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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소금장수 · 새우젓장수가 살았던 마포 염리동
    토박이가 부르는 서울야곡 2025. 3. 20. 22:01

     
    서울 마포구 염리동에 있는 고등학교를 다녔다. 그때 염리동이 소금동네(鹽里)라는 의미임을 알았지만 소금과 관계된 무엇은 전혀 없었다. 그래서 어떤 이는 이 동네에 과거 염창(鹽倉, 소금창고)이 있어 유래된 말이라 했고, 또 어떤 이는 염전(鹽廛, 소금시장)이 있어 그렇게 불려졌다고 했는데, 지금 생각해 보니 후자가 좀 더 정확한 말인 듯하다. 
     
    소금창고에서 유래된 보다 확실한 지명은 강서구 염창동일 것이다. 조선시대 서해에서 올라온 소금이 한강을 통해 도성으로 이동되는 루트에 만들어진 임시 관영소금창고가 그곳에 있었고, 그래서 유래된 곳이 염창동이다. 사상(私商)들은 따로 지금의 동막역 부근에 창고를 지어 서해에서 올라온 소금을 저장했는데, 그 소금들이 염리동 염전에서 거래됐다. 근자에 설치된 염전머릿골 표석이 있는 곳일 터이다. 

     

     

    염전머릿골 표석
    표석이 있던 숭문로5길8-6은 지금 공사중이다.


    따라서 염리동에는 소금과 관계된 장사꾼들이 많이 살았을 터, 그것이 동네의 이름으로 굳어지게 되었으리라는 짐작이 어렵지 않다. <대동지지(大東地志)>에 따르면 한성부 3대 시전인 종로 육의전, 이현(梨峴), 남문의 염전도 마포 염해전(鹽海廛)의 소금을 떼다 팔았다고 하는 바, 당대 마포 소금시장의 규모가 더불어 짐작된다. 해방 무렵인 1945년 12월 31일 촬영한 아래 '마포 새우젓 나루터'라는 제하의 사진을 보면 마포 일대의 소금과 어물 거래가 얼마나 활황이었는지를 알 수 있다. 
     
     

    '마포 새우젓 나루터' / 미군청청 소속 정남영 대위가 촬영했다.
    마포나루터에 설치된 옛 마포 생활상에 대한 안내문 / 오른쪽에 어물장수가 그려진 김홍도의 '행려풍속도병'이 재현됐다.
    마포나루터의 소금 거래에 관한 안내문
    서양인이 그린 '조선상인과 뱃사람' / 규슈대학도서관
    한성부에서 작성된 '각전잡세 수입정책' / 1900년대 초 서울의 각 시전에 부과한 잡세를 기록한 책으로 어물전에서 걷힌 340전, 염전에서 걷힌 250전이 기록돼 있다. 남양주 실학박물관

     
    시전상인들은 물론이요 보부상을 비롯한 사상(私商)도 소금의 구입은 당연히 염전머릿골을 거쳤을 것이다. 그들은 마포나루에서 구입한 새우젓과 염리동 염전에서 산 소금을 한강의 수운(水運)을 이용, 내륙인 충주 단양 영월 등지까지 들고 가 팔았는데, 이에 장안사람들은 앞이마 부근이 검게 탄 사람을 마포 소금장수나 마포 새우젓장수, 목덜미 부근이 검게 탄 사람을 왕십리 미나리장수라고 불렀다. 마포 소금장수나 새우젓장수는 해를 보며 동쪽으로 이동했고, 왕십리 미나리깡으로부터는 해를 등지고 도성으로 왔기에 생겨난 말이라 한다. 마포 소금장수나 새우젓장수를 낮춰 부르는 '삼개나루 장똘뱅이'라는 말도 있었다. 
     
     

    마포나루 앞의 한강
    마포나루가 있던 곳
    마포나들목 앞의 삼개포구 표석 / 삼개는 마포의 순우리말이다.
    마포나루에 재현된 범선
    범선이 넘나들었을 한강 수로 / 난지도 쪽 사진
    마포나루의 '경강상인과 마포' 안내문
    보부상의 도장
    당대의 수표 / 수표는 일종의 전당문서로 양이 많은 현물이나 동전을 대신해 사용되었다. 시급한 용도로 벼 20석을 빌리는 대신 논 18마지기를 전당 잡힌다는 내용이 쓰여 있다.
    당대의 어음 / 이 음표를 제시하는자에게 즉시 600냥을 출급하라는 내용이 적혀있다. 남양주 실학박물관

     
    이에 마포는 자연스럽게 물류와 유통의 중심이 되었을 터, 남도의 소금·수산물 배와 연평도의 조깃배가 모두 마포로 들어왔으며, 더불어 마포는 내륙으로 들어가는 배들의 출발점이기도 했다. 단순한 나루터가 아닌 강항(江港)이었던 셈이다. 염전머릿골 표석 부근에 있었다는 수산물 보존을 위한 얼음창고와 '보름물께'라는 우물은 당시의 은성함을 방증한다. '보름물께'라는 명칭은 실려온 소금이 염리동에 머무는 보름동안은 물맛이 짜다가 소금이 모두 팔린 후에는 다시 예전의 물맛으로 돌아온 까닭에 붙여진 명칭이라고 한다.
     
