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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천 청평사에 남겨진 도인 이자현의 흔적잘 알려지지 않은 흥미로운 역사 이야기 2025. 5. 25. 22:16
수도권에 거주하시는 분 가운데 춘천의 고찰 청평사에 다녀오지 않은 분은 드무리라 여겨진다. 시공간적으로 데이트 장소로써 안성맞춤이기 때문이니 방문객의 평균 연령이 전국에서 가장 낮은 사찰이라고 하는 유별난 통계도 존재한다. 지난 주말 푸릇한 청춘들의 틈에 끼어 청평사에 다녀왔는데, 지지난주에도 가평 조종암에 가기 위해 경춘선 열차를 타고 대성리까지 부대꼈던지라 연 2주 고생을 한 셈이다. 그러고 보니 바야흐로 MT의 계절이다.
가평 조정암 사진을 다시 한번 올려본다. 조정암기실비 / 허망한 조선 사대주의의 표석이다. 김부식의 동생 김부철이 지은 '진락공 중수 청평산 문수원기(眞樂公重修淸平山文殊院記)'에 의하면 청평사는 고려 광종 24년(973) 후당(後唐)에서 돌아온 영현선사(永玄禪師)가 경운산에 백암선원(白岩禪院)을 창건한 것에서부터 시작된다. 사명(寺名)으로 보아서는 당대에 유행했던 선종 사찰임에 분명하다. 이후 문종 22년(1068) 이의(李顗)가 쇠미한 백암선원의 터에 보현원(普賢院)을 세웠다.
그로부터 21년 후인 1089년, 이의의 장남 이자현(李資玄)이 보현원을 중창하고 사명을 청평산 문수원(淸平山 文殊院)이라 개칭했다. 주목할 것은 문수원은 불교 사찰이 아니라 도교 사원으로서의 성격이 짙다는 것이다. 이자현은 문수원에서 죽을 때까지 머물렀던 것으로 보이는데 역시 승려보다는 처사로서 주석했을 가능성이 크다. 우선 그 사실을 청평사 해탈문 인근 선동구역에 위치한 淸平仙洞(청평선동) 암각문이 증명한다.
그가 직접 새겼다고 여겨지는 각자는 이곳이 사찰이라 아니라 선원(仙院)임을 의미한다. '선동'(仙洞)이란 '신선이 사는 동네'라는 뜻이다. 이 하나를 보아도 그는 확실히 특이한 존재이니, 그것은 그가 이자겸(李資謙, 1050~1127)의 사촌이라는 사실에서 더욱 놀라게 된다. 이자겸이 누구인가? 그는 고려 문종 때의 권신으로 자신의 세 딸을 모두 문종에게 시집보내 인주이씨(인천이씨)의 전성시대를 연 사람이다.
이자겸은 자신의 권력을 더욱 공고히 하기 위해 요직에는 모두 친인척을 앉혔고 나아가 왕이 되기 위해 반란까지 일으켰다. 이른바 '이자겸의 난'으로, 고려 초기의 혼란을 다루는 문제로써 한국사 시험에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까닭에 이자겸이라는 인물은 아주 나이 든 노인을 제외하고는 한국인이라면 모를 수가 없는 사람이다. 그 외도 이자현·이자겸 가문은 8대 현종에서 인종에 이르는 열 명의 왕과 혼인관계를 맺었다. 그럼에도 이자현은 모든 부귀영화를 마다하고 입산수도하였던 바, 특이하다 아니할 수 없는 것이다.
지붕이 날아간지 10년도 넘은 산중의 해탈문 / 그것이 오히려 해탈에 이른 듯 보인다. 청평선동(淸平仙洞) 암각문 청평선동의 바위 절벽 근래에 세워진 것이지만 절 입구의 다리 이름도 선동교(仙洞橋)다. / 1975년 세워진 다리다. 이자현의 사상을 알 수 있는 기록은 역시 '진락공 중수 청평산 문수원기'이다.(이하 문수원기) '문수원기'는 청평사에 은거하며 도를 닦던 이자현의 행적을 기록한 비로서, 진락공(眞樂公)은 그의 시호이다. '문수원기'의 비문은 당대 최고의 문장가 김부철이 짓고, 최고의 명필 탄연이 쓴 것으로 고려시대 사상사와 불교사, 서예사를 두루 살필 수 있는 가치 높은 문화유산이다. 하지만 이 유물은 한국전쟁 때 포격으로 산산조각이 되어 사라지고 말았다.
