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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최초의 여의사 김점동과 조국 딸 조민
    잘 알려지지 않은 흥미로운 역사 이야기 2025. 6. 15. 21:18

     

    앞서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 의사 박서양과 김필순의 이야기를 다룬 적이 있다. 우리나라 최초의 의사가 탄생한 시기만을 상기하자면 한일합방 전인 1908년으로, 박서양과 김필순은 당시 서울역 앞 세브란스 병원 자리에 있었던 제중원의학교를 졸업함으로써 동급생 다섯 명과 함께 의사가 되었다. 이들의 위인전적 삶에 대해서는 '우리나라 최초 의사 박서양과 김필순의 노블레스 오블리주'에 자세한 얘기를 실은 바 있다.

     

     

    당시의 제중원의학교 / 왼쪽에 숭례문이 보인다.

     

    우리나라 사람으로 최초로 의사가 된 사람은 서재필로, 갑신정변의 4인방으로 우리에게 잘 알려진 사람이기도 하다. 1884년 갑신정변 실패 후 일본을 거쳐 미국으로 간 서재필은 우여곡절 끝에 1890년 필립 제이슨(Philip Jaisohn)이라는 이름으로 미국시민권을 취득했다. 이후 주경야독으로 1894년 컬럼비안 대학교(현 조지 워싱턴 대학교의 전신) 부설 코크란 의대를 졸업한 후 대학병원 인턴을 거쳐 워싱턴에 개인 병원을 개업하였다. (* 참고로, 우리가 서재필 박사라고 칭하지만 그는 의학사일 뿐 박사학위를 받은 적이 없다. 의사의 호칭인 닥터가 박사학위자로 착각되었던 듯하다)

     

    우리나라 최초의 여의사는 김점동(金點童, 1876~1910)이다. 김점동은 박에스더로 불리기도 하는데, 박유산과 결혼한 후 서양식으로 남편의 성을 따라 박씨가 되었기 때문이다. 에스더는 미국에서 불린 이름으로, 김점동은 의사가 되는 꿈을 이루기 위해 남편 박유산과 함께 1895년 2월 미국으로 건너가 뉴욕의 리버티공립학교에 입학했다. 이후 남편은 뉴욕항에서 부두 하역일을 하며 돈을 벌었고, 김점동은 뉴욕 병원에 취직해 피 묻은 시트를 빠는 노동일을 하며 학교를 다녔다. 

     

     

    유학시절의 김점동

     

    리버티공립학교에서 라틴어와 물리학, 수학 등을 공부한 김점동은 1896년 10월 볼티모어 여자의과대학에 입학했고 각고의 노력 끝에 4년 만에 의과대학을 졸업하며 한국 최초의 여성 의사가 됐다. 당시까지 한국인으로 의사가 된 사람은 미국에서 최초로 의사 자격증을 딴 서재필과 일본에서 의학교를 졸업한 김익남뿐이었다. 김점동은 그들에 이어 한국인으로서는 세 번째로 의사가 되었는데, 1908년 의사가 된 박서양과 김필순에 앞선 일이었다.  

     

     

    '의학교'의 교관 시절의 김익남(1870∼1937). 사진 왼쪽 / 그는 1894년 갑오개혁 때 정부장학생으로 일본에서 유학한 후 1899년 7월 도쿄 지케이의원의학교를 졸업하고 한국인 최초로 근대식 의사가 됐다.

     

    김점동이 의사가 되기까지는 남편 박유산의 헌신적인 노력이 있었다. 그는 현지인들도 힘들어한다는 뉴욕항 부두 하역일에, 농장 막노동, 식당 접시닦기 등을 전전하며 아내의 학업을  뒷바라지했는데, 아내가 의대 졸업을 2개월 앞둔 1890년의 어느 날 과로로 쓰러진 후 결국 일어나지 못했다. 미국에서 남편의 장례를 치른 김점동은 1900년 10월 귀국했고, 그해 12월에 창간된 우리나라 최초의 신학잡지인 <신학월보> 창간호에는 다음과 같은 기사가 실렸다.

