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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벨테브레이와 하멜
    잘 알려지지 않은 흥미로운 역사 이야기 2024. 4. 12. 23:54

     
    앞서 말한 바와 같이 표류한 하멜 일행을 조사한 제주목사 이원진(李元鎭, 1594~1665)은 매우 열린 마음의 사내였고, 또 당대의 세계를 알고 있던 드문 관료이기도 했다. 이것은 이원진이 하멜 일행에게 "너희는 서양의 길리시단(吉利是段, 크리스찬)인가?" 물은 것으로도 알 수 있다. 아울러 그는 하멜 일행을 과거 광해군이 유배되어 살던 집에서 생활하게 했다. 광해군은 그들이 도착하기 12년 전인 1641년 세상을 떠나 집은 비어 있는 상태였다. 
     
    이것은 이원진은 최대한의 배려였다. 어쩌면 그는 하멜 일행을 객관인 영주관(瀛州館)에 묶게 해주고 싶은 마음도 있었을는지 모르겠으나 차마 그렇게까지는 해줄 수 없는 터, 광해군이 살던 넓은 집을 숙소로 내주었던 것이다. 앞서 '광해군의 제주 유배지를 가다'에서 자세히 소개한 바와 같이 광해군의 적소지는 제주성의 남문 부근이었는데, 하멜이 훗날 표류기에 숙소에 대해서는 아무런 불만을 기재하지 않은 것을 보면 적소지는 그런대로 살만 했던 것 같다.
     
    아울러 36명의 하멜 일행이 살 수 있을 만큼 넓은 집이었는데, 이는 제주목사 이시방(李時昉, 1594~1660)이 폐주 광해군을 꽤 배려했다는 것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게 해 준다. 실제로 그는 광해군이 제주에 온 지 4년 4개월 만인 1641년 음력 7월 세상을 뜨자 시신이 썩을 것을 염려해 조정에 알리기도 전, 자물쇠를 부수고 들어가 염을 해줬다. 최근(2023.11.10) 그 적소지가 새로 발견되었다 하여 조용한 화제가 되기도 했는데, 참고로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새로 밝혀진 광해군의 적소지

     
    제주도시재생지원센터와 강문규 전 한라산생태문화연구소장은 광해군 적소지가 기존에 알려진 위치(제주시 이도일동 1474-1)가 아닌 제주목관아 서쪽 담장 너머로 추정할 수 있는 자료를 찾아냈다고 밝혔다. 이는 광해군의 제주 귀양살이에 관한 기록이 담긴 제주목사 이형상의 저서 <남환박물> (제주민속자연사박물관 발간)이 새로 발간되며 광해군의 적소지가 '망경루(望京樓) 서쪽 성안에 있다'고 기술된 내용을 찾아냈기 때문으로, 이 기록을 근거로 제주시 삼도2동 1057번지 제주 전통 와가(瓦家, 기와집)의 건축양식이 남아 있는 고옥(古屋)을 광해군의 진짜 적소지로 추정했다.  
     
     

    제주목 관아 안에 재현된 명경루

     
    아울러 음식도 충분히 지급했다. 하멜은 하루에 쌀과 밀가루가 각각 4분의 3 캐티씩 지급되었다고 했으며 이에 대해서도 불만을 기재하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1캐디는 한 근이므로 지급된 쌀과 밀가루는 각각 450g, 적은 양이라 할 수 없었다. 뿐만 아니라 반찬도 다양하게 제공되었다. (물론 처음에는 입에 맞지 않아 전혀 먹지 못하고 소금만을 반찬 삼았다고 했지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문화적 차이일 뿐이다)
     
    연회라고 할 수는 없지만, 이원진은  또 그들을 자주 불러 특식을 제공하고 여러 가지를 물어보며 관심을 표했다. 쉽게 말하자면 술과 고기를 대접했다는 것인데, 뿐만 아니라 난파 시 다친 선원들에게는 의원을 보내 치료해 주었다. 그리고 선원들의 호소를 받아들여 매일 여섯 명씩 교대로 외출할 수 있도록 배려했다. 6명씩 묶은 것은 감시를 용이하게 하고 도주에도 대비하기 위함일 터이다. 하멜 일행은 숙소 주변에 위치한 다음과 같은 것들을 구경했으리라 여겨진다.
     