     

    '유통의 중심 마포' 표지판 / 1892년 촬영된 '마포나루에서 배를 기다리는 서양인들' 사진이 담겼다.
    마포나루 최고의 전망대로 보이는 부근의 건물
    서울에서 가장 크게 변한 곳 / 염리동 자이, 상록아파트 일대에는 일제강점기 일본 운송회사 직원들의 주택인 마루보시 사택이 있었고, 이후로도 적산가옥과 판자집이 뒤엉켰던 곳이 이렇게 변했다.
    '소금로'로 명명된 염리동의 옛길
    '꽃이 피어나는 소금길'

     

    물론 그것들은 지금 찾아볼 수 없다. 다만 그 흔적 중의 하나가 이웃인 용강동에 남아 있다. 서울 마포구 큰우물로2길22에 있는 용강동 정구중 가옥은 마포에 살던 이씨 성의 부자가 무남독녀 외동딸을 위해 지은 집으로, 압록강 유역의 홍송과 백송을 사용해 지은 고급 한옥이다. 이 집은 서울의 이름난 대목인 장영달이 지었다 하며, 241평의 대지에 안채, 행랑채, 별채를 모두 들인 치밀한 ㅁ자 설계의 아기자기한 구조이다.
     
    대갓집이라 부르기는 어렵되 고급주택임은 분명한 이 집은 당대 마포의 부(富)를 상징한다. 이 집뿐 아니라 당대에는 주변에 이와 같은 고급주택이 많았는데 필시 은성했던 마포나루의 산물일 것이다. 못을 사용하지 않고 지은 것이야 당시의 건축법이니 크게 치지는 못하더라도 축대를 쌓아 레벨을 맞추고 다시 단을 올려 별채를 들어서게 만든 형식은 보통의 정성을 뛰어넘는다.
     
    그럼에도 다른 집들과 마찬가지로 개발에 밀려 사라질 뻔했으나 래미안 마포 리버웰 측이 이 집과 연계된 한옥공원을 조성해 다행히 남아 있게 되었다. 용강동 정구중 가옥은 전시용이 아닌 거주하고 있는 집이다. 정구중은 1977년 소유주 명으로 문화재등록(서울특별시 민속문화유산)이 될 때의 거주자로 과거 국정교과서 사장과 국회의원을 지낸 분이다. 1999년 별세 후 지금은 다른 사람이 살고 있다. 

     

     

    길 아래에서 본 용강동 정구중 가옥 / 대문간과 행랑채가 합쳐진 중부형 가옥 구조로, 대문간 행랑채는 남향으로 대문 양쪽에 방과 광을 1개 씩 모두 4곳의 공간을 두었다. 지금은 왼쪽 광 1칸은 방으로 개조해 쓰고 있다.
    길 위에서 본 정구중 가옥
    쪽문
    안내문
    정구중 가옥의 부감 / 대문을 들어선 후 행랑채를 거쳐야 안채로 들 수 있게끔 되어 여성의 사생활을 존중한 구조임을 알 수 있다. 대문간 행랑채는 길을 따라 휘어지며 대지 구조를 살렸다. 레벨을 맞춰 지은 안쪽의 ㄱ자형 별채가 오붓하다. 서울연구DB 사진

     
    가옥 밑 길가에 동막 큰우물이 있었다. 이 우물은 근자까지도 사용된 유서 깊은 조선시대 우물로 극심한 가뭄에도 물이 마르지 않는 그야말로 '큰 우물'로서, 해방 후에도 근방 1000여 세대의 식수로 쓰였다. 상수도 보급 후에도 이 우물은 소방용수, 민방위 비상 급수시설로 활용되었으나 대흥구역 재개발이 이루어지던 1999년 11월 20일 매몰되었다. 
     
     

    동막 큰우물 터
    상가로 변신 중인 부근의 한옥이 이채롭다. 과거 동막천이 이 앞으로 흘렀다.
    정구중 가옥 건너편 한옥공원 내 정자
    한옥공원에서 보이는 래미안 마포 리버웰 단지
    한옥공원 어린이 놀이터
    유머게시판 보배드림에서 제공한 귀한 사진 / 1884년 마포나루 풍경이다.
    1900년경의 마포나루 사진 / 강변의 기와집은 객주집이다.
    1940년대의 마포나루 사진 / 꼭 들어찬 기와집이 나루의 번영을 대변한다. / KBS DB
    마포나루의 옹기 / 동막골에서 만들어진 독과 항아리가 선적을 기다리고 있다.

     

    댓글

    기백김님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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