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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걸어본 남산길(I) - 경성미술구락부에서 외교구락부까지토박이가 부르는 서울야곡 2025. 3. 7. 23:38
지난 주말 서울 남산을 찾았다. 예전에는 당연히 둘레길 한 바퀴 도는 것쯤은 일도 아니었지만 지금은 살라미로 하지 않으면 안 될 처지가 됐다. 요즘 많이 쓰이는 살라미의 뜻은 하나의 큰 목표를 여러 개의 작은 단계로 나누어 점진적으로 해결해 나가는 방법으로, 고대 이탈리아에서 고기를 오래 보관하기 위해 짐승의 고기를 작게 썬 후 소금을 발라 염장한 데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아무튼 그 전략이 통해 목표한 남산 소파로를 무사히 걸었다.
출발은 지하철 4호선 명동역 2번 출구로부터 시작되었다. 2번 출구 바로 앞에서 만날 수 있는 프린스호텔은 앞서 설명한 대로 일제강점기 경성미술구락부가 있던 곳이다. 경성미술구락부는 1920년대 식민지 조선에 불기 시작한 조선 미술품 수집 열풍에 편승해 세워진 미술품 거래소다. 물론 그때는 요즘처럼 미술품이란 고상한 용어 대신 골동품이라는 용어가 일반적이었겠으나 어찌됐든 우리나라 근대 미술시장의 효시로 자리매김될만한 곳이다.
경성미술구락부를 세운 사람은 조선에 정착한 일본 골동상 이토 도이치로(伊藤東一郞), 아가와 시게로(阿川重郞), 사사키 쵸지(佐佐木兆治) 등으로 1922년 3월 일본인들의 거류지인 남촌(南村) 소화통(昭和通), 지금의 프린스호텔 자리에 사옥이 건립됐다. 경성미술구락부의 등장으로 조선내 미술품 거래는 더욱 활기를 띠게 되었던 바, 도굴이 전국적으로 확산되는 이른바 '대난굴(大亂掘) 시대'가 더불어 도래했다. (☞ '간송 전형필과 필적했던 고미술품 애호가들')
프린스호텔 경성미술구락부 사옥 / 1942년 개축 후의 사진이다.
프린스호텔 옆 다이소 건물을 끼고 골목길을 오르거나, 한국전력 옆 소파로를 오르면 나타나는 대한적십자사 건물은 과거 국가안전기획부의 행정동이었다. 5공화국 시절, 중앙정보부의 후신인 안기부는 시절에 걸맞게 더욱 덩치가 비대해졌다. 이에 남산 자락을 벗어나 지금의 소파로까지 진출했던 것인데, 이곳에 본청(현 남산 유스호스텔 건물)에 있던 행정부와 감찰부가 옮겨왔다. 이 안기부 부속 건물은 지금은 사라진 TBS교통방송 건물과 더불어 아는 사람만 아는 비밀의 장소였다.소파로 대한적십자사
그 위쪽 남산동3가 34-5 옛 영화진흥공사 건물 일대에는 백강(白江) 이경여(李敬輿, 1585~1657)와 그 후손이 살았다. 이경여는 병자호란 당시 형조판서를 지냈던 인물로서 김상헌과 더불어 숭명배청파 관료로 지목돼 청나라로 끌려가 심양에 억류되기도 했다. 그의 직계후손에서는 3대(代)에 이어진 대제학과 6명의 정승, 9명의 판서가 배출되었던 바, 전주 이씨 왕손(세종대왕 6대손) 가문 중에서 가장 번창했다는 소리를 듣는다. 왕손의 가문을 넘어 역대 조선을 통틀어 손에 꼽힐만한 명문가일 것이다.
병자호란 후 척화파의 김상헌뿐 아니라 주화파의 최명길도 청나라 심양으로 끌려갔다. 그 두 사람은 심양의 감옥에서도 말조차 안 섞고 서로 으르렁거렸다는데 참으로 어지간한 사람들이다. 그런 두 사람을 화해시킨 사람이 이경여라 하며, 이윽고 최명길이 김상헌에게 다음과 같은 필담을 건넸다 한다.
그대 마음 굳은 바위 같아서 바뀌기 어렵겠으나
나의 도는 둥근 고리 같아서 일에 따라 변한다네君心如石終難轉
吾道如環信所隨
그러자 김상헌이 이처럼 화답했다 하는데,
마침내 두 대(代) 걸쳐 나눈 교분 다시 찾아
평생의 의심을 모두 풀어 버렸네
從尋兩世好
頓釋白年疑
이에 이경여가 아래의 시를 지었다고 전한다.