    제주성의 성벽
    제주성 동문 부근의 제이각(制夷閣)
    제주시 삼도2동 제주객사 영주관 터
    복원된 정의현 객사 영양관(瀛陽館)
    영양관 / 제주 영주관도 정의현 객사와 같은 형태였다.
    제주북초등학교 교문 앞의 영주관 터 표석
    제주북초등학교 운동장
    제주 성읍마을 원님물통
    물이 귀한 제주의 관가용(官家用) 저수지이다
    제주 성읍마을 노다리 방죽 / 민수용(民需用) 저수지이다.
    말방아 / 제주지역에서만 볼 수 있는 말(馬) 동력을 이용하는 방아이다.

     
    이원진은 또 그들에게 격려도 잊지 않았다. 임금님께 장계를 올렸으니 그에 대한 회신이 오면 너희들을 풀어주고 나가사키로 가게 해주겠다는 말로써 용기를 심어 주었다. 하멜 일행이 크게 고마워했을 것임은 불문가지일 터, 하멜은 표류기에 "이방의 이교도로부터 기독교인이 무색할 정도의 후한 대접을 받았다고 적었다. 그리고 얼마 후 그들의 눈 앞에 놀라운 일이 펼쳐졌다. 표류한 지 두 달 보름만인 1653년 10월 29일의 일이었다.
     
    그날 서기와 일등항해사를 비롯한 이원진의 부름을 받고 관아로 갔다. 그들은 목사가 차려준 잔치상을 기대하며 관아로 들었으나 그들 앞에 출현한 것은 붉은 수염을 길게 기른 자신들과 같은 서양인이었다. 어리둥절해 있는 일행에게 이원진이 "이 사람이 누구인지 알겠는가" 물었고, 일행은 짐작대로 "우리와 같은 화란인입니까?" 되물었다. 그러자 이원진이 웃으며 이렇게 답했다.  
     
    "아니다. 이 사람은 코레시안(Coresian)이다." 
     
    하멜이 코레시안이라 적은 사람은 일행의 짐작대로 화란인이었다. 이름은 얀 얀서 더 벨테브레이(Jan Janse de Weltevree)로 조선식 호명은 본연의 이름인 '얀'과 성 '벨테'를 따 박연(朴延, 1595~?)으로 불려졌다. 그는 1627년(인조 5) 하멜 일행처럼 동료 두 명과 함께 제주에 표착했다. 그도 하멜 일행처럼 나가사키를 향해 가던 중이었는데, 드리크 하이스베르츠, 얀 피터스 베르바스트로와 함께 식수를 구하려 제주도에 상륙했다가 조선 관헌에게 붙잡혀 서울로 압송되었다.

    벨테브레이의 동료 둘은 정묘호란에 참전하여 전사했다. 이후 벨테브레이는 훈련도감에 배속돼 대포(홍이포) 만드는 일을 하다 과거를 봐 무과에 급제하고 조선 여인과 결혼을 해 아들 딸까지 두었던 바, 이원진이 그를 조선인(코레시안)이라도 부른 것이 농담이라고만 할 수 없는 노릇이었다. 벨테브레이가 제주까지 온 것은 아마도 이원진이 통역으로써 그의 제주 방문을 조정에 요청했기 때문이라 여겨지는데, 의외로 벨테브레이는 제 나라 사람들을 만나 것이 별로 반갑지 않은지 무표정한 얼굴로 한동안 말이 없었다. 
     
    그러다 한참 후 서툰 화란어로 어디서 왔는가를 물었다. 하멜 일행이 네덜란드에서 왔다고 답하자, 이번에는 어디서 출발해 어디로 갔는 길이었나를 물었다. 대화는 이렇게 시작되었는데, 먼 이역 땅에서 뜻밖의 동족을 하멜 일행이 얼마나 기뻐했을지는 보지 않아도 알 일이다. 그런데 하멜 표류기에는 "통역자를 만나 기뻤다"는 것 외에 별다른 감정이 기록되어 있지 않다. 느낌을 좀 더 솔직히 말하자면, 냉소적이라 여겼던 듯하다.
     
