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BOUT ME

-

Today
-
Yesterday
-
Total
-
  • '사릉부석감역필기'와 인평대군의 별서지 송계별업
    토박이가 부르는 서울야곡 2025. 8. 23. 23:57

     
    단종 비 정순왕후(定順王后, 1440~1521) 송씨의 불행한 삶에 대해서는 앞서도 몇 차례 말한 바 있다. 그는 1457년(세조 3) 11월, 단종이 유배지인 영월 청령포에서 교살된 후에도 64년간의 삶을 더 이어가다 1521년(중종 16) 6월, 82세를 일기로 한많은 인생을 마감했다. 정순왕후가 기거했던 종로구 숭인동에는 그가 매일 같이 올라 동쪽 영월 땅을 바라보며 슬퍼했다는 동망봉(東望峰)이 있는데, 근자에 정순왕후를 기리리는 동망각이라는 누정이 세워졌다.
     

     

    동망봉 표석 / 영조 47년(1771)에 영조가 친히 '동망봉(東望峰)'이라는 글자를 써서 이곳에 있는 바위에 새겼으나 일제시대 채석장이 되며 깨져 사라졌다.
    동망봉 동망각
    동망각에서 바라본 동쪽 밤하늘


    정순왕후는 양주 땅(현 남양주시 진건읍) 해주정씨 선산에 묻혔다. 그의 무덤이 이곳에 마련된 이유는 남편인 단종과의 사이에 후사가 없었던 까닭에 시누이 경혜공주(단종의 누나)의 아들인 외조카 정미수를 시양자(侍養子)로 두었던 데 연유한다. 이로 인해 사후 해주정씨 선산에 묻히게 된 것인데, 숙종대에 남편 단종이 복권되며 왕비의 신분을 회복했고, 그가 묻힌 양주의 무덤도 사릉(思陵)으로 승격됐다. 
     
     

    사릉 원경
    사릉

     
    정순왕후가 평생 남편을 생각하고 그리워했기에 '생각 사'(思) 자의 사릉이 된 것이다. 하지만 본래는 작은 무덤이었을 터, 훗날 새롭게 단장되고 석물이 설치되었을 것인데, 그때 필요한 돌을 채석했던 채석장의 흔적이 2019년 7월 북한산 구천계곡에서 발견됐다. 채석장 흔적이 확인된 곳의 바위에는 '사릉부석감역필기'(思陵浮石監役畢記)라는 글과 함께 기묘년(1699년) 정월(1월) 사릉 조성에 필요한 석물 채취를 담당한 관리들과 석수의 이름이 새겨져 있었다. 
     
    서울시는 해당 채석장을 최초로 발견된 왕릉 채석장으로서의 가치를 매겨 서울시문화재(기념물 제44호)로 지정했다. 그런데 이곳은 사릉 외에도 왕릉에 필요한 채석이 이루어진 듯, 계곡 일대에서는 일반 백성의 부석(浮石=채석)을 금지하는 '부석금표'(浮石禁標)와 입산 자체를 금지하는 '금표'(禁標) 등이 확인됐다. 그곳은 지금 계곡 정비라는 또 다른 이유로써 출입이 금지되고 있다. 


     

    '부석금표' 바위
    '부석금표' 글자
    '금표' 바위
    구천폭포 하단의 '사릉부석감역필기' 안내문
    풀어 쓴 안내문
    '사릉부석감역필기' 각서
    각서 내용 / KJB NEWS DB

     

    '사릉부석감역필기'가 있는 구천계곡 부근에는 인평대군(麟坪大君, 1622~1658)의 별서지 '송계별업'(松溪別業)의 흔적도 남아 있다. 인평대군 이요(李㴭)는 인조의 셋째 아들로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의 동생이다. 앞서 '동촌(東村)에 살던 사람들 I - 이화장·조양루·석양루'에서 언급됐듯 인평대군의 집은 원래 종로구 이화동에 있었다.

     

    <동국여지비고> 제택(第宅)조를 보면 "인평대군 집은 건덕방 낙산 아래에 있다. 용흥궁과 마주하고 있으며 석양루라고 한다. 단청을 칠하고 담벽에 그림을 그려서 크고 아름답기가 장안에서 제일가는 집이었다"고 되어 있다. 용흥궁은 봉림대군의 집으로, 동복형제인 두 사람은 장성해서도 이웃에 살며 아침 저녁으로 안부를 물을 만큼 우애가 남달랐다. 

