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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홍봉한의 우우당(友于堂)과 권불십년
    토박이가 부르는 서울야곡 2025. 10. 12. 00:17


    돌아다니다 보면 과거에는 뻑적지근했을, 그러나 지금은 쇠락하거나 잊힌 별서(別墅)지를 더러 만난다. 그중 국가유산청이 지정한 유명 별서정원은 11개로, 서울에는 부암동 석파정과 백석동천, 성북동 성락원 등이 있다. 부암동 서울미술관 내에 있는 석파정은 흥선대원군의 별장으로 잘 알려져 있고, 백석동천은 석파정과 달리 주인이 불명확한 곳으로써 유명하다. 

     

    백석동천 돌다리
    '白石洞天' 각자 바위
    사랑채와 안채로 오르는 계단
    약 3.8m 높이 대지 위의 사랑채 터 / 오른쪽 안채는 발굴 후 다시 흙으로 덮었다.
    사랑채의 주초
    지당(池塘)과 육각정 터

     
    흥미롭게도 이중에는 그 가치가 오락가락하는 곳도 많은데, 대표적 장소로 꼽을 수 있는 곳이 성북동 성락원이다. 성락원은 우리가 많이 찾는 성북동 길상사 가는 길에 있다. 조금 자세히 말하자면 길상사 전에 만나게 되는 성북동성당 바로 뒤에 위치한다. 그러나 들어갈 수는 없다. 사유지로서 개방을 불허하기 때문이다. 언젠가 그곳이 일반인에게 한시적으로 공개된 적이 있는데, 당시 개방을 이끌어낸 서울시의 성락원 보도자료에는,
     
    ▲서울에 남은 유일한 한국 전통 정원 ▲철종 때 이조판서를 지낸 심상응이 별장으로 사용 ▲고종의 아들인 의친왕 이강(1877~1955)이 35년간 거주하며 독립운동의 근거지가 된 별궁이라고 홍보했다. 아울러 문화재청장을 지내던 유홍준도 국내 3대 정원(담양 소쇄원, 보길도 부용동과 함께) 가운데 한 곳이라 말하며 '1790년 조성돼 200년 만에 열린 비밀의 정원'이라고 의미를 부여하기도 했다. 
     
     

    성락원의 간판 송석정 / 서울시청 제공 사진
    성락원 영벽지 / 서울시청 제공 사진

     
    그렇지만 지금은 이런 말이 쑥 들어갔다. 재야의 전문가들에 의해 성락원이 200년 이상 됐다는 기록은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을 뿐더러 성락원을 조성했다는 이조판서 심상응은 <조선왕조실록>이나 <승정원일기> 등의 공식 기록물에서 발견되지 않는 유령인물이며 의친왕의 소유였지만 거주 사실은 확인된 바 없다는 (그가 정말 독립운동을 했는지는 별개로 하더라도) 주장이 제기됐던 까닭이다. 
     
    아울러 재야 전문가들은 1993년 성북구가 발간한 <성북구지>와 1996년 서울시가 발간한 <서울문화재>에 의거, 성락원 송석정은 그저 옛 선비들의 음풍농월 장소였다가 일제강점기 말에 소실(燒失)돼 1953년경 복원한 건물이라는 것이 역사적 사실의 전부일뿐이라는 주장을 덧붙였다.
     
    서울시와 문화재청은 이에 대해 별다른 반박을 못한 것으로 안다. 사실상 재야 학자들의 주장을 받아들인 셈이었다. 그렇지만 꼴은 좀 이상하게 되었던 바, 이미 당시의 문화재청이 성락원을 역사적, 학술적 의미가 높은 장소로 인정해 '사적 358호'로 지정하였고(1992년) 이후 2008년 명승 항목이 신설되며 가치를 더욱 격상시켜 '명승 35호'로 상향 지정한 바 있기 때문이다. (명승 35호 성락원은 2000년 지정 해제되고 명승 제118호 서울 성북동 별서로 재지정됨)  
     
    실상에 가장 가까운 사실을 찾자면 <동아일보> 1961년 6월 2일자 기사이다. 기사에 따르면「주변 각자(刻字)의 흔적으로 볼 때 성락원은 조선시대부터 있던 풍치 좋은 장소의 정자였다. 이 일대를 1950~1960년대 심상준 제남기업 회장이 매입해 대규모 유락시설 조성을 하려 했다」는 것이 성락원의 전말이다. (당시 매입했던 일대의 땅이 무려 3만 평이다) 좌우지간 지금은 다시 금단의 땅이 돼 들어가 볼 수 없게 되었던 바, 이것저것을 논하는 것 자체가 무의미할는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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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무튼 별서를 마련하는 것은 고금(古今)의 로망이었던 듯하니, 앞서 소개한 과천 과지초당(瓜地草堂)의 조성자 김노경이 청나라 학자 등전밀(1795~1870)에게 보낸 편지를 다시 들여다보면 다음과 같다. 김노경은 추사 김정희의 아버지로, 김정희는 1852년 북청 유배에서 풀려난 후 부친의 묘소가 가까운 과지초당에 머물다 1856년 임종을 맞았다.  
     
