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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형욱 실종사건과 중앙정보부의 부장들
    잘 알려지지 않은 흥미로운 역사 이야기 2024. 4. 7. 23:54

     
    1979년 10월 16일 프랑스 파리에서 전 중앙정보부장 김형욱이 증발했다. 그는 지금까지 소식도 없고 시신도 발견되지 않았다. 그래서, 이른바 '김형욱 실종사건'은 한국 현대사의 미스터리 가운데 하나이다. 하지만 결론은 대강 나와 있다. 전 중앙정보부장 시절 취득한 대통령 박정희의 비리에 대해 떠들어대던 김형욱을 현 중정부장인 김재규가 부하를 보내 납치 살해했다는 것이다.
     
     

    김형욱 실종 소식을 최초 보도한 1979년 10월 16일 자 동아일보 1면 기사
    미국 뉴저지의 김형욱 묘 / 2005년 뉴저지주 잉글우드 브룩사이드 묘지에 조성됐다. 필시 가묘일 것이다. (미주한국일보 사진)
    중정부장 시절의 김형욱(1925~1979)
    김형욱과 제6대 중정부장 이후락

     
    나는 새도 떨어뜨린다는 중앙정보부의 초대 부장은 김종필이었다. 5.16 쿠데타의 실질적 주역이었던 김종필은 미국 CIC를 모방한 정보기관을 만들어 1년 8개월을 재직했다. 실권자였던 김종필은 그 1년 8개월 동안 중앙정보부를 최고의 권력기관으로 조직화시켰다. 이어 김용순이 2대 부장으로 2개월을 재직했고 김재춘이 3대 부장으로 5개월을 재직했다. 그리고 김형욱이 4대 부장으로 취임했는데, 그는 무려 5년 3개월을 재임하며 (1963년 7월부터 1969년 10월까지) 최고 권력기관으로서의 입지를 공고히 했다.
     
    김형욱은 1961년 발생한 5.16 군사 쿠데타에 현역 중령으로 참가한 인물로 김종필과는 육사 8기 동기였다. 김형욱은 쿠데타 모의 동안 육사 8기 동기생들 간 연락책을 맡았으며 쿠데타 직후에는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으로 옹립됐던 장도영 대장을 반혁명 세력으로 몰아 퇴진시키는 등 5.16의 일등공신 역할을 했다. 그는 이후로도 박정희 정권의 창출과 유지를 위해 물불을 가리지 않고 달려들었던 바, '남산 멧돼지'라는 별명을 얻기도 했다. '남산'은 당시 중앙정보부가 있던 곳으로 중정의 별칭으로 쓰였다. 
     
    김형욱은 JP(김종필)의 도움으로 중정부장이 됐다. 그 무렵인 1963년 민주공화당 창당을 둘러싸고 박정희 전 대통령의 2선 후퇴 이야기가 나왔다. 이후 권력자들 사이에서 내분이 끊이지 않았는데, 박정희 대신에 JP를 추대하자는 모의도 있었다. 그것이 박정희의 귀에 들어갔고 이후 JP는 모든 공직에서 물러났다. 공항에서 외유를 떠나는 이유를 묻는 기자들에게 한 "자의 반, 타의 반"의 발언은 이후로도 오랫동안 회자되며 JP의 대표 어록이 됐다.
     
    그 '타의 반'에 3대 중정부장 김기춘도 포함돼 있었다. 하지만 JP는 그대로 물러서지는 않았으니 자신의 남은 힘으로 김재춘을 밀어내고 절친인 김형욱을 4대 부장 자리에 앉혔다. 그래서 만일 김형욱이 죽지 않고 살아 있었다면 2인자 JP를 1인자로 만들기 위해 역할을 했을 것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지만, 이는 김형욱을 몰라 하는 소리다. 그는 박정희의 환심을 얻으려 어떻게든 JP를 밟았다. 김형욱은 그런 위인이었다.  
     
     

    1963 '자의반 타의반' 시절의 김종필 / 오른쪽은 그를 밀어난 김기춘이다.
    김형욱(가운데)은 김종필의 도움으로 4대 중정부장이 됐다.