    하지만 여기에는 하멜의 오해가 있었다. 벨테브레이가 하멜 일행을 만났을 때 아무런 말도 하지 않은 것은 그가 조선에 억류돼 있는 동안 네덜란드 말을 잊어버린 까닭이었다. 그로 인해 혀가 돌아오기까지 한참의 시간이 필요했던 것이다. 그리고 또 한 가지, 하멜 일행은 당연히 고국으로 돌아갈 방도를 물었지만, 벨테브레이의 대답은 "없다"는 쪽으로 일관됐다. 그렇듯 계속 부정적으로 답한 것이 하멜을 불편하게 만들었을 터였다. 벨테브레이는 확실히 이렇게 말했다.
     
     "방법을 알면 벌써 내가 갔지, 조선에 있었겠소? 나도 여러 번 일본에 가게 해달라고 국왕에게 탄원했으나 통하지 않았소. 표류한 외국인을 국외로 내보내지 않는 것이 이 나라의 법도라 하오."
     
    그러나 정조 때의 문신 윤행임(尹行恁, 1762~1801)이 지은 <석재고(碩齋稿)>에는 전혀 다른 이야기가 적혀 있다. 하멜 일행을 만나고 돌아온 벨테브레이가 숙소에서 '소매가 다 젖도록 울었다'는 것이다. 벨테브레이가 먼 이역인 조선 땅에서 고국 사람을 만나 것은 표착 후 무려 26년 만이었다. 그는 기뻐도 너무 기뻤을 것이니, 동포를 만난 감격의 눈물, 그리고 그들도 돌아갈 희망이 없다는 현실에 눈물이 첨가되었을 것이다.
     
    윤행임의 글은 길지 않다. <석재고>의 내용에 따르면, 하멜 일행이 제주도에 표류하자 제주목사 이원진이 조정에 표를 올려 제주목에서 서양인을 억류하고 있음을 밝혔다. 그러면서 언어와 문자가 통하지 않아 답답하다 토로했고, 이에 비변사에서 훈련도감의 박연을 통역으로써 내려보냈는데, 박연이 그들을 만나 이야기를 나눈 후 숙소에 돌아와 소매가 다 젖도록 울었다는 것이다.
     
     

    어린이 대공원의 박연 동상 / 그의 고향인 네덜란드 더레이프(De Rijp)에도 같은 동상이 서 있다.

     
    벨테브레이가 만난 사람들은 우연찮게도 그들은 동족인 네덜란드인이었다. 모르긴 해도 반갑고 감격적이기는 벨테브레이 쪽이 훨씬 더 컸을 것이다. 이원진은 좋은 통역인 벨테브레이를 통해 얻은 정보들을 다시 조정에 올려 보냈다. 그리고  하멜 일행에게는 서울에서 곧 좋은 답신이 올 것이라며 용기를 북돋아주었다. 그러던 어느 날, 이원진은 난파선에서 건진 물건들을 하멜 일행에게 되돌려주었고, 겨울 겹옷과 바지 신발 등의 방한용품을 제공했다. 이원진의 마지막 선물이었다. 
     
    이원진은 1653년 12월 말, 임기가 끝나 제주도를 떠났다. 그리고 새로운 목사가 왔으나 그는 전임 목사처럼 친절하지 않았다. 아니 못된 놈이었으니, 우선 식량 지급을 줄였고 질도 낮추었다. 처우도 물론 열악해졌다. 이렇듯 분위기가 바뀌자 일행 중의 6명이 배를 구해 탈출을 시도했으나 배의 누수가 심해 멀리 가지 못하고 돌아와야 했다. 그들은 형틀에 엎드려 엉덩이를 까고 곤장 25대를 맞는 형벌을 치른 후 초주검이 되었다. 이것은 향후 그들에게 펼쳐질 혹독한 조선 생활의 서막 같은 것이었다.  
     
     

    <스페르베르 호의 불운한 항해일지>(=하멜 표류기) 속에 실린 하멜 일행의 표류 장면 삽화
    <스페르베르 호의 불운한 항해일지>에 실린 탈출 후 붙잡혀 와 볼기를 맞는 장면의 삽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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