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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지문덕 장군의 을지로 그리고 중국화상토박이가 부르는 서울야곡 2025. 9. 21. 22:49
조선시대 을지로는 '구리개'로 불렸다. 을지로 1가와 2가 사이에 진흙으로 이루어진 낮은 언덕이 구리(銅)처럼 누렇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개'는 '재'와 더불어 고개를 의미하는 우리말로, 아현동 일대가 애오개(아이 고개)로 불린 것도 그 예(例)다. 그것이 갑오개혁 때 아현(阿峴)이 됐고 구리개는 동현(銅峴)이 됐다. 조선시대 구리개에 산 유명 인사로는 고산 윤선도가 있다.

윤선도 집터 표석 
표석은 한국 YWCA 건물 입구에 위치한다.
고산 윤선도가 살던 자리에는 개화기 제중원이 들어섰다. 1884년 선교사 알렌이 재동 홍영식의 집에 세웠던 최초의 서양식 병원 제중원은 이후 구리개로 옮겨와 2대 원장 헤론 때까지 성업했다. 하지만 헤론이 이질로 죽고 3대 제중원 원장 빈튼이 정부와 불화를 빚으며 제중원은 국가로 귀속됐다.이후 1905년 건물과 대지가 일본 공사관에 팔렸고, 이후 이 자리는 외부(外部, 외무부) 고문관 미국인 스티븐스의 관사 및 조선인 고위관리와 일본 외교관, 군인들 간의 사교장소인 대동구락부로 사용됐다. (스티븐스는 지독한 친일행각을 일삼다 1908년 샌프란시스코에서 전명운 의사에게 저격당해 죽는다)

구리개 시절의 제중원 
양화진의 헤론(Jhon W. Heron 1856~1890) 묘
3대 제중원 원장 빈튼은 의료사업보다는 선교에 역점을 두었던 의료선교사였다. 그는 미국 북장로회 소속으로 1891년 4월 제중원 원장으로 취임하였으나 초기부터 제중원 운영비의 사용 권한을 두고 정부와 갈등을 빚었고, 제중원 구내에 교회 설립을 추진하며 이를 반대하는 정부와 다시 충돌했다. 그러자 그는 여러 차례 파업과 태업 등으로 시위하며 정부를 괴롭혔다.

3대 제중원장 빈튼(Charles C. Vinton)
이 고래들 싸움에 환자들은 정말로 죽을 맛이거나 혹은 정말로 죽거나 했는데, 1893년 어비슨이 부임하며 존폐 위기까지 몰렸던 제중원은 다시 정상화될 수 있었다. 어비슨은 숭례문 부근에 세브란스 병원을 세우며 의료사업을 더욱 확장시켰던바, 이에 세브란스는 남대문 제중원으로도 불리었다. (어비슨은 빈튼과는 반대로 선교보다는 의료를 중시했으며, 다른 선교사들과 달리 교파에 얽매이지 않은 채 의료 사업에 충실했다. 어비슨가(家)의 3대에 걸친 봉사 이야기는 '한국을 사랑한 이방인들'에서 다룬 바 있다)

어비슨(오른쪽)이 1907년 세버런스가 한국을 방문했을 때 세브란스의학교 교장 사택 앞에서 찍은 사진. / 세버런스는 한국의 의료를 위해 많은 돈을 희사했고 어비슨은 의학교와 병원에 그의 이름을 헌정했다. 1908년 구리개에는 동양척식주식회사가 세워졌다. 흔히 '동척'(東拓, とうたく)이라 불렸던 이 회사는 일제가 조선의 식산(殖産) 진흥을 담당하고 일본의 선진 농업을 전수한다는 미명으로 설립했으나, 실제적으로는 조선의 토지수탈과 자원수탈의 첨병 역할을 한 기관으로, 특히 빼앗은 토지에 대해 50%가 넘는 과다한 소작료를 부과한 악행으로써 악명이 높았다.

