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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여립 사건과 기축옥사 & 극단의 정치
    잘 알려지지 않은 흥미로운 역사 이야기 2024. 4. 15. 22:49

     
    앞서도 말한 바 있지만 추사(秋史) 김정희가 제주도로 정배 된 이유는 이른바 윤상도 옥사 사건에 연루된 때문이다. 윤상도 옥사 사건은 윤상도라는 사람이 호조판서 박종훈 등의 관리를 탐관오리로 탄핵했다가 역공을 받아 국문 중 사망한 사건을 말한다. 당시의 세도가인 안동김문은 이 사건의 배후로 전(前) 세도가의 좌장인 경주김문의 김노경을 지목했던 바, 바로 김정희의 아버지였다. 이에 김노경은 전라도 절해고도인 고금도로 유배가게 된다.
     
    사실인지 아닌지는 알 수 없으나 김정희는 윤상도가 제출한 탄핵문의 초안을 작성했다는 죄로 뒤늦게 잡혀갔는데, 안동김문은 그의 죄가 아비 김노경보다 더 깊다 하여 사형에 처할 것을 주장했지만 국문 과정에서 관련된 증인들이 모두 고문치사하는 바람에 공소유지가 어렵게 되었다.(김정희도 6차례의 고문을 당했다) 따라서 요즘 기준으로는 증거 불충분으로 풀려나야 정상이었겠으나 그때는 통하지 않았으니, 다만 사형만이 면제되어 제주도로 귀양가게 되었다.  
     
     

    김정희가 당도한 제주도 화북포구
    대정현 유배지의 김정희(1786~1856) 상

     
    그때가 1840년(헌종 6) 쉰다섯의 나이였다. 36대의 곤장을 맞고 귀양길에 오른 김정희가 전주, 남원, 나주, 해남, 강진을 거쳐 도착한 곳은 제주도 북쪽의 화북포구로서, 그곳에서 대정현으로 이송된 그는 무려 9년간을 절해고도에서 보내야 했다. 그는 다행히 1848년 풀려났으나, 다시 1851년(철종 2)에 헌종의 묘를 옮기는 데 대한 예론(禮論)문제에 얽혀 이번에는 함경도 북청으로 유배되었다.
     
    영의정 권돈인과 친했던지라 그의 편을 들었던 것인데, 그가 실각하자 곧바로 유배형에 처해진 것이었다. 그는 그렇게 2차례 12년간의 유배생활을 했으나 다행스럽게도 유배지에서 죽지 않고 돌아와 부친의 묘소가 있는 과천에 살며 천수(天壽)를 다할 수 있었다. 서울 봉은사 판전(板殿, 불경 경판을 모아놓은 전각) 현판은 그가 죽기 3일 전에 쓴 글씨로 알려져 있는데, 왼쪽에 '71살 과천 늙은이가 병중에 쓴 작품'이란 첨구가 붙어 있다. 
     
     

    봉은사 판전 현판

     
    그런데 추사의 경우는 매우 운이 좋은 경우이고  또 매우 드문 경우이니, 정쟁(政爭)에서 진 자는 형장에서 죽거나 유배길에서 고문 후유증으로, 혹은 유배지에서 죽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대표적으로 1589년(선조 22) 기축년(己丑年)에 일어난 기축옥사는 2년 여에 걸쳐 진행되며 연루된 1000여 명의 사람이 이렇게 목숨을 잃었다. 실로 무시무시한 정쟁의 결과였다. 기축옥사는 1589년 10월 정여립(鄭汝立)이 역모를 꾀하였다 하여 그와 관련된 수많은 동인계(東人系) 인사들이 정치적으로 피해를 입은 사건이다.
     
     

    전북 진안 죽도 천변산 전경 / 정여립이 쫓겨 도망가다 자결했다고 전해지는 곳이다.

     
    기축옥사는 동인과 서인이 나뉜 1575년(선조 8년) 동서 분당에 뿌리를 두고 있다. 알려진 대로 동서 분당은 관리를 추천할 수 있는 권한을 지닌 이조전랑의 자리를 두고 사람파의 김효원과 심의겸이 다투다 동·서로 갈라선 것이 시발이었다. 이조(吏曹)의 전랑(銓郞)은 요즘으로 치면 내무부 5급 사무관 정도로, 당대에도 정5품 품계에 지나지 않았으나 삼사(三司, 사간원 사헌부 홍문관)의 관리와 자신의 후임을 추천할 권한이 주어졌다. 따지자면 지금의 대통령실 인사비서관급에 해당하는 끗발 있는 자리였으므로 양보할 수 없는 싸움이 벌어지게 된 것이었다. 
     