     
    이후 김형욱은 탄탄대로를 달리며 그야말로 나는 새도 떨어뜨릴 만한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둘렀다. 그는 중정부장 기간 동안 박정희의 권력 유지를 위해 3선개헌 공작을 주도하는 등 온갖 못된 짓을 다하다 1969년 10월 자리에서 물러났다. 그리고 1971년 7월에는 제8대 국회의원이 되었는데, 그는 이때도 야당 국회의원을 불러 조인트(정강이뼈)를 까는 등의 횡포를 저지르며 힘을 과시했다. 하지만 1972년 10월 17일, 이른바 '10월 유신'의 선포로 국회가 해산되며 무직자가 되었다.
     
     

    현재 119 서울시 소방재난본부로 쓰이는 남산 중앙정보부 서울시지부 건물

     
    좋은 말로는 야인이고 흔한 말로는 백수였다. 하지만 박정희는 더 이상 그를 끌어주지 않았다. 그러자 버려졌다고 생각한 김형욱은 미국 망명의 길을 택했다. 70년대 중반 그는 뉴욕의 한국식당, 술집, 카지노, 골프장을 드나들며 돈과 스캔들을 뿌렸다. 그는 이때도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을 공개석상에서 때리는 등 정보부장 시절의 행패를 부리기도 했다. 자신이 고용한 변호사의 뺨을 때린 적도 있었다. 그럼에도 그의 주위에는 사람들이 끊이지 않았으니 모두 그가 가진 돈을 보고 몰려든 사람들이었다.  
     
    그는 실제로 재력가였으니 뉴욕 웨스트체스터 카운티의 쇼핑센터도 소유하기도 했다. 그러나 한인단체의 기부는 단칼에 거절했다. 그런 데는 관심 없다는 변(辯)이었다. 훗날 열린 미 하원 프레이저 위원회가 조사한 바에 의하면 그의 재산은 1천5백만~2천만 달러에 이르렀다. (프레이저 위원회는 1978년 10월 도널드 매케이 프레이저을 비롯한 3명의 미하원의원이 이른바 코리아 게이트와 박정희 비리 사건을 조사하기 위해 소집한 위원회였으나, 이렇다 할 증거가 나오지 않으며 흐지부지 되었다) 
     
     

    1977년 6월22일 하원 레이번 빌딩에서 열린 프레이저위원회에 증인으로 나선 김형욱
    김형욱 역의 곽도원이 프레이저 위원회에서 열변을 토하고 있다. / 영화 '남산의 부장들'에서.(김형욱과 변호사 복장이 위 사진과 똑 같다.^^)

     
    그런데 그 많은 재산도 엄청난 씀씀이를 감당할 수 없었던 듯, 언제부턴가 김형욱이 자신이 가진 박대통령의 비리 정보를 미의회 의원에게 판다는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 실제로 그는 프레이저 위원회에 증인으로 출석해 박정희를 공개적으로 비난하기도 했는데, 즈음하여, 그가 현재 회고록을 집필중이며 탈고 후 일본 유명 출판사인 고단샤에 수백만 달러에 넘기기로 돼 있다는 소문도 돌았다. 그리고 소문에 불편했던 한국 중앙정보부가 회고록을 돌려받는 조건으로 김형욱에게 150만 달러를 제시했다는 말도 생겨났다.
     
    실제로 중앙정보부는 정일권, 김종필, 김동조, 오치성 등 그와 친분이 있던 전·현직 고위 인사들을 보내 귀국을 여러 차례 종용했다. 당근으로는, 압류 중인 김형욱의 국내 부동산을 모두 풀어주고, 휴양지로 유명한 어느 나라의 대사직을 제안하기도 했다. 하지만 모두 허사였다. 결국 중앙정보부는 그를 제거하기로 결정하고 이를 실행에 옮겼다. 그리고 마침내 1979년 10월 7일 저녁, 프랑스 파리 샹젤리제의 한 카지노에서 놀음을 마치고 나온 김형욱이 실종됐다.
     
    이에 대해서는 여러 시나리오가 나돌았는데, 대강 다음의 3가지였다. 
     
    ㅡ  이탈리아인과 일본인이 포함된 다국적 살인 청부업자 4명이 3만 프랑을 받고 김형욱의 후두부를 쇠망치로 때려 살해한 후 우아즈강에 수장했다.
     