두 어른의 경륜과 권위는 각기 나라를 위함이었으며
하늘을 떠받치는 큰 절개요, 한 시대를 구한 공훈이었소
이제야 순리를 따라 저절로 생각이 같아졌지만
모두 함께 심양 남관의 백발 늙은이가 되었구려
二老經權各爲公
擎天大節濟時功
如今爛熳同歸地
俱是南館白首翁남산동3가 34-5는 현재 공사중이다. 입구에 게시된 현장 지도 입구에 게시된 사업개요
사잇골목 끝 한양교회를 포함한 남산동3가 34-5 일대는 일제강점기에 동본원사(東本願寺, 히가시 혼칸지) 서울 별원이 있던 자리로, 일본 정토진종(淨土眞宗) 오타니(大谷)파가 세운 절이 존재했다. 진종 오타니파는 한국에 가장 먼저 진출한 종파로서 1877년 개원한 부산 출장소로부터 포교가 시작됐다. 동본원사는 1878년 부산별원이 설립된 후 개항장인 원산, 인천 등지에 절이 세워졌고 1907년에는 수도 서울에도 진출했다.
지금도 볼 수 있는 동본원사 목포별원 건물 축대 위의 한양교회 종탑 / 남산초등학교 쪽에서 본 모습으로 축대는 동본원사 때의 것이다.
동본원사 경성별원(서울별원)은 1907년 남산 통감부 맞은편에 설립됐는데, 이때 고종이 하사금을 내려 축하하기도 했다. 이후 일제강점기 동안 진종 오타니파를 비롯한 일본 불교는 600년간의 숭유억불로 사라지다시피 한 조선의 불교를 대신하였던 바, 대부분의 사찰이 일본 불교의 영향력 아래 들어가게 되었다. 이에 한용운 등의 승려가 민족불교 중흥을 외치며 종로 한복판에 태고사(太古寺)라는 절을 세웠는데 이것이 지금의 조계사이다.
동본원사 서울 별원 (화살표) / 건너 편에 조선통감부가 위치했다. 좌측으로 보이는 고딕건물은 명동성당이다.
동본원사는 광복 직후 불태워졌고, 이후 김두한(金斗漢, 1918~1972)이 지휘하는 대한민주청년동맹(大韓民主靑年同盟, 이하 민청)이 1948년까지 이 자리를 차지해 건물을 짓고 활동했다. 1946년 4월 9일에 결성된 민청은 우익 청년단체를 표방했는데, 김두한이 1947년 4월 20일 정진영이 이끄는 좌익 청년단체를 습격하며 큰 사회적 문제가 됐다.
당시 좌익 쪽은 1명이 죽고 10명이 부상당했다. 이로 인해 김두한을 포함한 일당 16명은 미군정청에 의해 형을 받고 수감되었다. 김두한은 이때 사형을 선고받고 용산 미7사단 구금소를 거쳐 대전형무소로 이감됐는데, 최근 김두한의 미7사단 군사감옥 수감 사실을 말해주는 미군청청의 문건이 발굴되기도 했다. 지금 좌·우익의 반목이 흡사 무기 없는 내전을 방불케 하나 해방 후의 극렬함에는 못 미친다. 아무튼 우리나라의 좌·우 대립은 뿌리 깊다. 민청은 1948년 해체되었다.
미군정재판 군사위원회 2번 명령서(Military Commission Order #2)
민청 건물이 있던 자리에는 1950년대 한양교회가 신축됐다. 하지만 이 자리에 다시 서울텔레비젼방송국이 세워지며 한양교회는 지금의 자리로 이전해야 했다. 서울텔레비젼방송국은 1961년 12월 31일 첫 방송을 송출하였다. 송출 내용은 서울텔레비젼방송 개국실황 중계방송으로, 임택근 아나운서가 진행했으며 그 자리에는 같은해 5월 16일 쿠데타로 권력을 잡은 박정희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과 송요찬 내각수반이 참석했다. 서울텔레비젼방송국은 1970년 국영 KBS로 개편되었고, 1976년 여의도로 옮기기까지 19년간 남산시대를 이어갔다.
당시의 서울텔레비젼방송국
여기서 조금 더 올라가면 유명한 남산돈까스 촌(村)이 나온다. 1992년 문을 연 남산돈까스에 대한 원조 다툼은 급기야 법정으로까지 비화되었는데, 결론이 어찌 되었는지는 잘 모르겠다. 아직 재판 중이라는 소리도 있다. 아무튼 내가 아는 한 남산 돈까스의 원조는 소파로 103-1에 있었다. 지금은 주변으로 남산을 타이틀로 하는 비슷비슷한 이름의 돈까스 식당이 여러 군데이며, 최근에는 '무빙'이라는 드라마에서 주인공 한효주가 남산돈까스의 주인으로 나왔던 관계로 그중의 특정 업소가 특수를 누린다고 한다.남산돈까스 촌
하지만 그 집이 원조는 아닌 듯하니 '나무위키'에서는 위 밀집 장소에서 떨어져 있는 소파로 23의 '남산돈까스 본점'이 원조라고 말한다. 본래 위의 장소에서 영업을 했으나 집주인에게 쫓겨나 지금의 자리로 왔다고 하는 바, 정확한 사정을 모르더라도 최소한 소개는 해야 할 것 같다. 지금은 안 만나는 내 친구놈도 과거 원주의 잘 나가는 식당을 집주인 자격으로 빼앗아 영업을 한 적이 있었는데 결국 오래가지 못했다. 이렇게 천벌을 받은 것이라면 다행이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을 듯하니.....