     

    부인 의학박사 환국하심. 박유산 씨 부인은 6년 전 이화학당을 졸업한 사람인데, 내외가 부인 의사 로제타 셔우드 홀 씨를 모시고 미국까지 가셨더니 공부를 잘하시고 영어를 족히 배울뿐더러 그 부인이 의학교에서 공부하여 의학사 졸업장을 받고 지난 10월에 조선에 환국하였다.... 미국에 가셔서 견문과 학식이 넉넉하심에 우리  조선의 부녀들을 많이 건져내시기를 바라오며 또 대한에 이러한 부인이 처음 있게 됨을 치하하노라.

    <신학월보>는 감리교 선교사 존스가 주도하여 1900년 12월 창간한 한국 최초의 신학 잡지이다.

     

    한국에 돌아온 김점동은 자신이 소녀 시절 의료보조로 일했던 보구여관(普救女館)의 책임의사로 의료 활동을 펼쳤다. 보구여관은 이화학당을 세운 메리 스크랜튼(Mary F. Scranton)이 1887년 미국 감리교 여성선교부의 자금 지원을 받아 설립한 한국 최초의 여성전문 병원이었다. (이름은 명성황후가 하사했으며, 흔히 쓰이는 保救女館은 잘못된 한자표기임) 

     

     

    정동제일교회와 이화여고 사이에 위치한 보구여관 터 표석
    보구여관의 옛 사진
    마곡동 이대병원 내에 복원된 보구여관

     

    이후 그는 자신의 은인이었던 로제타 셔우드 홀(Rosetta Sherwood Hall)이 평양에 기홀병원(起忽病院)을 세우자 그곳으로 자리를 옮겼다. 기홀병원은 한국에서 로제타와  함께 의료봉사활동을 펼치다 죽은 남편 윌리엄 홀을 기념해 세운 병원으로, 윌리엄은 1894년 일어난 청일전쟁 평양전투의 부상병을 치료하다 발진티푸스에 감염돼 사망했다. 김점동은 평양에 부임한 지 10개월 만에 3000명 이상의 환자를 진료할 정도로 열심히 일했으며, 평양의 여성치료소인 광혜여원(廣惠女院)에서도 헌신적으로 진료했다.  

     

    더불어 황해도와 평안도 등을 순회하면서 무료진료 활동을 펼쳤으며 기홀병원 부속 맹아학교와 간호학교에서 교사로 학생들을 가르치기도 했다. 김점동은 엄동설한에도 당나귀가 끄는 썰매를 타고 환자를 찾아갈 만큼 열성적이었고 의술이 또한 뛰어났다. 그래서 당시 미신이 만연한 조선 사회에서도 그의 인술(仁術)과 의술은 '귀신이 재주를 피운다'라는 소문이 날 정도로 유명했는데, 당시 그가 행한 인공관을 이용한 방광질 누관 폐쇄수술은 매우 선도적인 의술로서 알려져 있다.

     

     

    구한말의 푸른 눈의 여의사 로제타 셔우드 홀(1865~1951) / 그는 펜실베이니아 여자의과대학을 졸업한 후 뉴욕에서 빈민을 위한 의료 활동을 하다 1890년 10월, 보구여관의 두 번째 여의사로 내한했다.
    평양 광혜여원 병동 (기홀병원과 함께 쓰인듯)

     

    김점동은 바쁜 의료활동 가운데서도 근대적 위생 관념을 보급하는 활동을 활발하게 펼쳤다. 그는 당시의 비위생적 환경이 병을 만드는 원인의 하나라고 판단하여 그에 대한 예방에 나섰던 것이었다. 그러나 정작 자신의 몸은 돌보지 못했으니 어쩔 수 없이 비위생적 환경에 노출되어야만 했다. 그리하여 그는 공기로 전염되는 질병인 결핵에 감염되고 말았는데, 선교사들의 도움으로 얻은 뒤늦은 요양 휴가가 무익하게 1910년 4월 13일 서울의 둘째 언니 집에서 결국 사망하고 말았다. 소생도 없는 35세의 짧은 생이었다.

     

    그를 죽게 만든 결핵은 당시 조선에 만연한 질병이었다. 그로부터 16년 후인 1926년 7월 로제타 홀의 아들인 셔우드 홀(Sherwood Hall, 1893~1991)이 한국으로 건너와 황해도 해주 구세병원(求世病院)의 원장으로 부임했다. 그리고 1928년 결핵 전문병원이자 요양원인 해주구세요양원을 세웠으며, 1932년에는 해주구세요양원 이름으로 크리스마스 실을 발행해 결핵퇴치 기금모금에 나섰다. 