동양척식주식회사 
구리개와 동양척식주식회사 
같은 위치에서 찍은 2025년 사진 / 동양척식주식회사가 있던 곳에는 하나금융그룹 본사가 들어섰다. 
동양척식주식회사 전면 1926년 황금정통(黃金町通)으로 이름이 변한 이곳에서 나석주 의사의 의거가 있었다. 대한민국임시정부 경무국 경호원으로 활동하던 나석주는 1925년 급진적 무장투쟁 단체인 의열단에 가입한 후 동척을 폭파하기 위해 잠입했다. 그는 이듬해 1월 14일 남대문로 조선식산은행으로 들어가 폭탄을 투척했으나 불발했고, 이어 동척에도 들어가 일본인 여러 명을 쏘고 폭탄을 투척했으나 유감스럽게도 재차 불발했다. (폭탄이 폭발하지 않은 이유는 명확지 않으나 웨이하이웨이에서 배를 기다리며 지하실에서 머물 때 그곳의 습기가 영향을 미쳤던 듯하다)

당시의 식산은행 / 조선식산은행은 한호농공은행(漢湖農工銀行)을 비롯한 6개의 농공은행(農工銀行)을 통합하는 형태로 1918년 10월 1일 창립되었다. 
조선식산은행과 동양척식주식회사의 위치 / 경성부청은 지금의 서울시청이다.
이어 나 의사는 신고를 받고 출동한 혼마찌(本町) 경찰서의 도시(士師), 요코타, 노구치, 아오키, 후루카와, 박용하 순사 등과 시가전(市街戰)과도 같은 총격적을 벌이며 다수의 일경들을 사상시켰다. 하지만 황금정 2정목 삼성당 약국 앞에서 총을 맞고 붙잡혔는데, (現 동상 있는 곳의 맞은편) 이후 곧 총독부병원(現 서울대학병원)에서 절명했다. (☞ '황금정을 사른 서른다섯 불꽃의 삶 나석주')
총격전이 벌어진 거리 / 왼쪽 하나은행 길 쪽에 나석주 의사의 동상이 서 있다. 
어수선한 현장 사진 / 총격전인 끝난 후 사람들이 모여 웅성대고 있다. 
나석주 의사 동상 / 무장 투쟁을 했으므로 '의사'의 표현이 옳다 1960년 이곳에서는 고려대학교 학생들에 대한 경찰의 발포가 있었다. 1960년 4월 18일, 고려대 학생들은 3.15 부정선거에 항의해 선언문을 낭독하고 국회의사당으로 가 농성을 했다. 이후 학생들은 의사당 농성을 풀고 내무부 앞을 지나다 경찰들의 총격을 받았다. 동척 건물은 해방 후에는 국방부 정훈국에서 사용하다 한국전쟁 후 내무부가 들어섰는데, 건물을 지키던 경찰들이 해산을 강요하다 이를 거부하는 학생들에게 발포를 한 것이었다. 경찰의 총질로 다수의 학생이 사상했고 이것이 4·19 혁명의 도화선이 되었다.

1960년대의 을지로 / 동척건물은 1970년대 초까지 내무부로 쓰였다. 
1964년의 을지로 / 을지로 1가에서 2가 쪽을 찍은 모습이다. 오른쪽으로 내무부로 쓰였던 동척 건물이 쬐끔 보인다. 
같은 위치에서 찍은 2015년 사진 / "을지로의 시간은 느리게 쌓인다." 서울시 사진기록화사업 DB 1985년 이곳에서는 서울 미국문화원 점거 농성 사건이 일어났다. 그해 5월 23일 삼민투(민족통일민주쟁취민중해방투쟁위원회) 위원장 함운경의 주도로 서울대, 고려대 등 5개 대학 남녀 학생 73명이 현 서울특별시청 을지로청사 자리에 있던 서울 미국문화원을 기습 점거했다. 학생들은 미문화원 도서관에서 '광주학살 책임지고 미국은 공개 사죄하라'는 등의 구호를 적은 종이를 창문에 붙이고 주한 미국대사와 면담을 요구하며 2층에서 단식 농성을 벌였다. 학생들은 72시간 만에 농성을 풀고 나와 경찰에 연행됐다.

경찰과 대치 중인 
그때 그 시절 사진 당시 주동자로 구속됐던 함운경은 군산 네모선장 횟집 주인이 됐고, 현장에는 없었으나 당시 서울대총학생회장으로서 함운경과 함께 구속됐던 김민석은 현재 대한민국의 국무총리다. 함운경과 김민석은 이후 정치가로 나섰는데, 함운경은 지역공천에서부터 밀리며 행로가 순탄치 않았던 반면 김민석은 일찌감치 금배지를 달며 순항했다. 이후 욕망에 부푼 김민석은 2002년 대통령 선거 야당 후보 단일화 과정에서 노무현 후보를 버리고 정몽준 신당 합류에 합류하며 철새라는 오명과 함께 정치인생이 끝날 뻔했으나 용케 살아나 총리가 됐다. 어디까지 날(飛)는지 철새의 비상을 지켜볼 일이다.

