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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름마저 '개'로 바꿔버린 충신 조견과 의왕 청계사
    잘 알려지지 않은 흥미로운 역사 이야기 2025. 5. 23. 18:50

     

    앞서 서울 서부 교통의 요지 인덕원을 말하며 그곳이 조선시대에도 남쪽의 수원과 북쪽의 과천·한양을 이어주던 교통로 삼남대로가 있던 곳이라는 설명을 달았다. 그 길은 지금 '인덕원 옛길'이라 칭해지며 정조 임금이 아버지 무덤인 화성 현륭원으로 갈 때 이용했던 길로 강조되고 있는데, '인덕원 옛길'은 아마도 천 년 전인 고려시대에도 이용되었으리라 여겨진다.

     

    청계산 청계사의 사적기를 적은 비문에 고려 충렬왕 때 시중 참지광정원사(侍中 參知光政院事)라는 최고위직을 지낸  조인규(趙仁規, 1237~1308)의 왕림 내용이 등장하는 까닭인데, 이때도 청계사까지의 첩경은 고려 남경(지금의 서울)으로부터 '인덕원 옛길'을 넘어오는 방법이었다.

     

     

    안양시 동안구 관양동 1501의 인덕원 터 표석
    부근의 '인덕원 옛길' 표석 / '정조대왕 현륭원 노정지'라고 쓰여 있다.
    인덕원 옛길

     

    그  청계사 사적기비(淸溪寺事蹟記碑)에 따르면 통일신라 시기 창건된 의왕 청계사는 1284년(충렬왕 10) 권신 조인규가 거액의 사재를 희사해 중창불사를 벌이며 대찰로 성장했다. 이후 청계사는 평양조씨의 원찰로서 절 안에 사당을 지어 조인규의 제사를 모셨는데, 고려 말에는 수도승이 100여 명에 이를 정도로 번창했다. 조선시대 들어서도 청계사는 사세(寺勢)만 줄었을 뿐 명찰로서의 명맥을 이어갔으나 1876년(고종 13) 화재로 대부분의 당우가 불타며 천년고찰의 외형을 잃었다.

     

     

    청계사 주차장 옆 표석 / '청계사 입구'라는 해서 명필이 잘 보이지 않는다. 글씨에 칠이라고 하고픈 마음이다
    절과 바라산 자연휴양림으로 가는 다리
    다리 아래의 계곡
    청계사 입구
    청계사 만세루
    극락보전 / 대들보에서 '경자삼년삼월(庚子三年三月)'이라는 글씨가 발견되었던 바, 1900년(광무 4) 신축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익공 양식과 겹치마가 인상적이다.
    극락보전 삼존불상 / 협시불인 목조보살좌상이 최근 경기도 유형문화유산으로 지정고시됐다.
    경기도 유형문화유산 극락보전 신중도
    청계사사적기비(淸溪寺事蹟記碑) / 1689년 제작된 높이 176cm, 너비 92cm, 두께 27cm의 사적비로 조운이 찬하고 윤창적이 썼다.

     

    청계사를 중창한 조인규는 원나라 간섭기에 고려를 나라답게 지탱한 인물로서 사가(史家)들 사이에서는 비교적 후한 평을 유지한다. 하지만 오늘 말하고자 하는 사람은 조견(趙狷, 1351~1425)으로, 조인규의 증손자 되는 사람이다. 그는 1371년(공민왕 20) 문과에 급제한 후 영남안렴사(嶺南按廉使) 등을 지냈는데, 그의 형이 조선 개국공신으로 영의정을 지낸 조준(趙浚)이다.

     

     

    하조대 일출 / 해수욕장으로 유명한 하조대는 개국공신 하륜과 조준이 놀러왔다가 각각의 성을 따 만든 지명으로도 유명하다. (강원일보 사진)

     

    그런데 그는 형과 달리 이성계에 붙어 출세하지 않았으며 오히려 조선 개국에 항거해 관직을 사퇴하고 청계사에 들아와 수도승이 되었다. 아울러 이름도 초명(初名)인 윤(胤)을 버리고, '개 견'(犬) 자와 상통하는 '고집스러울 견'(狷) 자를 택해 개명했다. 자(字)는 아예 종견(從犬)이라고 했다. '주인 좇는 개'라는 뜻이다. 그가 자해(自害)와도 같은 작명을 한 이유는 자명하다. 옛 주인을 잊지 않는 개처럼 되겠다는 의지, 그리고 개만도 못한 자들이 득실대는 시대에 대한 조소(嘲笑)였다. 

     

    이성계는 조견을 출사시키려는 마음에 급기야 그의 형 조준과 함께 청계사를 찾았다. 이때 조견은 군신지간(君臣之間, 군주와 신하 사이)으로서는 만남을 불허하나 붕우지예(朋友之禮, 친구 사이의 예의)로서는 만날 수 있다는 조건을 달았다. 이성계는 일단 만나야 했기에 수락했으나 소기의 목적은 끝내 이루지 못했다. 조견은 이렇듯 백이숙제와도 같이 꿋꿋했지만, 그러면서도 늘 괴로워했던 바, 그가 청계산에 올라 북쪽 개경을 향해 통곡했던 곳을 후세 사람들은 망경대(望京臺)라 불렀다. 