    "노쇠한 데다 병까지 찾아와 의지가 갈수록 약화됨에도 직무는 여전히 번잡해 날마다 문서에 파묻혀 살고 있습니다. 다만 최근에 서울 가까운 곳에 집터를 구해 조그만 집 한 채를 마련한 후 그런대로 정원과 연못의 풍모를 꾸려 갖췄습니다. 연못을 바라보는 위치에 몇 칸을 집을 지어 '과지초당'이라 이름하였는데, 봄가을 휴가 때 찾아 아취를 느낄만하며 자못 친구들에게도 자랑할 만합니다." 
     
     

    과천 추사박물관 앞에 재현된 과지초당

     
    가장 최근에 다녀온 별서지는 서울 노원구 상계동 벽운동 계곡에 있는 우우당(友于堂)이다. 일대는 사도세자의 부인 혜경궁 홍씨의 아버지이자 정조의 외할아버지 홍봉한(洪鳳漢, 1713~ 1778)이 조성한 별서이다. 지금은 별서의 안채 우우당의 일부만이 남아 있는 상태인데, 그나마 발달장애인 교육기관으로 쓰이며 들어가 볼 수 없게 되었다. 벽운동 계곡이 서울시에 속한 만큼 주변도 상당히 개발된 상태이다. (까닭에 지하철 수락산역에서 도보로 10여 분밖에 안 걸린다)
     
     

    우우당 / 노원신문 DB

     
    하지만 옛 별서가 있던 계곡만은 예전의 수려함을 간직하고 있다. 근대 서화가요, 문화재 수집가인 이병직(李秉直, 1896~1973)의 덕분이다. 조선왕조 마지막 내시라는 별칭으로도 알 수 있듯이 그는 어린 시절 불의의 사고로 남성을 잃고 궁중 내시가 되었는데, 당시 그가 양자로 입적한 유재현 가(家) 역시 내시 가문으로서 7000여 석의 논을 가진 장안의 큰 부자이기도 했다. 
     
    고종의 총애를 받았던 내시 유재현은 1884년 12월 갑신정변을 일으킨 개화파에 의해 살해당했다. 이에 어린 이병직이 그 부를 물려받았는데 그중에는 정조시대 홍봉한의 별서도 포함돼 있었다. 이병직이 훌륭하다는 것은 그 부를 자신을 위해 쓰지 않다는 점이다. 그는 그 돈으로 우리의 문화재를 사들여 지켰고, 교육 사업에 희사해 고향인 양주에 양주중학교(현 의정부고등학교)와 효천초등학교를 세웠다. 그러면서도 우우당만은 지켰던 이병직은 1973년 가난 속에 병사했다. 
     
     

    이병직의 소장품이던 김홍도 자화상 / 평양 조선미술박물관

     
    다시 정조시대로 돌아가자면, 당시 노론의 영수였던 영풍부원군 홍봉한은 소론의 입장에 섰던 사위 사도세자와 충돌했다. 지금의 더불당과 국힘당 같은 양당의 충돌이었다. 이에 홍봉한은 세자를 거꾸러뜨리기로 마음먹고 이를 실행에 옮겼다. 이것이 영조 38년(1762, 임오년) 7월 5일 발생한 임오화변(壬午禍變)으로, 이 날 뒤주 속에 갇힌 세자는 8일 후 죽었다. 그 뒤주의 아이디어를 낸 사람도 영의정 홍봉한이었다. 
     
     

    홍봉한의 초상

     
    서울 노원구 상계동 1241번지 노원발달장애평생교육센터·예룸예술학교 자리에 있던 홍봉한의 별서는 그의 후광을 입으려는 사람들로 인해 늘 인산인해여서 우우당, 백운루(白雲樓), 탄금대(彈琴臺) 앞을 가득 메웠다고 한다. 백운루와 탄금대는 어느 곳인지 불분명하지만 지금의 노원발달장애평생교육센터·예룸예술학교 터가 관직 희망자, 혹은 더 좋은 자리를 얻으려는 사람들로 부적댔음이었다.    

