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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수우당 최영경과 송강 정철
    잘 알려지지 않은 흥미로운 역사 이야기 2024. 4. 19. 21:35

     
    수우당(守愚堂) 최영경(1529∼1590)의 자는 효원(孝元), 호는 수우당이고 본관은 화순이다. 수우당은 병조좌랑을 지낸 세준(世俊)의 아들로 중종 24년 한성 원동리(창경궁 인근)에서 태어났다. 수우당의 집안은 선친 최세준에 이르기까지 대대로 벼슬살이를 한 명문가이나 수우당은 벼슬보다는 학문에 뜻을 두고 일찍이 진주로 가 남명(南冥) 조식의 문하에 들어갔다. 수우당은 훗날 기축옥사에 연루돼 심문을 받는 자리에서 자신이 진주로 간 이유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시국이 위태롭고 사론(士論)이 둘, 셋으로 나뉘며 명예와 이익의 경쟁은 날로 심해졌습니다. 이 몸은 화가 제 몸에 미칠까 두려워서 을해년(선조 8, 1575) 4월 경에 진주 동생 집으로 가서 의지했습니다. 
     
    그런데 정인홍이 지은 최영경 행장에는 보다 진실한 사유가 있다. 적어도 화가 제 몸에 미칠까 두려워서 도피한 것은 아니라는 얘기다.
     
    공(최영경)의 성품은 엄정하고 욕심이 적었으며 악을 미워하며 조금도 용서치 않았고, 사람을 사랑하고 어진 이를 좋아하는 것이 또한 공의 천성이었다. 아무리 고관(高官)이라도 탐오한 행동이 있는 자는 비록 만나자고 청해도 피했고, 만약 시세에 붙어 아부하는 사람이 있으면 진흙 뭍은 돼지처럼 보았다. 
     
    한성에 있을 때 성혼과 친교가 있었는데 성혼이 파주에서 서울로 왔으므로 그를 방문하고자 가다가 길에서 성혼 집에서 나온 친구를 만났다. 그가 말하길 "방금 성혼의 집을 방문하였더니, 성혼이 심의겸과 이야기하면서 문을 닫고 찾아오는 손님을 받아들이지 않아 만나지 못했다" 하니, 공은 그대로 돌아서고 다시는 가지 않았다. 며칠이 못 되어 온 도성 안 선비들이 이 사실을 모르는 자가 없게 되어, 공의 명성은 더욱 높아졌고 성혼의 무리들은 공을 깊이 미워하였다. 
     
    여기서 '관'은 송강(松江) 정철을, '시세에 붙어 아부하는 사람'은 우계(牛溪) 성혼을 가리킨다. 말하자면 성혼이 힘 있는 외척인 심의겸과 가까이 지내자 수우당 최영경이 절연하고 나섰다는 것이다. 
     
     

    최영경이 태어난 한성 원동리 부근

     
    선조(宣祖)가 여러 차례 관직을 제수하였으나 수우당은 모두 사양하고 진주에 칩거하며 후학 양성에만 힘썼다. 그는 선조가 다시 사헌부 지평, 교정청 낭관 등의 관직을 제수하자 분명한 사의 표명과 함께 오히려 붕당의 폐단에 관한 소(疏)를 올렸다. 그럴수록 서인의 영수 정철은 자기편으로 끌어들이기 위해 공을 들였다. 예를 들어 말하자면, 요즘 모양으로 까마귀 떼 득실대는 선거판에 백로 같이 고절한 인물을 공천한다면 당의 이미지 제고에 당연히 도움이 될 터였다.  
     
    송강 정철(1537~1594) 역시 서울의 명문가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연일(포항)이다. 앞서 '송강 정철의 장진주사'에서도 말했거니와 정철은 한성 양반가 서촌(西村)의 금수저로서, 큰 누나가 인종(仁宗)의 후궁인 귀인(貴人)이었으며, 둘째 누나가 왕족인 계림군(桂林君) 이유(李瑠, 성종의 친형인 월산대군의 손자)의 부인이 되었기에 어릴 때부터 궁궐에 자주 드나들면서 왕세자인 경원대군(훗날의 명종)과 벗하며 지냈다.