    ㅡ  한국 유명 여배우가 그를 프랑스로 유인하였고, 주한 프랑스 공사가 김형욱을 설득했으나 통하지 않자 마취 주사를 놓아 KAL 화물편으로 서울로 보냈다. 이후 청와대 지하실에서 박정희에게 한바탕 욕을 먹은 후 대통령이 직접 방아쇠를 당긴 권총에 죽었다. 혹은 김형욱이 탄 차를 서울 근교 폐차장의 압축장치 속에 밀어 넣었다. 
     
    ㅡ  중앙정보부장 김재규 보낸 신입 정보부원 2명이 김형욱을 파리까지 추적했고, 차 안에서 그를 타격해 실신시킨 후 파리 근교 양계장 사료 분쇄기에 집어넣어 없앴다.
     
    이중 마지막 설이 가장 유력했다. 하지만 파리 근교 양계장 사료 분쇄기 가운데, 사람이 들어갈 만한 크기의 분쇄기가 없다는 것이 사실로 입증되며 급히 힘을 잃었다. 그럼에도 김형욱의 사망 배후에 중앙정보부장 김재규가 있다는 말은 사라지지 않았다. 그리고 <시사저널>에 당시 공작에 참가했던 정보부원의 증언이 실리기도 했는데, 설령 그것이 전부가 아닐지라도 중앙정보부가 사건에 관여한 것은 팩트일 것이다. 당대에 김형욱을 암살할 만한 조직이 그외 무엇이 있겠는가?  
     
     

    중앙정보부장 특수공작원의 김형욱 암살설을 조명한 '시사저널 ' 808호 표지

     
    사건 9일 후인 1979년 10월 16일, 국내 신문들은 <동아일보>를 필두로 '파리에서 실종된 김형욱 미스터리'를 일제히 보도했다. 파리 경시청에서도 여론을 의식해 수사에 들어갔다. 그리고 1980년 1월 24일 결과를 발표했는데, '김형욱이 정치적 목적에 의해 납치됐을 가능성이 의심되지만 납치 주체에 대해서는 밝혀낼 수 없었다'며 수사를 종결지었다. 그러면서 '김형욱이 파리에서 살해·암매장됐을 경우 매우 긴 시간이 흐른 후에야 시체 발굴이 가능할 것'이라는 하나마나한 소리를 덧붙였다.
     
    그보다 앞선 1979년 10월 26일, 그러니까 대한민국 신문에 김형욱 실종사건이 보도된 열흘 후, 종로구 궁정동에서 대통령 박정희가 중앙정보부장 김재규에 의해 시해되는 비극이 발생했다. 이른바 10.26 사건이었다. 김재규는 자신이 바로 며칠 전 대통령을 위해 김형욱을 제거하는 등, 견마지로를 다해 왔음에도 고마워하기는커녕 자신을 무시하는 박정희에게 대해 무진장 열이 받은 상태였는데, 거기에 새까만 후배 차지철까지 깐죽대며 설쳐대자 결국 뚜껑이 열려버린 것이었다. 
     
    사건 후 김재규는 당시 자신이 궁정동에 초대했던 정승화 육군참모총장 등과 함께 차를 타고 나오며, 자초지종을 묻는 정승화에게 대통령이 죽었음을 암시했다. 그리고 삼일로 고가 위에서 행선지를 묻는 운전석의 박흥주 대령에게는 그들의 운명의 가르는 말을 했다. 박흥주는 육군사관학교 출신의 포병 대령으로 김재규와의 오랜 인연으로서 수행비서관에 차출되어 중정으로 파견 나와 있는 현역 군인이었는데, 당시 나눈 짧은 대화는 다음과 같았다. 
     
    박흥주: 남산으로 갈까요? 용산으로 갈까요?  
    김재규: (잠시 생각하다) 용산으로 가자.  
     
    남산은 중앙정보부를, 용산은 육군본부를 말함이었다. 삼일고가에서 길이 갈라지므로 정승화 육군참모총장의 육본으로 갈 것인가, 우리 집인  중앙정보부로 갈 것인가를 물었던 것인데, 대답은 의외로 육본이었다. 
     