     

    한국에서 태어난 셔우드 홀은 어릴 적 어머니 로제타와 함께 일하던 김점동을 이모처럼 따랐고 김점동 역시 어린 셔우드를 매우 예뻐했다고 한다. 그런 인연으로써 셔우드는 김점동의 죽음에 큰 충격을 받았고 이후 의사로서 다시 한국에 온 셔우드는 우리나라의 결핵환자들을 위해 노력했던 바, 말하자면 우리나라 최초의 크리스마스 실은 김점동 덕에 발행된 셈이다. 

     

     

    홀의 마지막 가족사진 / 딸 이디드는 3살 때 풍토병에 걸려 고열 속에 죽었다. 사진 속 사내 아이 셔우드는 한국으로 다시 돌아와 의사로서 봉사했다.
    셔우드 홀이 만든 우리나라 최초의 크리스마스 실 / 왼쪽 것이 최초의 실로서 그가 세운 해주 구세요양원 글자가 보인다.
    서울 양화진 선교사묘역의 로제타 홀 무덤과 셔우드 홀 공적비

     

    이상 김점동의 삶을 축약해 설명했다. 그런데 그는 어떻게 의사의 길로 들어서게 되었을까? 그 최초의 인연을 한 신문이 소개 한 바 있어 그대로 옮겨 싣기로 하겠다. 

     

    1887년 몹시 추운 어느 겨울날, 이화학당의 당장실로 열 살짜리 여자 아이가 부모의 손을 잡고 들어섰다. 그곳엔 아이가 생전 처음 보는 파란색 눈의 서양인 부인이 앉아 있었다. 부인은 아이를 반갑게 맞으며 난로 가까이 다가오라고 잡아당겼다. 그 순간 아이는 두려움을 느꼈다. 부인이 자신을 난로 속에 잡아넣어 태워버릴 것만 같아서였다. 하지만 그 부인의 친절한 미소를 보며 아이는 이내 그런 생각을 떨쳐버릴 수 있었다.

     

    그 서양인 부인은 바로 이화학당의 설립자인 미국인 선교사 스크랜턴 부인이었으며, 여자 아이는 이화학당 부근의 가난한 집에서 태어난 김점동이었다.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식 여학교인 이화학당이 개설된 시기는 1885년 8월이다. 그러나 첫 학생이 들어온 것은 그 이듬해인 1886년 5월이었다. 여성의 신교육에 대한 인식이 좋지 않던 때라 양반집 자녀들이 오지 않았던 탓이다. 그렇기 때문에 처음 의도와는 달리 이화학당에는 주로 가난한 집 아이들이 입학했으며 김점동도 바로 그런 경우였다. 

     

    이화학당의 네 번째 학생으로 입학한 김점동은 특히 영어에 뛰어난 소질을 보였다. 그래서 1890년 이화학당을 졸업한 후, 김점동은 보구여관에서 일하고 있던 여의사 로제타 셔우드 홀의 통역을 맡게 됐다. 그곳에서 김점동이 로제타 셔우드 홀을 통해 처음 접하게 된 의사의 모습은 늘 칼을 들고 수술하는 것이었다. 당시 의사라는 직업이 그리 좋게 보이지는 않은 이유였다. 그런데 어느 날 구순구개열 환자, 속칭 언청이라 불리던 10대 소녀가 로제타의 수술을 받고 정상적인 모습을 되찾는 과정을 옆에서 지켜보았다. 그 후 김점동은 자신도 의사가 되겠다는 결심을 했다.

     

    이후 김점동은 의사의 꿈을 이루기 위해 남편 박유산과 함께 미국으로 건너가 뉴욕의 리버티공립학교에 입학했다. 이 모든 것이 로제타 홀의 노력 덕에 이루어지게 되었는데, 김점동 부부가 미국에서 처음 자리를 잡은 곳도 로제타 홀의 친정집 부근이었다. 김점동은 이처럼 많은 사람들의 노력으로 우리나라 최초의 여의사가 되었으나 안타깝게도 요절하고 말았던 것이다. 

     

     

    김점동의 이화학당 시절 사진
    1895년 김점동 부부가 홀 가족과 함께 찍은 사진
    김점동 박유산 부부 / 두 사람은 당시의 조혼 풍습대로 1893년 5월 혼인하였다. 당시 김점동은 17세, 박유산은 26세였다. 이들 부부는 조선인 최초로 교회에서 서양식 결혼식을 치렀다.