     

     

    봉림대군이 살던 용흥궁
    용흥궁 마당에 있던 삼양사 은행나무
    인평대군이 살던 석양루
    이화동주민센터 화단에 있던 석영루터 표석 / 2015년 철거됐다.
    인평대군의 집 석양루가 있던 종로 EM활용센터

     

    하지만 인평대군은 현 이화동 27-2번지에 있던 석양루에서보다 북한산 계곡 송계별업에서 더 오랜 시간을 보냈다. 그는 병자호란 후 소현세자 · 봉림대군과 함께 청나라 선양(瀋陽)에 볼모로 갔다가 1641년 귀국한 후 북한산 구천폭포 부근에 송계별업이라는 별서를 조성했다.

     

    그는 구천계곡을 가로지르는 비홍교(飛虹橋)라는 궁형(아치형)의 다리를 건설하고 다리 양쪽에 보허각(步虛閣)과 영휴당(永休堂)이라는 건물을 지어 단청을 올렸다. 한마디로 ' 별유천지비인간'(別有天地非人間)의 선계(仙界)를 조성한 것이었다. 그는 계곡의 형상을 따 자신의 호도 송계(松溪)라 하였다.

     

    계곡의 폭포는 구천은폭(九天銀瀑)이라 명명했다. 당나라 이백의 시 "나는 듯 곧장 삼척 척을 흘러내리니, 은하수 한 굽이 하늘에서 떨어지네(飛流直下三千尺, 疑是銀河落九天)"에서 빌려온 이름이었다. 그리고 당대의 명필 이신(李伸)의 글씨로써 九天銀瀑의 4글자를 폭포 직벽에 새겼다. 이신은 우리에게 잘 알려지지 않은 인물이나 경희궁 흥화문의 현판을 쓴 숨겨진 명필이다. 부근의 松溪別業도 필시 그의 글씨일 것이다.

     

     

    구천폭포 아래 비홍교가 놓였던 한담(寒潭)
    전체 3미터의 '구천은폭' 각자 / 국가유산청 사진
    '송계별업' 각자
    송계별업 터 안내문
    비홍교의 흔적 / 인평대군은 자신의 문집 <송계집(松溪集)>에서 '천년이 지나 화려한 단청 집은 무너지고 없을지라도 돌다리와 폭포만은 영원하리라'는 염원을 담았지만 오늘날 그 돌다리는 찾을 길 없다.

     

    보허각(步虛閣), 영휴당(永休堂) 등의 이름을 보면 인평대군은 이 별서에서 마음을 비우고 오랫동안 살고 싶었던 듯하다. 하지만 시대의 혼란은 그를 가만히 쉬게 놔두지 않았으니, 효종 즉위 후 강압적인 청나라의 간섭을 무마하기 위한 외교관으로서 무려 11차례에 걸쳐 청나라에 다녀와야 했고 짬짬이 정무도 살펴야 했다. 그는 1658년 36살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떴는데 필시 과로 때문이었을 것이다.

     

    인평대군은 4복이란 불린 네 아들을 두었으니 큰아들부터 차례로 복녕군(1639~1670), 복창군(1641~1681), 복선군(1647~1680), 복평군(1648~1682)이었다. 이중 큰아들 복녕군은 일찍 죽었고 나머지 세 아들은 1674년 숙종이 즉위할 무렵, 이른바 '홍수(紅袖)의 변'에 연루돼 죽었다. 당시 숙종의 나이 13세, 까닭에 현종의 사촌인 인평대군의 아들들이 혹시라도 어린 숙종의 왕위를 탐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숙종의 어머니인 명성왕후가 죄를 씌워 죽여버린 것이었다.

     

    이렇게 인평대군의 아들까지 모두 죽자 관리할 사람이 없어진 송계별업 곧 황폐해졌고, 이후 왕실의 채석장까지 조성되며 아예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버렸다. 송계별업의 위치는 서울시 강북구 수유동 산 127-1이다. 

     

    댓글

아하스페르츠의 단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