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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병자호란과 신경진의 묘 & 드론부대
    토박이가 부르는 서울야곡 2025. 10. 23. 06:21

     
    1592년의 임진왜란이 무방비 상태에서 당한 국란이라면 1636년의 병자호란은 충분히 대비할 수 있는 전쟁이었다. 1627년의 정묘호란으로 이미 예비시험을 치른 까닭이었다. 하지만 조선은 여전히 당쟁에 몰두하며 방비를 게을리했던 바, 임금 이하 대소 관리와 백성들이 남한산성에서 개고생을 하다 결국은 칼바람 부는 송파 삼전 나루에서 인조 임금이 청태종에게 삼궤구고두례(三跪九叩頭禮)를 행하는 치욕을 맛보게 된다.
     
    삼궤구고두례는 3번 무릎 꿇고 9번 머리를 조아리는 예법이라는 뜻으로, 1번 무릎을 꿇을 때마다 3번 머리를 숙임으로써 총 9번 머리를 조아리게 되는데, 그저 고개를 숙여 인사하는 형식이 아니라 땅에 이마를 찧어야 한다. 어찌 됐든 인조는 이 굴욕을 감수함으로써 창경궁으로 돌아와 편히 쉴 수 있게 되었지만 백성들의 사정은 달랐다. <인조실록>에 실린 백성들의 상황은 한마디로 아비규환이었다.  
     
     

    영화 <남한산성> 중의 삼궤구고두례

     
    청나라가 장수 용골대(龍骨大)와 마부대(馬夫大)가 성 밖에 와서 임금의 출성(出城)을 재촉하였다. 임금이 남염의(藍染衣) 차림으로 백마를 타고 의장(儀仗)은 모두 제거한 채 시종 50여 명을 거느리고 서문을 통해 성을 나갔는데, 왕세자가 따랐다. 백관으로 뒤쳐진 자는 서문 안에 서서 가슴을 치고 뛰면서 통곡하였다.
     
    .... 용골대 등이 인도하여 들어가 단(壇) 아래에 북쪽을 향해 자리를 마련하고 임금에게 자리로 나가기를 청하였는데, 청나라 사람을 시켜 여창(臚唱)하게 하였다. 임금이 세 번 절하고 아홉 번 머리를 조아리는 예를 행하였다.
     
    .... 그리고 용골대로 하여금 군병을 이끌고 행차를 호위하게 하였는데, 길의 좌우를 끼고 임금을 인도하여 갔다. 사로잡힌 자녀들이 바라보고 울부짖으며 모두 말하기를, "우리 임금이시여, 우리 임금이시여. 우리를 버리고 가십니까" 하였는데, 길을 끼고 울며 부르짖는 자가 만 명을 헤아렸다. 인정(人定) 때가 되어서야 비로소 서울에 도달하여 창경궁 양화당으로 나아갔다.
     
     

    일명 삼전도비로도 불리는 대청황제공덕비
    오롯이 아로새겨진 치욕의 역사
    지금의 송파 삼전도
    금번 추석연휴에 창경궁에 몰린 인파

     
    앞서도 말했지만 광해군은 신흥강국 후금(청)과의 등거리 실리 외교로서 청나라의 예봉을 피했다. 하지만 인조반정을 일으킨 무리들은 친명배금(親明排金, 명나라와 친하고 후금을 배척함)을 외교 정책으로 천명함으로써 두 차례의 전란(정묘호란, 병자호란)을 불러왔는데, 그에 앞서 일어난 이괄의 난은 이 두 차례 전란을 촉발시키는 역할을 했다. 우선 살아남은 이괄의 잔당들이 만주로 가 새로 수립된 인조정권의 친명배금 정책을 알려 후금을 자극시켰고, 이로부터 정묘호란이 비롯되었다. 
     
    1627년 2월 23일, '전 임금 광해군의 원수를 갚는다'는 명분으로 쳐들어온 후금은 불과 보름 만에 평안도와 황해도 지역을 점령했다. 당시 조선이 순식간에 북쪽 영토를 빼앗긴 것은 후금의 뛰어난 기동력에 기인한 면도 있지만, 그보다는 이괄의 잔당을 토벌한답시고 과거 이괄이 평안도병마절도사 시절 후금의 침입에 대비해 조련한 1만5천 명 병사들을 와해시킨 까닭이었다. 방비할 군사가 없는 마당이니 국경이 뚫리고 국토가 점령당하는 것은 당연한 노릇이었다.  
     
    병자호란에 있어서도 내란 척결 프레임은 변함없이 작동되었으니 간신 김자점 등은 의주성과 백마산성을 지키며 국경 방비에 전념해 온 임경업 장군을 소환해 역모 혐의로 죽여버렸다. 그 과정에 있었던 중요한 역할을 한 인물이 있다. 바로 신경진(申景禛, 1575~1643)이다. 신경진은 앞서 I편에서 다뤘던 삼도 도순변사 신립의 큰 아들이다.
     
     

    임경업 사후 무용지물이 된 의주 백마산성

     
    앞서 말한 대로 신립은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조선군 총사령관인 삼도 도순변사로써 조선군을 이끌고 내려갔으나 왜군과의 충주 달천벌 전투에서 패해 전사했다. 신경진은 그러한 아버지의 후광을 입었던 바, 선전관으로 특채된 뒤 부산첨사 함경남도병마우후(咸鏡南道兵馬虞候)를 거쳐 경원부사가 되었다. 이후 1623년 인조반정에 참여해 일등공신이 되었고, 병조참판과 훈련도감 대장을 겸했다. 
     
