차례의 작전을 감행하며 약 3개월 간 북한군의 후방을 교란했는데, 1차 전투였던 7월 11일 새벽 작전에서는 남양주 퇴계원의 북한군 보급기지를 기습 공격하여 유류 50드럼 및 보급품을 불태우고 30여 명을 사살하는 전과를 거두었다.  

     

    1차 전투에 고무된 유격대는 7월 31일의 2차 전투에서는 도봉구 창동 인근 북한군 수송부대를 급습하여 적을 사살하고 다수의 차량을 불태웠다. 8월 15일 밤에 감행된 세 번째 공격의 목표물은 생도들의 모교였던 육사 건물이었다. 당시 육사는 북한군이 의용군 훈련소로 사용 중이었는데, 유격대는 이곳에 주둔 중인  50여 명의 북한군을 거의 사살하고 의용군으로 끌려온 사람들을 탈출시켰다. 불암산유격대는 이처럼 혁혁한 전과를 올렸으나 한편으로는 희생도 있어 1차 전투에서 박인기·김봉교 생도가 전사하고, 2차 전투에서는 김만석 중사가, 3차 전투에서전희택·김동원·홍명집 생도가 산화하였다. 

     

    인천상륙작전 이후인 9월 21일 치러진 4차 전투에서는 남양주 내곡리의 북한군 수송대를 공격, 북쪽으로 끌려가던 주민 100여 명을 구출해내었다. 이 전투에서는 이장관·조영달·한효준·박금천 생도가 전사하고, 강원기 생도는 부상을 입은 채 마을사람들에게 구출돼 후송되었으나 부상 후유증으로써 1년 후 사망했다. 그리고 나머지 생도와 군인들도 적의 마지막 총공세에 모두 희생된 것으로 보이니, 9.28서울수복 후 국군이 불암산으로 이들을 구출하러 갔을 때는 단 1명의 생존자도 발견할 수 없었다. 불암산 유격대장 김동원도 이 무렵 전사한 듯싶다. 부근에 위치한 석천암 주지를 비롯한 승려와 인근 주민들의 도움을 받으며 유격작전을 전개한 것으로 알려졌는데, 석천암 부근에는 지금도 유격대원들이 은거했던 동들이 보존돼 있다.  

    불암사 입구에 게시된 유격대 작전도
    불암산 석천암 오르는 길
    나무뿌리가 만든 자연의 계단
    불암산 석천암 일주문
    석천암 가기 전의 은거 제1동굴
    제1동굴 안내문
    석천암 대웅전
    석천암 마애불
    은거 제2동굴
    제2동굴 안내문
    은거 제3동굴
    제3동굴과 안내문 / 제3동굴은 10여 명이 충분히 들어갈 정도로 크다. 안내문의 내용은 위와 동일하다.
    제3동굴 바로 앞으로 보이는 전경 / 은신처로는 안성맞춤이다.
    제3동굴 부근에서 내려본 석천암/ 눈 앞의 깎아지른 절벽이 아찔하다. 왼쪽 끝에 불암사가 보인다.
    제3동굴 부근의 쏟아질 듯한 바위들
    제3동굴 부근의 비스듬한 바위와 굽은 소나무
    이곳은 망루로 쓰였을 법하다.
    최후의 전투가 벌어졌음직한 산길

     

    유격대로 활동한 생도 1기생은 강원기, 김동원, 김봉교, 박금천, 박인기, 이장관, 전희택, 조영달, 한효준, 홍명집의 10명이고, 생도 2기생은 앞서 말한 대로 이름이 확인되지 않았다. 9연대 장병 역시 김만석 중사를 제외한 6명의 이름은 알려지지 않았는데, 조광한 전 남양주시장이 시장 재직시절 "기록으로 남기지 않은 것은 기억에도 남지 않는다"는 명언을 한 후 2020년 8월 불암사 입구에 이들 유격대원들을 기리는 충혼비를 세웠다. 위의 동굴들도 그가 찾아낸 것이다. 그는 내가 유일하게 직접적으로 아는 이재명과 싸우다 희생된 의인이기도 하다. 

     

     

    불암사 입구의 불암산유격대 충혼비
    6.25 전쟁 당시 육사생도가 사용한 철모가 복제돼 놓였다.
    수습된 불암산 유격대의 비품과 무기류
    지금 민주당은 나치당이라고 말하는 조광한 전 남양주시장
    경기도지사 이재명의 보복성 감사 중단을 촉구하는 조광한 시장 / 2018년 지방선거 때 남양주시장에 당선된 조 전 시장은 재직 시절 이재명 당시 경기지사와 재난지원금 지급 방식, 계곡 정비 치적 등을 두고 대립했고(이재명의 자랑거리인 계곡 정비는 조 시장 자신의 '정책 표절'이라며 직격) 이후 공무원 채용비리 혐의 등의 억울한 역공세에 오랫동안 시달렸다.
    그는 한 유튜브 방송에 출연해 '천망회회소이불실'이라는 말을 했다. 노자(老子) 73장에 나오는 말로 "하늘의 그물(天網)은 한 없이 성긴 듯하나 선악의 응보는 반드시 내려 결코 빠뜨리는 일이 없다"는 뜻이다. 그 하늘의 그물이 점점 죄어 오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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