     

    아울러 후손들은 조견의 충절을 기려 청계사 가는 길에 보본단(報本壇)이라는 망배단을 세우고 제사를 받들고 있다. 하지만 들어가 볼 수는 없으며 또 찾기도 쉽지 않다. 

     

     

    보본단 / 조견 외 조인규, 조서(趙瑞), 조련(趙璉), 조연수(趙延壽), 조위(趙瑋), 조덕유(趙德裕) 등을 모셨다.
    조견과 망경대에 관해 쓴 보본단 앞 안내문

     

    차제에 말하고 싶은 곳은 청계사 가는 길에 있는 마을 옥박골이다. 옥박골은 그저 부르는 이름이 아니라 법정동과 같은 엄연한 행정지명인데, 조선시대 이곳에 죄인을 가두는 옥(獄)이 있어 '옥박골'이라 불렀다고 한다. '옥 바깥에 있는 동네'라는 뜻이렸다. 하지만 유래가 다분히 의문스럽다. 조선 시대의 의왕시 청계동은 원님이 있는 치소(治所)가 아닌지라 감옥이 존재할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다만 여기서 차로 5분 거리에 서울구치소가 있어 미래를 내다본 영험한 지명이라는 생각이 든다. 활주로를 연상시키는 '긴 마루섬'이라는 뜻의 영종도에는 정말로 긴 활주로를 가진 인천국제공항이 들어서고, 쇠섬(금호도)으로 불렸던 광양만에 포철 광양제철소가 들어 선 것처럼. 뿐만 아니라 충주 물막이골에는 충주댐이, 전남 고흥(高興)에는 우주로켓 발사장이, 경기도 기흥(器興)에는 삼성전자 기흥공장이 들어서 정말로 (반도체)기기로 흥한 동네가 되었다. 

     

    서울구치소에는 참으로 많은 사람이 거쳐갔겠지만 가장 핫(Hot)한 인사로는 윤석열 전 대통령을 들지 않을 수 없다. 잘 알려진 대로 그는 새해 벽두에 이곳에 갇혔다가 체포 52일 만인 3월 8일 풀려났다. 그런데 민주당에서는 이번에는 그를 풀어준 판사를 대신 집어넣으려 하고 있어 귀추가 주목된다. 그보다 궁금한 사람들은 윤석열의 진영에 있다가 이재명의 진영으로 말을 갈아탄 몇몇 인사들이다. 왕조시대와 비견하는 것은 당연히 어불성설이겠지만 위의 조견이 보았다면 무엇이라 했을지, 굳이 설명할 필요도 없다.  

     

    그중 한 사람은 꼭 짚어 말하고 싶으나 괜한 시비거리가 될 것 같아 표현의 자유를 유보하기로 하겠다. (유튜브에서는 공공연히 다루어지는 인사임에도 이상하게 이런 류의 것은 블로그에서는 문제가 된다. 블로그가 더이상 활성화되지 못하는 원인과도 무관치 않아 보인다) 청계사 가는 길에 그 옥박골에 들러 괜스레 동네를 한 바퀴 둘러보았는데, 예쁜 마을이 많은 요즘에도 가히 탑(Top)이라 할 만큼 아름답고 풍광도 빼어나다. 문자 그대로 바람도 햇빛도 모두 최상인 곳이다. 지형의 영향인가, 마을 입구에 서니 산에서 끌어내려진 바람의 이동이 느껴진다. 여름에 무척 시원할 것 같다. 

     

     

    옥박골 입구
    옥박골 표석
    윤석열 대통령이 구속될 즈음의 서울구치소 (한겨레 DB)
    사연 많은 서울구치소에서 멀지 않은 곳에 무념무상의 사찰이 있다.
    그 사찰은 번뇌가 사라지는 길을 거쳐 이른다.

    입구의 청계사 조정숙공사당기비(義王淸溪寺 趙貞肅公祠堂記碑) / 청계사에 정숙공(貞肅公) 조인규의 사당을 만들게 된 과정을 기록한 비석으로 고려 충혜왕 2년(1341년)에 건립됐다. 크기는 높이 177㎝, 너비 84㎝, 두께 18㎝로 찬자(撰者)는 이곡, 글씨는 왕수성이 썼다.
    정숙공사당기비와 승탑
    삼성각과 지장전
    지장전의 지장보살입상
    영산전
    보물 지정된 동종 / 승려 사인비구가 1701년 제작한 종이다. 사인비구는 18세기의 뛰어난 승려 장인으로 전통적인 신라 종의 제조기법에 독창성을 합친 8개의 종을 만들었다. 종의 높이 115㎝, 입지름 71㎝, 무게 420kg이다.
    안내문
    보물 지정된 목판 / 1622년(광해군 14)에 새긴 묘법연화경을 비롯한 18종 466판의 목판이 보존 중이다. 모두 청계사에서 조판된 것이다.
    파손된 석조
    영산전 옆 석물 / 청계사의 지난한 세월이 응축된 듯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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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하스페르츠의 단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