<조선고적도보>에 실린 '문수원기'의 1910년 사진 '문수원기'는 그렇게 사라졌다가 1968년 절터에서 비편들이 발굴되며 복원의 움직임이 일었다. 이에 1980년대 후반 재야 서지학자 박영돈 씨 등이 시중의 '문수원기' 탁본을 구해 어느 정도의 비문을 완성했는데 그럼에도 30여 자는 여전히 불명했다. 그러다 1990년대 들어 동덕여대 신동하 교수가 규장각에서 그간 알려지지 않았던 '문수원기'의 앞 뒷면 탁본을 찾아냄으로써 완전한 비문을 복원하게 되었다.
이후 비(碑) 자체의 복원 움직임이 탄력을 받게 되었던 바, 춘천시는 국비 등 1억2000만 원의 재원을 마련해 작업에 착수했다. 그리하여 마침내 2008년 7월 25일 완전한 형태로 재현된 '청평사 문수원기'를 청평사 경내에서 세우고 제막식을 가졌다. 한국전쟁으로 파손된 지 55년여 만에 비가 처음 세워진 878년 전의 모습을 다시 볼 수 있게 된 것이었다. 원래 비신 재질은 점판암이었으나 재료를 구할 수 없어 충남 보령산이 오석이 사용된 것만 다를 뿐 외형은 과거의 모습 그대로를 옮겨왔다.복원된 '문수원기' / 높이 234cm, 너비 111cm, 폭 20.5cm에, 받침대는 높이 35cm, 너비 170cm, 폭 73cm이다. 더불어 뜻깊은 것은 신라의 김생을 포함해 신품사현(神品四賢)으로 이름 높던 대감국사 탄연(坦然, 1070~1159년)의 글씨를 다시 볼 수 있게 된 일이니 그의 필적은 부분적으로 전해지는 것 외에 없기 때문이다.(북한산 승가굴중수기, 청도 운문사원응국사비가 탄연의 글씨로 추정된다) 여기에는 글씨의 복원을 맡았던 강원지역문화연구회의 공이 지대하였으니 <조선금석문총람> 등에 전해지는 탄연 글씨의 비교 분석 끝에 탁본에서 뭉그러진 글자를 집자(集字)해 채워 넣을 수 있었다. 부분적으로는 컴퓨터 그래픽 등의 기술을 동원하였다고 한다.
비문의 탄연 글씨 비문의 내용은 전반적으로 이자현의 수행과 고행, 청빈과 금욕적 생활을 찬하는 불교적 내용을 담았으나 도교적 색채도 물씬하니 특히 그의 죽음에 관한 부분이 그렇다. 이를 테면 다음과 같은 내용이다.
공(公)이 자신의 죽음을 예견하여 문인에게 말하기를 "나는 오래 살지 못할 것이다. 내가 죽은 뒤에는 문인인 조원(祖遠)이 계속하여 이 절에 머무르고, 조원 이후에는 다시 도(道)와 행실이 있는 사람을 택하여 서로 계속 주석이 되게 하라"하시고, 다시 또 문인에게 이르기를, "인간의 목숨이란 덧없는 것이며 남과 같이 나도 죽을 것이니 슬퍼하지 말고 도(道)의 정신을 잃지 말라" 하더니, 말을 마치고 문득 신시(申時)에 입적했다.
죽을 때에 임해서도 정신이 혼미하지 아니하고 보통 때처럼 웃으며 이야기하는 것이 신묘했는데, 입적할 때에 이상한 향기가 방안에 가득하더니, 차츰 온 산중에 퍼져 사흘 동안이나 그치지 않았다. 사후에도 그는 온몸이 상함 없이 옥처럼 깨끗하였던 바, 마치 살아 있는 사람을 보는 듯했다. 23일에 유언대로 장사를 지냈는데, 산에서의 삶은 원우(元祐) 4년부터 선화(宣和) 7년까지 36년이고, 세수(歲數)는 65세였다.
