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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의 마지막 달동네 백사마을토박이가 부르는 서울야곡 2025. 3. 17. 00:02
'서울의 마지막 달동네'로 불리는 노원구 백사마을의 철거가 시작됐다기에 빗속에 서둘러 현장을 다녀왔다. 백사마을의 마지막 풍경을 담기 위해서였다. 앞서도 말했지만 철거가 결정 나면 곧바로 움직여야지 조금이라도 꾸물거리면 공터나 공사판과 대면하게 된다. 다행히 비는 오후 들며 그쳤지만 되돌아온 추위가 만만치 않았다.
백사마을은 노원구 중계본동에 있다. 노원구는 조선시대에는 경기도 양주군 노원면에 속했는데 그 노원면을 지금은 남양주시(별내동), 구리시(갈매동), 서울시(상계동·중계동·하계동·월계동·공릉동)의 3개 지방자치단체가 나누어 가진 형국이 됐다. 옛 경기도 땅을 2개 지방자치단체가 나누어 가진 경우는 흔하지만 3개로 나뉜 곳은 이곳이 유일하지 않나 싶다.
상계동과 중계동에 대한 어릴 적 기억을 더듬자면 살벌함으로 대변된다. 지금은 거의가 아파트가 들어섰고 집을 얻으려는 신혼부부가 가장 먼저 들여다보는 곳이 되었지만 과거에는 모두 도망가고 싶은 치안 제로(Zero)의 땅이었다. 주민 간의 싸움이 늘 끊이지 않고 빈자(貧者)들의 상호 절도가 끊이지 않음에도, 그래서 주민들의 파출소 설립 민원이 끊이지 않았음에도 무슨 까닭인지 공무원들은 그 민원을 듣는 둥 마는 둥 했다.
한마디로 '내놓은 곳'이었달까? 소문으로는 대낮에도 술에 취해 싸우는 사람이 비일비재했고, 노상방뇨 및 길에 버린 분뇨 냄새로 인해 구청직원이나 경찰들마저 들어오기 꺼려하는 곳이 이곳이었다. 그래서 한천(漢川, 중랑천 지류)의 상·중·하 계곡에 위치한 상계·중계·하계동에서 가장 먼저 재개발이 시행되었고, 까닭에 지금은 30년 넘은 노후 아파트가 서울시 자치구 중 가장 많은 곳이 되었다.
1990년 사진작가 임정의가 찍은 상계동 노원구 아파트 단지 / 30년이 지난 재건축 안전진단 대상 아파트가 42개 단지(6만5,000여세대)로 서울시 자치구 중 가장 많다. (2022년 노원구청 사진과 자료) 조선시대 해동지도(양주목) 속의 상계 ·중계 ·하계동 지역 거칠게 표현됐지만 과거에 그 동네는 정말로 그랬다. 그런데 이후 50여 년이 지난 후에도 외양 만큼은 과거 모습이 그대로 남아 있는 마을이 있었던 바, 그곳이 바로 백사마을이다. 백사마을은 1960년대 후반 서울 도심 개발의 여파로 용산, 청계천, 안암동 일대의 철거민들이 이주해 형성된 달동네로서, 동네 이름 백사마을은 뱀은 출몰하지만 백사(白蛇)와는 무관하고 백사(白沙) 이항복과는 더더욱 무관한 옛 주소 '산104번지'에서 유래되었다.
눈 내린 백사마을 / 서울시 제공 사진 백사마을 위치 그런데 이곳은 그간 왜 재개발에서 홀로 제외되었을까? 사실 백사마을도 몇 번이나 재개발의 기회가 있었으니 가까이로는 2008년 1월 그린벨트가 해제되며 본격적인 논의가 있었다. 이에 2009년 5월 백사마을은 재개발구역으로 지정됐고 한국토지주택공사(LH)가 건설을 맡았으나, 박원순 전 서울시장이 백사마을 일부를 '주거지 보전구역'으로 지정해 골목길 등 마을 고유의 특징을 살린 저층 임대주택을 짓겠다는 시대에 맞지 않은 유토피아적 발상을 내놓으며 틀어져버렸다.
이 사업성 없는 사업을 맡을 정신 나간 사업자를 기다렸던 것일까? 이후 백사마을 재개발 계획은 약 10년간 제자리에 머물다 2018년 노원구가 달려들어 서울주택도시공사(SH공사)를 새로운 사업시행자로 지정하며 다시 재개발이 추진됐고, 그리하여 2025년 3월 드디어 철거를 시작하게 되었다. 일반분양 단지와 임대 단지의 구분이 없는 현실적인 통합정비계획이 마련되었다는 후문이다.
백사마을에는 2028년 완공을 목표로 최고 35층, 3100가구의 대규모 아파트 단지가 들어설 예정이다. 시공사는 GS건설이다. 예전이 살던 사람이 빛을 보았으면 좋았겠지만 재개발이 지지부진되는 사이 백사마을 주민 다수가 다른 지역으로 이주했고 최후까지 남은 사람은 1700 가구 중 20여 가구뿐이라고 한다. 아래는 오늘 담아 온 백사마을의 마지막 풍경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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