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시 연식이 있는 분들만이 공감할 얘기지만, 1990년 6월 9일 종로 3가 단성사 극장에서 개봉한 임권택 감독의 영화 '장군의 아들'은 대단한 신드롬을 일으켰다. 당일 오전 첫 상영부터 입장권이 매진됐고, 영화를 보기 위한 관객 행렬이 극장서부터 종묘까지 이어졌다. '장군의 아들'은 일제강점기 일본 야쿠자들로부터 서울 종로를 지켰던 협객 김두한의 이야기다.
단성사 '장군의 아들' 개봉일 광경
여기서 김두한이 명성빠의 여종업원과 강남 봉은사에 놀러 갔다가 종로경찰서 구니모토 형사에게 체포돼 구금되는 장면이 나온다. 왜 그랬을까? 당시 봉은사는 일반인이 놀러 가면 안 되는 곳이었을까? 절대 그렇지 않았다. 그러나 김두한은 청산리대첩의 영웅 백야 김좌진 장군의 아들이었던 바, (그래서 영화의 제목도'장군의 아들'이다) 일반인과 다르게 예비 검속 대상이었다. 그래서 서울을 벗어나려면 경찰서에 신고해야 되는데, 이를 무시하고 갔기에 체포된 것이었다.
'장군의 아들' 포스터
그렇다면 일제강점기에는 봉은사가 서울이 아니었다는 말이 되는데, 사실이 그러했으니 당시는 경기도 광주군 언주면에 속했고, 삼성동이란 지명 역시 일제강점기에이곳에 있던 세 마을, 즉 절마을(봉은사마을), 무동도마을, 닥점마을을 합쳐 '삼성리(三成里)'로 편제한 것에 기인됐다. 그 땅이 불과 60여 년 전인 1963년 1월 1일 서울시로 편입됐고, 이후로도 배밭으로나 활용되며 버려지다시피 한 곳이 대한민국의 고도성장과 맞물리며 최고로 비싼 땅이 된 것이다.
조선시대에는 어떠했을까? 직접 눈으로 본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명종조 때는 지금의 삼성동 이상으로 은성했으리라 여겨진다. 당시 삼성동에는 대찰 봉은사 아래 적지 않은 규모의 사하촌(寺下村)이 형성되었을 것이니, 성종의 원찰로 건립된 봉은사가 왕실로부터 방대한 사하전(寺下田)을 하사 받았던 까닭이다. 즉 지금의 코엑스, 아셈타워, 인터콘티넨탈 호텔, 강남 공항터미널, 현대자동차 사옥 부지가 모두 사하촌으로 봉은사 땅이었는데, 대부분 명종조 문정왕후 때 이루어진 일이었다.
일제강점기의 봉은사 / 봉은사는 신라시대 연회국사에 의해 794년(원성왕 10) 견성암(見性庵)이란 이름으로 창건됐다.일제강점기 <경성부지도> 속의 봉은사
그러나 조선말에 이르러서는 이 방대한 사하전을 빼앗으려는 세도가들의 협잡질이 있었는데, 이것을 흥선대원군이 차단해 봉은사에 대한 침탈을 막았다. 봉은사 경내에 '흥선대원군 영세불망비'가 세워진 있는 것은 그 때문이다. 이렇게 지켜진 땅이 1970년대 들어 요동 치기 시작했던 바, 1970년 벽두 서울시로부터 봉은사 앞 사하촌 38만7000여 ㎡에 대한 매입 요청이 있었고, 이에 대한 찬반으로 대한불교조계종 내 무력 충돌이 발생했다.
봉은사 내 '흥선대원군 영세불망비' 비각흥선대원군 영세불망비
이를 시발로 비롯된 조계종의 돈과 권력에 관한 분규는 1990년대 말까지 단속적(斷續的)으로 이어지며 아래의 세계적 특종 사진을 낳았다. '추락하는 진압 경찰'이란 제목이 붙은 아래 사진은 1998년이 저물어가던 12월 23일, 연합뉴스 김재영 기자에 의해 찍혔다.