'무빙'의 원작자이자 각본을 쓴 강풀 작가는 실은 그 어떤 남산돈까스도 가본 적이 없고 특정 식당을 염두에 두지도 않았다고 한다. 단지 '무빙'의 또 다른 주인공 조인성의 직업이 정보기관 블랙요원이고 까닭에 옛 안기부 근방의 돈까스 식당을 설정한 것 뿐이라고..... 또 옛 중앙정보부장 김형욱의 별명인 남산 멧돼지, 혹은 남산 돈까스가 여기서 나왔다는 말도 있으나 사실과는 거리가 멀다. 전 중앙정보부장 김형욱이 증발한 해는 1979년이고 남산돈까스가 문을 연 해는 1992년으로 10년 이상의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 '김형욱 실종사건과 중앙정보부의 부장들')
재미 있게 본 '무빙' 속 남산돈까스 스틸컷
남산돈까스 촌에서 계단을 걸어 내려가거나, 숭의여대 맞은편 목멱산방 골목으로 들어가면 역사적 장소 외교구락부를 만날 수 있다. 이곳에는 일제강점기 헌병대 헌병대장의 관사가 있었으며, 해방 후인 1949년 해공(海公) 신익희, 유석(維石) 조병옥, 창랑(滄浪) 장택상, 동산(東山) 윤치영 등을 비롯한 정치인들이 외교구락부라는 이름의 서양식 사교장을 오픈했다. 구락부(俱樂部)는 영어 '클럽'(club)의 일본식 발음을 한자로 만든 신조어로서, 개화기 일본에서 널리 사용되던 용어가 그대로 들어와 토착화되었다.
이곳 남산 외교구락부는 한국 정치사에 있어서 잊힐 수 없는 장소이니 1969년, 당시 야당 원내총무였던 김영삼이 이곳에서 '40대 기수론'을 들고 나와 정치판의 물갈이를 이루었고, 1980년 '서울의 봄' 시절에는 이른바 3김(김종필·김대중·김영삼)이 첫 회동을 가진 곳이기도 했다. 하지만 그 봄은 너무도 짧았던 바, 전두환 신군부의 군화발 속에 다시 겨울로 회귀했다. 이때 3김 중 가장 손해를 본 사람은 김종필이었다. 만일 그대로 선거가 치러졌다면 직선이든 간선이든 JP가 대통령이 되는 것은 명약관야했다.전두환 신군부가 들어서며 김종필은 신군부의 공작에 의해 부정축재자로서의 이미지가 굳어졌고, 또 충정도라는 지역적 한계로 인해 (쪽수가 적었다는 뜻) 퇴보했다. 대신 영·호남을 기반으로 하는 김영삼과 김대중이 미래의 지도자로 부상했다. 이 두 사람을 주축으로 겨울공화국을 종식시키기 위한 범야 연합체인 민추협(민주화추진협의회)이 결성되어 민주주의 회복에 시동을 걸었는데, 그 민추협 창립선언이 있었던 곳도 이곳 외교구락부였다.
뿐만 아니라 1987년 군정종식을 위한 김영삼, 김대중 후보의 대통령 후보 단일화 약속도 바로 이곳에서 이루어졌다. 이때 야당 대표로 출마할 자가 누구로 정해졌는지는 제법 연배가 있는 분들은 모두 알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으니 김영삼, 김대중을 비롯한 3김이 모두 출마했고 덕분에 여당의 노태우 후보가 어부지리를 취했다. 직선제 개헌을 하고 김대중을 사면복권한 노태우의 6.29선언 쑈에 눈을 뜨고 당한 셈으로, 한국 민주주의의 대표적 흑역사 중의 하나가 되었다.
1987년 대선 직전에 만난 동상이몽의 세 사람 / 1980년 ‘서울의 봄’ 이후 7년 만에 인촌상 시상식 축하연에서 조우한 위 3김 사진은 현대사의 명장면 가운데의 하나로 꼽힌다. (동아일보 DB) 1981년 국군보안사령관 노태우 대장 전역식 사진 / 이후 그는 정치인으로 변신했고 1987년 대선에서 3김이 분열한 까닭에 36%이라는 낮은 득표율로도 대통령에 오를 수 있었다. 노태우 정부 이후로 외교구락부 건물은 폐쇄되었다가 1999년 숭의학원을 인수한 백성학 이사장(현 영안모자 명예회장)이 외교구락부 터와 건물을 매입해 외교구락부 재건을 모색했다. 이후 자료 수집과 건물신축 등의 작업을 거쳐 2024년 카페의 형태로 재개관하였다. 과거에는 보수는 부패로, 진보는 분열로 망한다 했는데, 지금은 보수가 분열로 망하는 형국이다. 대통령이 되기를 바라는 자, 이곳에 모여 과거의 흑역사를 반면교사 삼아 필히 단일화를 이루기를 소망해본다.
목멱산방 옆 내리막 골목 새로 단장한 외교구락부 건물 입구의 안내문 각종 자료가 전시된 실내 실내에 전시된 외교구락부 스토리 실내에 전시된 1980년 외교구락부 사진 실내에 전시된 1997년 외교구락부 사진 1975년 외교구락부에서 회동한 DJ와 YS '토박이가 부르는 서울야곡'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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