    김효원과 심의겸은 과거에도 이조전랑의 자리를 두고 다투었으니, 1572년 김효원이 이조전랑에 추천됐을 때 과거 소윤(小尹) 윤원형의 문객이었다는 이유로 이조참의 심의겸에게 까인 적이 있었는데, 공교롭게도 1575년에는 심의겸의 동생 심충겸이 이조전랑으로 추천됐다. 김효원은 기다렸다는 듯 퇴짜를 놓고 자기 쪽 사람인 이발(李潑)을 밀어넣었다.
    이후 반목이 심해지며 두 파로 갈라지게 되었는데, 심의겸이 서촌에 살았던 관계로 심의겸을 따르는 사람은 서인으로 불리게 되었고, 김효원은 동촌(연지동・이화동・효제동・원남동・인의동・연건동・종로5・6가)에 살았으므로 그들 일파는 동인으로 불려졌다.
     
     

    심의겸의 집으로 가는 길 / 심의겸의 집은 현 덕수궁 돌담길에 위치한 서울시립미술관 아래 있었다.


    분당 초기는 서인이 우세했다. 임금 선조도 서인 편을 들어 재위 16년인 1583년, 율곡 이이를 공격한 동인의 허봉·송응개·박근원을 모두 귀양 보내는 이른바 계미삼찬(癸未三竄, 계미년에 세 신하를 귀양 보냄)의 성과를 거두었다. 물론 동인도 당하고만 있지 않았으니 이발이 분전하며 결국 심의겸을 파직시켰다. 심의겸은 명종의 부인 인순왕후의 동생으로, 자식이 없던  인순왕후는 뿌리가 약한 하성군(선조)을 거두어 임금으로 만들어 주었던 바, 심의겸의 파워가 남다를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선조 8년(1575) 인순왕후가 사망하자 힘을 잃었다.
     
    심의겸의 파직 사유는 '국정농단'이었다. 임금의 배경을 믿고 제멋대로 국정을 처리했다는 것이었는데, 여기에 동인인 이발이 앞장을 섰다. 이렇듯 동인이 힘을 얻자 당적을 바꾸는 인물이 등장하기 시작했으니, 전 홍문관 수찬(修撰) 정여립이 대표적이었다. 정여립은 서인의 영수 율곡 이이가 아낀 인재였으나 이이가 사망하고 동인이 정권을 잡자 동인으로 돌아선 것이었다. 이런 와중에 선조 22년인 1589년 10월 2일, 조정에 날아든 황해감사 한준의 장계 한 통이 정국을 격랑으로 몰고 들어갔다.  
     
    장계의 내용인즉, 정여립이 고향인 완주를 비롯해 김제·금구·태인 등의 무사(武士)와 공사(公私) 천인(賤人)들을 모아 대동계(大同契)를 조직하고 그것을 바탕으로 전라도와 황해도에서 역란을 준비 중이라는 것이었다. 정여립이 실제로 한 말인지는 알 수 없으나, "천하는 공물(公物)이니 어찌 일정한 주인(定主)이 있겠는가…."라고 떠들었다는 말도 사실인 양 떠돌았다. 선조는 선전관과 금부도사를 황해도와 전라도에 파견해 사실을 확인토록 하였는데, 그러한 가운데  한양으로 붙잡혀 온 정여립의 아들 옥남은 극심한 문초 끝에 길삼봉 등과의 공모를 자백했다. (함께 모의했다는 길삼봉은 끝내 정체가 밝혀지지 않았던 바, 실존 인물인지 어쩐지도 알 수 없다)

     

     

    경복궁 사정전 / 이 앞에서 선조는 여러번 친국을 했다.