     

    당시의 의사로서의 사회적 지위는 월등하지 않았으며 작업 환경 또한 지금보다 훨씬 어려웠던 것 같다. 하지만 지금은 그러하지 않으니 많은 사람들이 의사 되기를 원하는데, 그중에서는 김점동과 같이 부모의 손에 이끌려 의사의 길로 들어선 조민이라는 처녀도 있었다. 다 아는 바와 같이 그는 부모의 배경을 이용해 불법적이고 편법적인 방법으로서 부산대 의학전문대학원에 들어가 의사가 되었다. 힘들여 공부해 의사자격증도 취득했다. 

     

    하지만 조민은 의사가 되지 못했다. 뿐만 아니라 위와 같은 입시 비리로써 조민은 고려대(학사)와 부산의전원(석사) 입학이 취소됐고, 학위도 따라 취소됐다. (더불어 비슷한 입시 비리로 아들 조원의 대학·대학원 입학과 학위도 취소됐다) 법적으로도 죄를 물어 항소심에서 벌금 1,000만 원이 선고됐으며, 피고와 검찰 모두 상고하지 않아 그대로 형이 확정됐는데, 부모가 아니었다면 실형이 나올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교수였던 어머니 정경심은 긴 법정 다툼을 이어갔으나 사문서 위조, 위계에 의한 공무집행방해, 허위 공문서 작성 및 행사, 위조 사문서 행사, 보조금 위반, 사기 등의 혐의가 인정돼 징역 4년과 벌금, 추징금을 때려맞았다. 그는 복역 중인 2023년 9월 가석방으로 풀려났고, 모녀는 감격적인 재회를 이루었다. 

     

    아버지 조국은 입시 비리 외에도 뇌물수수, 직권남용 등 혐의로 징역 2년이 확정되어 복역 중이다. 딸 조민의 문제가 불거지지 않았다면 부모는 감방에 갈 일이 당연히 없었을 터인데, 이에 대해서 보고 들은 이야기 중에서 정혁진 변호사가 유튜브에서 했던 말이 가장 인상에 남는다. "조민은 드럼을 좋아했다고 합니다. 아쉽습니다. 만일 그가 대학에 가지 않고 드럼을 계속 쳤다면 아버지 조국은 아마도 대통령이 되었을 텐데 말입니다."

     

    조국은 정말 그렇게 될 수도 있었다. 아니, 필시 그렇게 되었으리라 본다. 인기 법학교수에서 청와대 민정수석이 됐던 그는 법무부장관을 거쳐 대통령까지 될 뻔했으나, 법무부장관 청문회 직전 딸 조민의 입시비리가 불거지며 결국 낙마했으며, 감방까지 가게 되었다. 그 와중에 얻은 국회의원 뺏지도 날아갔다. 모두가 다 아는 이 얘기를 새삼스레 꺼내는 것은 엊그제 있었던 민주당 정성호 의원의 발언 때문이다.

     

    그는 지난 12일 한 라디오 방송에 출연해 "조국 전 대표와 배우자 정경심  교수, 아들, 딸이 받았던 형벌은 전체적으로 양형이 너무나 불공정했다"고 지적한 뒤, "자녀들은 고졸로 전락해 버리고, 대학원도 취소됐다. 뭔가 (조치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조 전 대표의 (8·15) 특별사면 및 복권이 필요하다는 주장이었다. 이른바 '친(親) 이재명계 좌장'으로 불리는 자로서 뭔가 영향력 끼치는 발언을 하고 싶었던 모양이었다. 

     

    하지만 이번에도 너무 나간 듯싶다. 아니 옳지 않은 발언을 한 듯싶다.  물론 죄는 지었지만 나는 조국이 아비로서, 중책의 공직을 수행하던 사람으로서 감방 안에서 주어진 기간 동안 반성을 하고 나오길 바라고 있다. 본인 역시 그러길 원하지 않을까 한다. 안 그러면 인간도 아니려니..... 그런데 들어간 지 얼마나 됐다고 사면을 운운하나...? 나는 그가 왜 조국의 반성 기회를 강제로 빼앗으려 하는지 도통 이해해 가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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