     

    노원발달장애평생교육센터·예룸예술학교 입구
    시설 내의 백운루로 여겨지는 누정의 초석

     
    하지만 권불십년(權不十年)이었다. 1776년 왕위에 오른 정조는 우선 자신의 즉위를 방해한 좌의정 홍인한(홍봉한의 동생)을 붙잡아 전라도 강진 고금도로 유배 보내고 곧 사약을 내려 죽였다. 이어 장인 홍봉한을 손보려 했으나 홍봉한의 딸 혜경궁 홍씨가 제 아들 정조를 상대로 단식투쟁을 벌이는 바람에 성사되지 못했다. 하지만 마음고생이 심했던 홍봉한은 이후 그리 오래 살지 못했으니 2년 후인 1778년 65세를 일기로 생을 마감했다.
     
    정권이 바뀔 때마다 가혹한 정치보복이 가해지고 그때마다 당하는 쪽에서는 권불십년을 되뇌인다. 영원한 권력은 없으니 지금의 정권 또한 언젠가는 바뀔 터인데, 그때는 또 얼마나 가혹한 복수가 이루어질까? 권력과는 무관한 범부(凡夫)이자 구경꾼에 불과한 사람이니 그때는 또 그 복수극을 구경하면 되겠지만, 사실 보는 것도 참혹한 지경이다. 당한 만큼 돌려주는 것이 인지상정이니 미래를 대비한 보험쯤의 관용이라도 베풀면 좋지 않을까 싶다.
     
    언젠가 1.8평 독방의 주인이 바뀌게 되는 날, "그곳은 결코 비좁지 않으며, 모든 국민이 평등하듯이 구치소 안의 모든 수용자도 평등해야 한다"는 소리를 역으로 듣게 된다면, 옛 진(秦) 나라의 재상 상앙(商鞅)이 생각날는지도 모른다. 한때 일인지하 만인지상의 권세를 누렸던 상앙이 처지가 바뀌어 쫓기는 신세가 되었을 때, 그는 자신이 만든 엄혹한 법으로 인해 아무 데도 숨을 곳이 없었다. 이에 상앙이 하늘을 우러러 탄식했다. "아. 내가 만든 법이 나를 죽이는구나."
     
    상앙은 자신이 창안한 형벌인 거열형을 당해 죽었다. 이와 비슷한 역사적 사례는 많다. 또 다른 일례로서, 프랑스혁명 당시 단두대를 만들어 많은 사람을 효과적으로 죽인 로베스피에르와 당통 역시 단두대의 제물이 되었다. 혁명 초기의 동지였던 로베스피에르와 당통은 혁명 노선을 두고 갈등을 빚기 시작하였다. 로베스피에르는 공포정치를 통해 공화국을 지켜야 한다고 주장한 반면, 당통은 유혈 사태를 멈추고 관용을 베풀어야 한다고 맞섰다.
     
    조르주 자크 당통은 1794년 4월 5일 단두대에서 처형당했다. 그가 온건 노선으로 돌아서자, 동지였던 막시밀리앙 드 로베스피에르가 숙청한 것이었다. 당통은 의연하게 죽음을 받아들였으며 단두대로 가면서 로베스피에르의 집무실을 향해 "언젠가 너도 나를 따라올 것"이라고 외쳤다. 실제로 로베스피에르 역시 불과 몇 달 후인 1794년 7월, 당통의 예언대로 단두대에서 목이 달아났다. 로베스피에르는 생전에 국왕인 루이 16세도 단두대로 보냈는데, 그때 그가 했던 말은 이러했다.   
     
    왕은 무죄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를 무죄라고 선언하는 순간 혁명이 유죄가 된다. 이제 와서 혁명을 잘못이라고 할 수 있는가? 왕을 죽여야 한다. 혁명이 죽을 수는 없지 않은가?"

     
     

    수락산역 지하철 1번 출구 수락산 백운계곡 입구 표지판
    노원발달장애평생교육센터·예룸예술학교 입구 표지판
    계곡 입구부터 장하게 굽이치는 물줄기
    계곡 사계절음식점 야외 테이블 아래 옛 각자(刻字)가 있다.
    벽운동천(碧雲洞天) · 국봉(菊峰) 각자
    국봉(菊峰)은 송은(松隱)과 더불어 이병직이 쓴 호(號)라 하니 이병직의 글씨인 듯싶다.
    그 아래 운원수(雲源壽)도 이병직의 글씨체다. / 이병직은 해강(海岡) 김규진의 수제자로 국전 심사위원을 역임하였다.
    각자 위치에서 본 계류
    계류는 잠시 완만히 흐르다가
    어느 순간 다시 굽이치며
    이와 같은 장관을 연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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