종로 조계사 총무원 건물을 점거한 승려들에 대한 퇴거 집행에 나선 경찰들이 고가사다리를 타고 진입하던 중 사다리가 뒤틀리면서 진압 경찰들이 추락하는 영화 같은 장면이 마침 현장에서 카메라를 들고 있던 김 기자에게 포착된 것이었다. (그는 이듬해 2월 12일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에서 열린 '98년 세계보도사진대회'에서 현장보도 단일사진 부문 1등상을 받았다)
' 추락하는 진압 경찰'
그도 무리가 아닐 것이 이때 봉은사가 판 땅의 일부인 7만9342㎡에 한국전력 사옥이 들어서고 2014년 그 땅이 다시 (주)현대자동차에 팔렸을 때의 낙찰가가 10조5500억원이라는 천문학적 액수였기 때문이다. 지극히 속된 얘기가 되겠지만 만일 봉은사에서 사하촌 땅 38만7000여 ㎡를 그대로 소유하고 있었다면 대한민국의 재벌은 물론이요, 미국의 트럼프, 중국 청쿵그룹 리카싱을 능가하는 부동산 재벌이 되지 않았을까 한다.
너무 속(俗)스러우니 다시 조선시대로 돌아가자. 앞서 말한 대로 문정왕후는 인종이 급서하고 자신의 어린 아들이 국왕(명종)이 되자 그를 대신해 수렴청정을 했다. 근 10년간의 수렴청정 기간 동안(1545~1553년) 문정왕후는 마치 여왕처럼 군림하며 제 입에 맞는 정치를 펼쳤는데, 그중에는 불교중흥책도 있었다. 숭유억불의 조선사회에 있어서 아래와 같은 중흥책은 오직 문정왕후이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불심이 깊었던 문정왕후는 명종 5년(1550) 고승 보우스님에게 선교 양종을 부활해 봉은사를 본산으로 지정토록 하고, 보우대사는 그 명을 받아 선종 수사찰(首寺刹)인 봉은사 주지 및 선종판사를 맡았다. 이후 문정왕후의 동생이던 외척 윤원형의 도움을 받아 전국 300여 개의 사찰을 국가 공인의 정찰(淨刹)로 지정하였는데, 그 명맥이 지금껏 이어져 오고 있는 바, 대단한 업적이라 아니할 수 없다.
봉은사 내 '조선선종중찰비' / 보우는 봉은사를 선종의 본산으로, 봉선사를 교종의 본산으로 삼았다.
또 보우대사는 온갖 음해와 난관을 겪으면서 그간 폐지되었던 승과를 부활하고 선종과 교종의 교리에 입각한 합법적고도 똑똑한 승려를 배출해 냈다. 서산 휴정대사와 사명당 유정대사도 이러한 승과를 통해 배출됐고, 그리하여 훗날 임진왜란 때 왜군에 맞서 승병들이 활약할 수 있었던 것도 보우대사의 노력이 있었기에 가능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으며, 멸실된 불교를 되살린 조선 불교의 중흥조로도 평가받는다.
봉은사 '허응당 보우대사 봉은탑' / 2019년 세워진 전체 높이 320cm의 탑으로 업적에 비해 너무 늦게 조명받은 감이 있다.최근에 건립된 봉은사 보우당봉은사 전경다시 들여다 본 김정희 서(書) '판전' 현판 / 그동안 이렇게 색이 바랬다니...?봉은사 판전은 1865년 건립된 봉은사의 가장 오래된 당우이다. 이 사진은 2014년 서울시가 홍보용으로 찍은 것이다.판전 옆의 '추사 김정희선생 기적비' / 추사는 이곳 봉은사에서 생의 말년을 보냈다.입구의 '남호대율사비'와 '나청호대선사 수해구제공덕비' / 1925년 을축 대홍수 때 708명을 구제한 것을 기념해 세웠다.
그렇지만 당대의 유생들에게 있어 보우대사는 원수나 다름없는 자였으니, 갖은 모함이 난무했다. 그리고 그 많은 공격들을 문정왕후가 막아주었던 바, 일례로 <명종실록> 명종 5년의 기사는 다음과 같다.
상이 조하를 받고 조강에 나아갔다. 대왕대비가 함께 나아가 수렴하였다. 지경연사 임권(任權)이 아뢰기를,
"중 보우(普雨)는 극히 간사한 자입니다. 그를 따르는 자들은 재물을 빼앗기 위하여 사람을 살해하는 등 거리낌 없이 방자하게 굽니다. 형조가 강도를 추국할 때 승려가 반을 차지하였습니다. 만일 내수사가 금지 푯말을 세워 중들을 비호한다면 한갓 이교(異敎)만 성하고 오도(吾道)는 쇠망하게 될 뿐만 아니라, 또한 뭇사람들이 모여들어 도적이 되어 해독이 백성에게 미칠까 걱정됩니다."