     

    우리가 흔히 정철을 전남 담양 출신이라 생각하는 이유는 그곳에 위치한 송강정(松江亭)과 식영정(息影亭) 같은 정자 때문으로, 실제로 그는 '관동별곡'을 제외한 나머지 3편의 가사를 그곳에서 썼다. 하지만 송강은 말한 바와 같이 서울 사람으로서, 그와 담양과의 인연은 아버지 정유침이 담양 창평(昌平)으로 유배를 가는 것으로부터 시작되었다. 그래서 송강은 젊은날의 대부분을 담양 창평 성산 골짜기에서 보내게 된다. (훗날 지은 <성산별곡>의 무대가 되는 곳이다) 


     

    담양 식영정
    서울 청운동 송강 정철 탄생지 표석
    정철 집터 부근에서 본 백악산

     
    그렇지만 정철은 향후 금의환향하니 1561년(명종 16) 진사과에 1등으로 입격하고, 이듬해 27살 때 별시문과에 장원급제하며 화려하게 한성으로 돌아왔다. 이때부터 그의 세상이 열렸다 해도 과언이 아닐지니 국왕 명종은 어릴 적 동무인 정철의 급제 소식을 듣고 축하연까지 베풀어주었다. 당시 입격자 명단을 보던 명종이 정철의 이름을 발견하고 동명이인 여부를 확인한 뒤, 내 어릴 적 동무가 드디어 출사하게 되었구나 하며 기뻐했다는 이야기는 유명하다
     
    임금이 죽마고우 명종이었고 집안의 뒷배가 있고 장원급제를 한 자였으니 정철의 앞길이 바다와 같을 것임은 분명했다. 실제로 정철은 명종 대를 지나 선조가 즉위해서도 지위에 흔들림이 없었다. 그런데 그와 같은 정철이 한 자리 주겠다며 최영경을 불러들였지만 수우당은 사양했다. 수우당은 송강에 청한 개인적 자리도 거절했는데, 이유인즉 "정철은 색성소인(索性小人, 속좁은 소인)이기 때문"이었다.
     
    이 말은 들은 정철은 앙심을 품었다. 그리고 때가 오면 앙갚음을 하겠다며 벼렸는데, 마침 선조에 의해 정여립 모반 사건의 위관(委官, 국문 수사 책임자)에 임명되자 드디어 칼을 뺐다. 앞서 말한 대로 정여립의 아들 옥남은 극심한 문초 끝에 길삼봉 등과의 공모를 자백했으나 함께 모의했다는 길삼봉은 끝내 정체가 밝혀지지 않았던 바, 실존 인물인지 어쩐지도 알 수 없었다. 그럼에도 정철은 최영경이 길삼봉이라 주장했다.
     
    진주에서 붙잡혀 온 최영경은 이를 부인했다. 정여립 사건으로 선조는 신경이 매우 날카로워 있었으나 최영경에 대해서는 호의를 보였다. 선조는 최영경을 친국하며 "그대의 호가 삼봉(三峯)인가?"라고 물었고, 이에 최영경이 "삼봉은 간신 정도전의 호이거늘, 신이 어찌 간신의 호를 쓰겠습니까?”라고 답함에 선조는 크게 고개를 끄덕이었다. 선조는 최영경이 길삼봉과 무관하다며 석방하려 했지만 정철은 말을 듣지 않았고 정철 밑의 서인들 역시 석방에 반대하였던 바, 수우당은 결국 감옥에서 고문 후유증으로 사망하고 말았다. 그의 나이 60세, 때는 1590년으로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2년 전이었다. 


     

    경복궁 사정전 / 이 앞에서 선조의 친국이 있었다.

     
    앞서도 말했지만 기축옥사는 동인에 대한 서인의 반격으로 시작된 당쟁이다. 최영경의 죽음을 시작으로 막을 연 기축옥사는 향후 2년이나 지속되었고, 상대 당에 대한 피비린내 나는 복수극이 전개되는 가운데 연루된 1000여 명이 목숨을 잃었다. 무엇을 잘못해서가 아니라 오로지 동인 계열의 인물이라는 것이 죄였다. 그리고 그 당쟁이 끝날 무렵 임진왜란이 일어났다. 동래 왜관의 왜인들은 곧 일본이 쳐들어올 것이라고 수없이 정보를 알려왔지만 당쟁에 매몰된 정치인들에 의해 무시되었다.  
     
     

    부산진순절도 / 부산 성 앞에 왜군의 배가 새까맣게 들어찼다. 서로 싸우느라 외적이 쳐들어오는 것도 몰랐던 조선이다.
    남명 조식과 수우당 최영경이 배향된 덕산서원 / 선조는 훗날 "흉혼독철(凶渾毒澈, 음흉한 성혼과 악독한 정철)이 나의 어진 신하를 죽였다"고 애통해 하였다. 배롱나무가 아름다운 경남 산청 덕산서원의 사진을 '대한민국 구석구석'에서 빌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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