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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어사 김정희와 양평 공무원의 원통한 죽음
    토박이가 부르는 서울야곡 2025. 10. 17. 22:07

     

    추사 김정희(1786~1856)의 행적에 관한 자료를 검색하다 증산도 역사공부방에서 암행어사 김정희에 대해 정리한 두 개의 패러그래프를 발견했다. 그 첫째가 '두 영세불망비 이야기'인데, 짧지만 내용이 충실하고 흥미로워 옮겨 적어 봤다. 관계된 아래의 사진 2장 또한  증산도 역사공부방에서 발췌한 것임을 밝혀둔다. 내용은 다음과 같다. 

     

    청나라 연호로 도광 6년 7월 어느 날 충청우도(지금 충남과 얼추 비슷하다) 보령군 남포현 주민들이 현감을 위해 영세불망비(永世不忘碑)를 세웠다. '도광 6년'은 순조 26년인 1826년이다. 날짜를 기억해둔다. 현감 이름은 성달영(成達榮)이다. 영세불망비는 '은덕을 영원토록 잊지 못한다'는 뜻을 담은 비석이다. 석 달 전인 4월 6일 충청감사 김학순(金學淳)이 '남포현감 성달영이 세금을 잘 거둬 지극히 가상하니 상을 달라"고 이조에 보고서를 올렸다.(1826년 4월 6일 <승정원일기>) 이 대단한 사또 비석은 남포읍성 입구에 서 있다. 

     

     

    충남 보령 남포면 남포읍성에 있는 비석군 / 왼쪽에서 두번째 비석은 남포현감 성달영 영세불망비다.

     

    충남 서산시 대산종합시장 건너편 산기슭에도 비석들이 서 있다. 주소는 대산읍 대산리 1365-8번지다. 계단 위 맨 오른쪽 비석은 1826년에 충청우도를 다녀간 암행어사 영세불망비다. 그가 행한 공덕이 적혀 있는데, 그 가운데 한 줄이 '永防加歛·영방가렴', '가렴주구가 더함을 영원히 막아줌'이다. 세운 날짜는 1826년 9월이다.

     

    그해 6월 24일 암행어사가 올린 보고서에는 충청우도 수령 59명 이야기가 나온다. 이 가운데 남포현감 대목이 굉장히 길다. 첫 문장만 보면 나머지는 읽을 일이 없다. '밤낮으로 오로지 자기 배를 채울 생각만 한다'(晝宵一念只在肥已 / 1826년 6월 24일 <일성록>) 기상천외한 방법으로 세금을 과도하게 거둬 원래만큼만 나라에 바친 뒤 나머지는 싹 챙겨먹는, '법 무시하기로는 있어서는 아니 될 부류'라는 것이다.

     

    이 남포현감이 주민들이 한 달 뒤 영세불망비를 세워준 그 성달영이다. 암행어사에 의해 비리가 현장 적발되고 조정에 보고서가 올라가고 나서도 부득부득 주민들을 들볶아 기어이 공덕비를 움켜쥐었다. 그 파렴치한 가렴주구 행각이 얼마나 극심했는지 짐작하고 남는다. 그해 5월 암행어사가 그 비리를 적발해내자 충청감사 김학순은 "(포상을 신청했던) 남포현감이 현장에서 봉고파출(封庫罷黜)됐다"고 조정에 급전을 올려야 했다. 물정 모르는 감사가 포상 신청을 올리고 한 달 뒤 어사가 들이닥쳐 현청 금고를 잠가버린 뒤 현감을 파면하고 품계 또한 강등해버렸다는 뜻이다.(1826년 5월 21일 <승정원일기>)

     

    때는 탐학에 질린 농민들이 팔도에서 죽창을 들던 민란의 시대였다. 보고서 다음 날 충청우도 전·현직 수령 12명이 처벌을 받았다. 탐관오리를 소탕해버린 이 암행어사 이름이 김정희, 세한도를 그린 그 추사 김정희다.

     

     

    충남 서산시 대산사거리에는 순조 때 충청우도 암행어사였던 어사 김정희 영세불망비가 서 있다. 김정희는 충청남도 전역을 암행하며 대소 고을 관리들이 비행을 적발해냈다.
    어사 김정희 영세불망비 탁본 / 오른쪽 아래 '永防加歛·영방가렴'의 문구가 보이다.

     

    김정희는 학문 뿐 아니라 행정가로서도 유능한 사람이었음을 말해주는 일화이다. 엊그제 그가 살았다는 서울 통의동 집 터를 찾아가보았다. 경복궁 서쪽에 자리한 통의동 집 터는 지하철 3호선 3번 출구를 나와 지금은 카페 골목으로 바뀐 주택가로 들어가면 쉽게 찾을 수 있다. 흔히 '통의동 백송 터'라고도 불리는 곳으로, 과거에는 이곳에 높이 16m에 달하는 600년 된 귀한 백송이 있었고, 그래서 흔히들 김정희 집 나무라고 했다. 

     

    그런데 이 백송이 1990년 7월 17일 장마철 집중호우로 쓰러졌다. 그러자 이것을 국운(國運)과 연결시키려는 부류가 나타났고, 늘 서 있는 자리가 불안했던 노태우 대통령은 백송을 살릴 것을 지시했다. 이에 서울시에서는 '백송회생대책위원회'가 구성되어 쓰러진 백송을 그대로 보호하며 살려보려 노력하였다. 하지만 결국 회생하지 못한 채 1993년 지금과 같은 모습으로 정리되었고, 이후 그 곁에 후계목 백송 4그루가 심어졌다.