    역사에는 가정이라는 게 무의미하지만 만일 이때 김재규가 남산으로 갔다면 역사는 또 달라졌을 것이라고들 말한다. 육본으로 행선지를 정한 김재규는 이튿날 무방비 상태로 검거됐다. 그리고 정승화도 얼마 후인 12월 12일 보안사령관 전두환에 의해 검거됐다. 이른바 12.12사태의 시작이었다. 그리고 이후 권력을 장악한 전두환 신군부에 의해 김재규는 그해 12월 20일 사형이 선고됐고, 1980년 5월 24일 서대문 형무소에서 사형이 집행됐다
     
    그에 앞서 1980년 3월 6일 경기도 시흥군 소재 33사단 유격훈련장에서 박흥주의 총살형이 집행되었다. 당시 41살이었다. 비상계엄 하에서 현역 군인에 대한 재판은 단심제이므로 형의 집행이 관련자 중 가장 빨랐는데, 이를 알고 있던 김재규는 단지 자신의 명령에 복종했던 박흥주에 대한 선처를 최후 변론에서 요구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청렴하고 충직한 군인이요 자상한 남편이자 두 딸의 자애로운 아버지였던, 그리고 당시 나와 같은 동네에 살았던 박흥주 대령에 대해서는 언젠가 다시 말하려 한다)
     
    만일 삼일고가 위에서 김재규가 남산으로 방향을 틀었다면 과연 역사는 달라졌을까? 분명 그렇게 되었으리라 본다. 김재규가 권력을 잡지는 못했더라도 적어도 전두환의 출현은 남산의 중정요원들을 동원해 막을 수 있었을 것이라는 생각이 남산의 구 중앙정보부 청사를 둘러보았던 나의 결론이다. 
     
    그곳의 사진들을 아래에 올렸는데, 폭파 철거되어 사라진 제6별관, TBC 교통방송 건물로 사용되던 감찰동, 현재 서울시균형발전본부로 사용되는 6국(국내사찰 담당) 건물, 외부 사무실로 쓰이던 대한적십자사 건물, 석관동의 중정 외사과(해외정보 담당) 본청 등은 포함되지 않았다. 중앙정보부는 생각보다 훨씬 큰 조직이었다. 
     
     

    재판정으로 가는 김재규
    재판정으로 가는 박흥주
    1979년 10월 28일 오후 4시 10.26사건의 수사 결과를 발표하는 보안사령관 겸 합동수사본부장 전두환 / 그가 세인에게 처음으로 모습을 드러내는 순간이다. 전두환은 1980년 3월 중앙정보부장을 겸했다. 당시의 중앙정보부가 어떤 위상의 권력기관이었는가를 가늠케 해준다.
    현재 서울 유스호스텔로 쓰이는 중앙정보부 본관
    중앙정보부 제6별관 터 / 2017년 8월 옛 중앙정보부 6국 건물이 폭파 철거되었고 현재 지하통로만 남아 있다. 본관과 악명 높던 6국 지하 조사실을 연결하던 통로다. "본청으로 통하는 길목에 커다란 철문이 있었는데, 그곳에 잡혀 들어간 이상 몸 성히 나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했다"는 전직 정보기관 관계자 증언이 묻어 있는 장소이다.
    현재 서울시 중부공원여가센터로 쓰이는 제5별관 건물
    중정 제5별관 안내문 / 수사국으로 불렸던 이 건물의 지하 조사실도 악명 높던 곳으로 1987년 일명 수지김 사건 및 수많은 조작간첩이 만들어 진 곳이기도 하다.
    수사국(중정 제5별관)이 이 절벽 위에 건립됐다. / 중앙정보부의 구조는 흡사 성채와도 같다.
    중앙정보부는 옛 남산 조선총독부 자리에 세워졌다.
    옛 중정부장 관사는 지금 '문학의 집'이 되었고,
    중정 6국과 감찰동 자리에는 애국지사 '이회영 기념관'과 녹지공간이 생겼다.
    옛 중정이 얼마나 무서운 곳이었는가는
    부근의 옛 주자파출소터 안내문이 증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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