청평사 입구의 이자현 부도 / 다른 견해도 있으나 이자현의 것임에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를 능가해 이 자리를 차지할 사람이 없는 까닭이다. 안내문 이인로(1152~1220)의 <파한집>에서도 이자현의 도교적 사상이 드러난다. <파한집/ 진락공 이자현> 조에는 "이자현은 항상 자연 속에 숨어 살 생각이었다.… 옛 선사의 말씀을 좋아하여 학자가 찾아오면 오로지 함께 방에 들어 가 말을 잃은 채 하루 종일 무릎을 꿇고 정좌하였으며, 때때로 덕이 높은 옛 스님의 종지를 상론했다. 이로 말미암아 심법(心法, 수양법)이 온 나라에 유포되었으니 혜조, 탄연 양 국사가 그 문에서 놀았다"고 되어 있다. 거기에 실린 아래의 시에서도 불자(佛者)보다는 도인(道人)의 풍모가 느껴진다.
푸른 봉우리에 터 잡아 사니
전부터 내려온 거문고가 보배로다.아무런 방해 없이 한 곡조를 타건만
소리를 이해해 줄 사람이 없도다.
家住碧山岑
從來有寶琴
不妨彈一曲
祗是少知音이자현은 이곳 오봉산(779m)에 입산을 한 후 구송폭포에서부터 정상 부근인 청평식암(淸平息庵)에 이르기까지 자신만의 선계(仙界)를 꾸몄다. 그 정점에 있는 것이 청평사 입구의 영지(影池)로서 우리 정원문화의 원류로 평가받는 곳이다. 호사가들은 이자현이 만든 이 정원에서 과학적 원리를 찾기도 하는 바, 연못의 북쪽 면이 남쪽 면보다 길지만 정면에서 보면 정사각형으로 보이는 이유가 이자현이 연못을 정방형으로 보이도록 하기 위해 원근법을 채택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아울러 연못에 비치는 오봉산의 모습이 휘어져 보이지 않게 하려는 의도도 숨어 있다 하는데, 정말로 그런지는 숲이 산을 가려 알 수가 없다. 또 연못 안에 놓인 섬과 같은 바위에서 보면 연못이 완전 정방형의 형태로 보인다는데, 그 또한 들어가 볼 수 없으니 알 재간이 없다. 다만 이자현이 바윗돌로써 '마음 심'(心)자를 형상화했다는 말은 보기에 따라서는 그러한 것도 같다. 아무튼 이 영지가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고려시대 정원의 흔적임은 분명하다.
청평사 선착장에서 본 오봉산 선착장의 배 / 소양댐에서 청평사까지 운행하며 운임은 왕복 1만원이다. 청평사 영지 남북 19.5m, 북쪽 연못 면이 16m, 남쪽 연못 면이 11.7m이다. 연못 속의 바위 / 일본 교토 사이호사(西芳寺)의 고산수식(枯山水式) 정원보다 200년을 앞선다는 말도 있다. 못 앞 바위에 새겨진 이른바 오도송(悟道頌/ 깨달음을 얻은 뒤 부르는 노래)도 이자현의 솜씨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마음이 일어나면 모든 것이 생겨나고 / 마음이 사라지면 모든 것이 사라지네 / 이와 같이 모든 것이 사라지고 나면 / 곳곳이 모두가 극락이로다"(心生種種生 心滅種種滅 如是俱滅已 處處安樂國)라는 이 글은 해동암각문연구회 강원도암각문조사단(회장 홍순석 강남대 명예교수)이 '문수원기'를 바탕으로 이자현의 작품임을 밝혀낸 바 있다.
영지 앞 오도송이 새겨진 바위 영지 명문 바위 안내문
그 외도 청평사에서 이자현의 흔적을 찾기는 어렵지 않은 일이니 계곡 위쪽으로 올라가면 이자현이 암반을 파 세숫대야처럼 만들었다는 '이자현 세수터'가 있고,(용도는 알 수 없다) 그가 자신의 호 식암(息庵)을 딴 작은 암자를 짓고 그 뒤 절벽에 새겼다는 청평식암(淸平息庵)이라는 암각문도 볼 수 있다. 식암의 息자는 도가의 중요한 수련법인 호흡을 의미하는 글자라고 하며, 이자현의 절친인 곽여가 청평식암을 찾아와 읊었다는 다음과 같이 시도 전한다.