     

     

    통의동 백송터의 지금은 밑동만 남은 백송
    일제강점기의 통의동 백송

     

    그때까지만 해도 그 백송이 김정희 집 나무라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었고, 2~3년전까지만해도 골목벽에 화살표가 그려진 표지판이 있었다. 그런데 그즈음  '통의동 백송 터'가 추사 김정희가 살던 집이 아니라 영조가 왕이 되기 전인 연잉군 때 살았던 창의궁(彰義宮) 터라는 설이 생겨났다. 그리고 지금은 그것이 확정된 듯 ' 추사 김정희의 집' 표지판이 사라졌고 대신 길 건너 쪽에 '창의궁 터' 표석, 그리고 그 80m 아래로 '김정희 본가 터' 표석이 새로 생겨났다.

     

    앞서 '과천의 추사 김정희와 벼루 10개를 맞창낸 열정'에서도 말했듯, 추사 증조할아버지 김한신은 영조 임금의 부마로 1732년(영조 8) 영조의 서장녀 화순옹주와 결혼했다. 영조는 둘째 딸 화순옹주가 월성위 김한신과 혼인하자 창의궁 일대의 가옥을 하사했는데, 바로 그 집이 월성위궁이었다. 창의궁 전체를 주었는지 아니면 일부를 떼어주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창의궁 자체를 김정희 가문과 곧바로 연결시키기에는 부담을 느낀 듯, 슬그머니 창의궁 아래를 김정희 본가 터라고 비정한 모양새다. 

     

     

    창의궁 터 표석
    창의궁 터 표석 주변 풍경
    김정희 본가 터 표석
    표석 주변 풍경 / 맞은 편으로 정부종합청사가 보인다.
    통의동 백송 터
    옛 백송 옆의 후계목

     

    주변을 조금 걷다 전철을 타기 위해 광화문 역으로 가는데, 세종문화회관 앞으로 경찰 버스가 늘어선 게 평소 분위기와 조금 달랐다. 주말 시위가 있을 때도 이런 분위기는 없었다. 밤이라 을씨년스러운가 생각하는데 문득 맞은 편 KT 본사건물이 보였다. 이른바 김건희 특검 사무실이 있는 곳이다. 나는 그제야 비로소 이 을씨년스러운 분위기의 정체를 알 수 있었다. 김건희 여사 일가의 개발 특혜 의혹과 관련해 민중기 특별검사팀의 조사를 받다 지난 10일 숨진 경기 양평군 공무원 정희철 씨의 분향소가 마련된 까닭이었다.  

     

    숨진 공무원 정희철 씨 변호인인 박경호 변호사는 12일 특검에 수사기록 열람복사 신청서를 접수했고 같은날 특검팀 사무실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어 직권남용·허위공문서 작성·가혹행위 등의 혐의로 특검팀 수사관들을 고발하겠다고 했다. 아울러 "조사의 가혹성을 보여주는 녹취가 있다"고도 했다. 고인이 수사팀의  압박 속에 허위 진술을 했고, 그로 인한 가책 및 자괴감 등으로 자살을 선택했다고 믿고 있는 듯하다.  

     

    예전 '브레이크 없는 벤츠'로 불린 '특수통' 김용원 검사에게 들은 얘기를 빌리자면, 파렴치 잡범일지라도 검찰청 문지방을 제 집처럼 넘나들며 세상 일에 닳고 닳은 놈들은 검사의 위력 따위에 전혀 주눅 들지 않고 오히려 가혹행위 운운하며 협박을 한다고 했다. 반면 법이 없이도 살 수 있는 사람들이 어떤 사건에 연루되어 조사받게 되면 심한 공포와 모멸감을 느끼게 되는 바, 매우 조심스럽게 접근한다고 했다.

     

    민중기 특검 팀이 이런 배려를 보였을 리 만무하다. 오히려 주리를 틀어 없는 죄도 만들어 씌우는 조선시대의 고신과 같은 취조가 이루어진 듯하다. <성호사설(星湖僿說)>에는 주리를 '나무토막을 다리 사이에 세워 놓고 위아래를 노끈으로 얽고서 좌우로 노끈을 잡아당기면 다리가 부러지는' 고문이라 했는데, 대개는 피의자의 정강이를 밧줄로 묶은 후 허벅지 가운데 나무 2개를 끼워 벌려 고통을 가하는 교목주뢰(交木周牢)가 이용됐다. 민중기 특검 팀은 말로 주리를 틀었던 듯하다.   

     

    특검을 딱히 비교할 제도는 없지만, 조선시대의 암행어사로 볼 수도 있다. 그렇다면 위 김정희처럼 사건의 시시비비를 올바로 가려 역사 앞에 밝히겠다는 자세가 중요하다. 그런데 오히려 민중기 특검은 그 반대의 행동을 한 듯하니 그저 망연할 뿐이다. 떳떳하다면 고인의 유서, 녹취록, 조사실 CCTV 등을 공개하고 조사받으면 될 것을 그저 숨기기에 급급한 모양새다. 김정희가 어사로 있던 조선 헌종 시대를 소위 '민란의 시대'라고 한다. 지금 사람들은 당시와 같은 가렴주구를 경험하지 않으니 민란은 없을지 모르나 민심을 크게 잃을 것은 분명하다.  

     

     

    특검 사무실이 있는 KT빌딩
    KT빌딩 입구의 분향소
    故 정희철 면장 추모 시민 분향소 /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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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하스페르츠의 단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