하니, 자전이 전교하기를,
"보우가 뭇사람을 현혹시킨다는 일에 대해서는 알지 못하겠다. 능침(陵寢)의 수호 사찰 가운데 봉은사(奉恩寺)는 다른 절과 같지 않아 봉공(奉供)하는 일이 매우 많다. 다투는 자가 많고 모함하여 해치기 때문에 위에서는 통분해하는데, 조정에서도 남의 말에 현혹됨을 면치 못하니 매우 옳지 못하다." 하였다.
하지만 거듭된 상소에 결국은 선종판사 임무를 휴정 스님(서산대사)에게 맡기고 설악산 백담사에 물러가 있다가 2년 후 다시 봉은사로 돌아왔다. 당시 수많은 이들이 복귀를 말렸지만 보우대사는 기어코 봉은사로의 복귀를 단행했다. “지금 내가 없으면 후세에 불법은 영원히 끊어질 것이오.”
이후로도 보우대사는 귀양, 혹은 사형에 처하라는 셀 수 없는 상소에 시달렸고, 그럼에도 그는 꿋꿋이 불교중흥에 헌신했는데, 1565년(명종 20) 문정왕후가 세상을 떠나며 결국 제주 귀양길에 오르게 되었다. <명종실록>에 따르면 당시 그를 죽이라는 상소가 팔도로부터 빗발쳤고 한양으로부터 밖으로 팔방에 이르기까지 유생들이 구름처럼 모여 상소를 올렸으며 그 수가 무려 1000회를 헤아릴 정도였다.
<어우야담>에는 보우대사가 제주도에 귀양 오자 제주목사 변협(卞協)이 힘센 무리들로 하여금 매일 대사를 때리게 해 결국은 장살(杖殺)로 죽었다고 되어 있다. 필시 이와 비슷한 순교의 길을 걸었을 터이다. 세수 56세, 법랍 41세였는데, 순교 직전 아래와 같은 임종계를 남겼다.
일없이 허깨비 마을에 와서 오십여 년을 한바탕 놀았구나 인간사 영욕이야 무슨 상관이랴 이제 적당한 자리로 돌아가느니
되찾은 봉은사의 얼굴 / 2020년 5월 29일 본래의 자리로 되돌아온 일주문이다. 봉은사 일주문은 1986년 강남 개발 과정에서 해체되어 양평 사나사, 오봉산 석굴암의 문이 되었다가 다행히도 제자리를 찾았다. 1880년 초창된 이 문은 조선후기 일주문 가운데 현전하는 유일한 문일 수 있어 문화재적 가치가 기대된다.오봉산 석굴암 때의 모습 / 오봉산 석굴암은 서울 우이동과 양주시 장흥면 사이 고개길인 양주 우이령에 위치한다. 지금은 복제된 문이 서 있다.옛 봉은사 일주문 / 안개에 싸인 고즈넉한 풍경이 일품이다. 사진작가 이경모가 1945년에 찍었다.봉은사 진여문 / 예전에 일주문 역할을 하던 문이다. 진여(眞如)는 사물의 있는 모습 그대로를 뜻한다. <사적기>에 의하면 창건 당시부터 있던 건물이다.진여문 안의 사천왕상 / 1746년(영조 22) 화원 여찬을 비롯한 여러 승려가 조성했다는 복장기록이 최근에 발견됐다.운하당 / 스님들의 수행공간이다. 창건 당시부터 있던 건물이나 1941년 중건됐다.봉은사 영산전 / 석가모니 부처님과 16나한을 모신 곳이다. 모셔진 16나한은 모두 서울시유형문화재다, 언뜻 추사향이 느껴지는 현판 글씨는 구한말 학자 지운영의 작품이다. 종두법을 시행한 지석영의 형으로 추사의 제자인 강위에게 사사했다. 2021년 찍은 사진이다.대웅전 목조석가여래삼불상 / 석가·약사·아미타불의 삼세불로 1651년(효종 2) 조성됐으며 1689년(숙종 15)경 본존 석가불이 새로 고쳐졌다. 후불 탱화인 <삼세불도>는 1892년 제작됐다.봉은사 '명상의 길' 대나무 숲 구간봉은사 '명상의 길' 활엽수 구간50년간 존재하던 봉은사와 경기고 사이의 철조망을 걷어내고 긴 '명상의 길'을 조성했다.경기고 화동관과의 경계에서 옛 백제토성(삼성리토성)의 흔적도 찾을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