1938년 일본 기업 미쓰이물산 경성지점으로 출발한 이 역사적 건물은 다시 역사 속으로 사라진다. / 이 자리에는 2031년 지하 6층·지상 22층 규모의 서울시의회 신청사가 들어설 예정이다. 을지로에는 아직 세운상가가 존재한다. 건축가 김수근이 설계한 국내 최초의 주상복합건물이자 공중도시인 세운상가는 1967년부터 72년까지 세운, 현대, 청계, 대림, 삼풍, 풍전, 신성, 진양상가가 차례로 세워졌다. 총 연결 길이는 무려 1㎞에 이르는데, 각종 전자제품과 포르노물을 파는 곳으로써 이름이 높았다. 근방의 을지로 인쇄 골목 또한 유명한데, 그 중간에 이순신 장군께서 탄생하시고 사시던 집터가 있다.

을지로 24길에서 보이는 세운상가 건물 
을지로 인쇄 골목 
중구 인현동 1가 40번지 신도빌딩 입구 '충무공 이순신 생가터' 표지판 / 한글학회와 서울시 시사편찬위원회가 일대를 답사하고 고증한 끝에 1965년 12월 5일 신도빌딩 자리를 이순신 장군의 탄생지로 확정했다. 을지로는 1946년 해방 후까지 남아 있던 일본식 동명(洞名) 정리 사업에 따라 고구려 을지문덕(乙支文德) 장군의 이름을 빌려 을지로로 명명됐다. 특별히 을지문덕의 이름을 빌려온 것은 당시 을지로 입구 소공동 일대를 장악하고 있던 화상(華商)들을 의식해서이다. 당시 화교들은 신생 대한민국에 비해 월등한 자금력으로써 남대문·소공동 일대의 상권을 거의 잠식한 상태였다.
이에 당시 정부에서는 발흥하는 화상을 잠재우고자 살수대첩에서 되놈들을 몰살시킨 을지문덕 장군을 소환해낸 것인데, 효과가 있었는지 동남아에서와 달리 화상들이 힘을 쓰지 못했다. 그것이 단지 을지문덕 장군의 후광만이 아니었을 터 당시의 남덕우 경제부총리는 화교들이 많이 하던 중국집 짜장면 가격의 인상까지도 제한했다. 신생 대한민국은 그렇게 살아남아 지금의 선진국 문턱에 서게 된 것인데, 어떤 쪼다들은 그것도 모르고 중국에 대한 무조건 개방을 추진하고 있다.

을지로 입구 하나금융그룹 맞은편의 '구리개 터' 표석 
'구리개 터 표석' 너머로 보이는 CCB 중국건설은행 건물 / 오른쪽 유안타증권 빌딩의 소유주도 중국인이다. 
전쟁기념관의 을지문덕 장군 흉상 / 대한민국에 21세기의 을지문덕은 없는가? 반(半)중국화 된 제주도에 대한 반면교사는 고사하고 정부는 9월 29일부터 대한민국 전체에 대한 중국인 단체관광객 무비자 입국을 허용할 것이라 한다. 한시적이라고 하는데 언제까지라고 특정되지는 않았다. 그래서 걱정이다. 지난 5월부터 관광객을 유치를 목적으로 중국인 무비자 입국을 시행한 말레이시아는 이미 개판이 됐다. 우선 일용직 건설시장이 중국인들로 넘쳐나 말레이시아 도시빈민의 파산이 속출하고, 공항직원 폭행을 비롯한 사회 폭력이 급격히 만연되는 등의 심각한 사회문제가 발생하고 있는 것이다.
이에 말레이시아 관광부 장관이 대국민 사과를 하고 후속 조치를 마련 중이라는데, 대한민국은 과연 어찌 될는지 그 또한 지켜볼 일이다. 이 같은 행동이 수수방관으로 비칠지 모르나 지켜볼밖에 다른 도리가 없다. 아무튼 스스로가 밤길 조심할 일이다. 오원춘(중국어: 우위안춘, 吴原春) 사건 같은 끔찍한 사건이 다시 일어나지 않는다는 보장이 없기에....

오원춘 사건은 수원 토막 살인 사건으로도 불린다. 중국조선족 남성 우위안춘(43)은 2012년 4월 1일 경기도 수원시 팔달구 지동에서 20대 여성을 납치 성폭행하려다 상대가 저항하자 무참히 살해한 뒤 시신까지 훼손시켰다. 우위안춘은 무기징역이 확정돼 복역 중이다. '토박이가 부르는 서울야곡'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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