뜬 구름이 선동(仙洞)에 드니 여하튼 누(累)가 될 일이 없고,밝은 달이 계곡을 비추니 세상 먼지에 물들지 않는다.
浮雲入洞曾無累明月當溪不染塵
임금 예종이 이자현에게 수양법에 대해 묻자 이자현은 욕심을 적게 가지는 것이 으뜸이니 모든 일은 과욕에서 비롯된다고 계고했다. 세상에 도인을 흉내 내는 이들이 많으나 막상 도사 같은 사람은 보지 못했다. 세간에서 도사라고 불리는 자가 과거 유명 신문에 연재한 글 중에서도 그럴듯하게 와닿은 글에 대한 기억이 전혀 없다. 오죽하면 지면낭비라는 말을 했을까..... 과거 길을 가다 많이 접해 본 '도를 아십니까?' 혹은 '얼굴이 너무 맑아 보이세요'라고 말을 걸던 선남선녀 중에서 과연 도를 깨달은 사람이 있을까....?
세상의 모든 욕(辱)은 과욕에서 비롯된다는 이자현의 말은 전혀 틀림이 없을 것이다. 그래서 소위 도사라 하는 것들이 그 과욕의 틈을 비집고 들어오는 것이니, 이번에 손홍민 선수에게서 3억을 갈취한 프리랜서 모델 뒤에도 그 반(半) 정도를 뜯어간 무당이 있어 세상의 관심을 끌었다. 막말로, 약점을 잡았다 싶으면 껍데기까지 홀랑 벗겨내는 것이 소위 도사라는 것이고 무당이라는 자들이다. 앞서 '무속, 도교, 도사 & 삼청동 소격서' / '무속이 무교나 도교로 승화되지 못한 이유'에서도 말했지만, 그들은 도(道) 같은 것은 전혀 모르고 오직 돈만을 알 뿐이다.
이자현은 청평거사(淸平居士)라는 호를 쓰기도 했다. '청평(淸平)'이란 무엇인가? 여기저기 뒤져보니 '청빈(淸貧) 속에서도 평안(平安)함을 유지할 수 있는 수준 높은 정신적 깊이를 뜻한다'고 되어 있다. 이렇게 높은 정신적 깊이는 부귀영화나 권력으로부터 자유로울 때 이룩할 수 있다고 하는데, 그 첫걸음은 욕심을 덜어내는 일부터 시작한다. 이는 새겨 들을 일이니, 이리하면 적어도 사기꾼이나 가짜 도사로부터는 자유로울 수 있을 터이다. 속이는 것은 그들이지만 정작 속게 되는 이유는 자신의 욕심 때문인즉.
청평식암( 淸平息庵) 암각문 청평식암 부근의 소(沼) 척번대(滌煩臺) / 조물주가 쌓은 이 자연석 더미를 후세 사람들은 척번대라 명명했다. 번뇌를 씼는 곳이라는 의미다. 오봉산에서 본 절 마당 청평사에서 바라본 구름 극락보전 / 청평사 법당 중에서 가장 오래된 당우다. 극락보전 삼존불 극락보전 옆 수령 850년의 보호수 향나무 극락보전과 삼성각 회전문 안에서 본 회전문 / 청평사 중에서 가장 오래된 건물이다. 16세기 중엽의 건축물로 6.25전쟁 때도 포격을 피했다. 1963년 보물로 지정되었다. 천정의 가구 구조 / 16세기 가구법을 말해주는 중요 유물이다. 이 시절에도 와 본 기억이 있다. 입장료를 냈던 것 같다. 회전문 좌우로 덧붙혀진 익랑 / 회전문은 빙글빙글 돌아가는 문이 아니라 윤회전생(輪廻轉生)의 회전을 의미한다. 오봉산과 청평사 / 춘천시청 제공 사진 회전문 앞의 '청평산 문수사시장경비' 터 안내문 / '청평산 문수사시장경비'는 원나라에서 청평사에 보내온 대장경과 사찰 후원금 등에 관해 새긴 비석으로 대학자 이제현이 짓고 명필 이임이 썼다. 비문의 탁본이 전해진다. 청평사 삼층석탑 / 김시습의 시 '有客淸平寺'에도 등장하는 고려시대 탑이다. 청평사의 명물 구송폭포 청평사 계곡의 들머리 '잘 알려지지 않은 흥미로운 역사 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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