    길삼봉과 함께 주모자로 몰린 정여립은 전북 진안에 숨어 있다가 관군이 몰려 오자 죽도 천변산으로 들어가 자살을 했다. 그리고 동인의 지도급 인물로 인식되었던 이발 · 이길 · 김우옹 · 백유양 · 정언신 · 홍종록 · 정언지 · 정창연 · 최영경 · 정개청 등이 처형 또는 유배당했다. 관리뿐 아니라 평민, 노비도 걸리는 족족 처벌당했고 묘향산과 금강산에서 수도하던 서산대사와 사명당도 끌려와 조사를 받았다던 바, 가히 지역과 지위 고하를 불문한 검거 열풍이 불어닥쳤음이었다. 좌우지간 이에 연루돼 죽은 사람만 1000명이 넘었다. 
     
     

    완주군 '정여립 공원'의 정여립 상 / 정여립 모반 사건이 실제 있었던 일인가는 대해서는 지금까지 의문부호가 찍혀 있다.

     
    그들 동인 일파를 조사해 죽인 사람이 바로 서인 강경파 송강 정철(鄭澈)이었다. 선조에 의해  위관(委官, 국문 수사 책임자)에 임명된 정철은 정적들에 대한 가혹한 고문을 가하여 좌의정 정언신, 부제학 이발·이길 형제를 비롯한 수많은 사람들을 아무런 물증도 없이 처단했는데, 참형을 당한 자, 교형을 당한 자, 고문으로 죽은 자, 불복하다가 매 맞아 죽은 자, 유배 가다 죽은 자, 유배지에서 죽은 자 등, 죽음의 형태도 다양했다. 
     
     

    정철이 살던 효자동
    효자동의 정철 집터 표석

     
    서인은 이렇게 정권을 되찾았고  정철은 일인지하 만인지상이 되었다. 하지만 그 역시 끝은 안 좋았으니 술에 취해 국사를 돌본다는 이유로 동인의 탄핵을 받아 쉰일곱의 나이로 강화로 유배 갔다가 그곳에서 숨졌다. 이후 그는 부모의 무덤이 있는 고양 신원리에 묻혔으나 사후 72년이 지난 1665년(현종 6) 당대 서인의 거두였던 우암 송시열이 충청도 진천에서 명당을 발견했다며 후손의 동의를 얻어 정철과는 아무런 연고도 없는 진천 어은골 이장시켰다.
     
     

    고양시 신원동의 송강정 / 송시열의 부모 묘소가 있는 곳이다.

     
    송시열 역시 서인의 우두머리로 정쟁에 앞장서며 윤휴를 비롯한 수많은 정치가들을 죽였다. 하지만 그도 끝이 안 좋았으니 희빈 장씨(흔히 말하는 장희빈)가 낳은 아들(훗날의 경종)을 원자로 정하는 것에 반대하다 숙종의 분노를 사 제주도로 유배되었고, 그해 6월 다시 국문을 받기 위해 올라가던 중 전라도 정읍에서 사약을 받고 죽었다. 그는 경기도 수원에 묻혔다가 충북 괴산으로 이장되었는데, 그의 유허비에는 '흉악한 무리가 독 묻은 손을 뻗쳐 죽였다'(羣兇逞毒手)'다는 분노의 글이 후손들에 의해 새겨졌다. 복수를 다짐하는 듯싶다.  


     

    송시열이 살던 집 터 / 명륜동 집 터에 그가 '증주벽립'을 새긴 암벽이 남았다. 증자와 주자처럼 살겠다는 뜻이다.

     
    선거가 끝나고 바야흐로 복수의 계절이 왔다. 요즘은 조선시대처럼 반대당 사람들을 죽이거나 유배 보낼 수는 없다.(감방으로 보낼 수는 있으니 그게 그거인가도 같다) 하지만 승리자가 누릴 권세는 무시무시할 것이니, 국민들의 일부는 즐거워하며, 또 일부는 치를 떨며 지켜보게 될 것 같다. 환호하는 자들도 있을 것이며, 눈물 흘리는 자고 있을 것이다. 다만 죽이지만 않는다 뿐, 극단의 정치를 지향했던 조선시대와 별 다를 게 없는 현실이다. 정치적 복수에 대한 민족적 DNA가 있는 것일까? 우리에게 상생의 정치는 요원한 듯하다. 
     
     

    현 서울 프레스센터 앞 군기시 터 / 정여립과 변승복의 시신이 능지처사되었고, 이기 외 많은사람이 참살된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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