    그러다 이괄의 난이 일어났을 때는 3일천하 시절 왕으로 옹립됐던 흥안군 이제를 붙잡아 군기시(現 서울 프레스센터) 앞에서 즉결처형했다. 이에 그는 왕족을 임금의 허락 없이 죽였다는 비난 상소에 시달렸으나 인조로 비호로 처벌을 면했다. 인조 임금으로  보자면 신경진의 처사가 오히려 통쾌할 법도 하였다. <시니어 타임즈> 워라벨 뉴스 '충익공 신경진의 신도비'라는 기사에는 신경진에 대한 평가가 실렸다. 내용은 아래와 같다. 
     
    신경진은 인조반정(仁祖反正) 이후 일등공신(一等功臣)에 녹훈되고, 평성군(平城君)에 봉하여졌다. 병조참판이 되어 훈련도감(訓鍊都監)·호위청(扈衛廳)·포도청의 대장을 겸하여 왕실 안전의 책임을 맡았다. 정묘호란 때 강화도로 왕을 호종(扈從)하여 이듬해 부원군(府院君)에 봉해졌다. 임금의 총애를 배경으로 믿고 탐오(貪汚)하여 남의 집터 수천 칸을 빼앗아 언관의 탄핵을 받기도 했다.
     
    후에 복직되어 형조판서에 훈련대장을 겸하였다.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수하의 군사를 인솔하여 적의 선봉부대를 차단, 왕이 남한산성으로 피난할 여유를 마련하였다. 청나라와 화의를 성립한 후 다시 병조판서를 거쳐 우의정에 올랐다. 청나라의 요구로 최명길을 파직하고 영의정에 올랐으나 열흘도 못 되어 죽었다.

    누구나 공과가 있을 것이며 또 같은 처사라도 공으로 보이기도, 과로 보이기도 하겠지만 냉정히 살펴보면 공보다는 과가 더 많았다고 할 만하다. 특별히 이루어놓은 시책은 없으면서 상신(相臣: 삼의정 즉, 영의정·좌의정·우의정 등을 이름)으로 처세하며 대를 이어 공신으로 권세를 누리며 살아온 흔적이 이곳 신도비(神道碑) 주변에 고스란히 남아있다.

    우암 송시열(宋時烈)이 비문을 짓고 박태유(朴泰維)가 글씨를 썼다는 이 신도비는 높이 368㎝나 되는 거대한 석비(石碑)로 화강암으로 조각된 거북 받침대 위에 올려져 있으며, 비신(碑身) 위에는 정교하게 조각된 용머리 장식이 정교하고 화려하게 조각되어 있다. 신도비는 머리글인 두전(頭篆)은 이정영(李正英)이 썼으며, 비 건너편에는 신경진의 묘역이 자리하고 있다.

     

    서울시 망우동 충익공 신경진 신도비 전면
    신도비 우측면
    신도비 좌측면
    안내문
    신경진의 묘와 문석인
    신경진의 묘
    평산신씨 전첨공 종중 묘역
    묘역 풍경
    신경진의 손자 신여철의 묘

     
    병자호란 때의 내란 척결 프레임으로 임경업 장군을 죽였듯, 조은석 내란 특별검사팀은 지난 7월 김용대 드론작전사령관을 잡아 조지려 했다. 조은석 특검팀은 17일 평양 무인기 투입 의혹과 관련해 김용대 드론작전사령관을 형법상 일반이적 및 허위공문서 작성, 직권남용 등 혐의 피의자 신분으로 불러 조사했고,  조사 이튿날 이례적으로 그를 긴급체포했으며 영장까지 쳤다. 하지만 곧바로 영장이 기각되며 조은석 특검팀의 계획은 어긋났는데, 이 과정에서 컴퓨터에 내장된 김용대 사령관의 유서가 발견되기도 했다. 얼마나 억울했으면....
     
    김 사령관은 평양 무인기 투입과 관련해 윤석열 전 대통령의 직접 지시를 받은 적이 없으며, 투입 목적은 "시작부터 끝까지 적 오물풍선 대응이었다"며 북한에 의도적으로 무인기를 노출시켜 도발을 유도했다는 의혹은 "절대로 아니다"라고 밝혔다. 주한미군 기지 압수수색 등  조은석 특검팀의 망나니짓 가운데서도 내가 김용대 드론작전사령관의 건을 집어 말하는 것은 현대전에 있어서의 무인기, 그리고 드론과 같은 비전투원 전력의 중요성을 강조하고자 함이다.  
     
    그 망나니 특검팀은 현대전에 있어서의 드론의 중요성을 인식하고나 있는가? 현대전에서 드론은 과거 정찰 및 감시 도구에 머물렀던 역할에서 벗어나, 전장의 판도를 바꾸는 핵심 전력으로 자리 잡았다. 우리는 그것을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에서 익히 보아 알고 있는 바, 소형 FPV 드론 하나가 고가의 탱크를 파괴하고 공군기지를 공격하는 가공할 만한 위력을 간접 경험했다. 멋 모르고 지상에 노출된 북한병사들이 드론에 속수무책으로 당하는 광경을 목격하기도 했다. 그 최고 가성비의 드론부대를 보호해도 모자른 마당에 마구잡이로 터는 특검팀의 무지가 그저 놀라울 뿐이다.   
     
    앞으로 드론부대의 중요성은 더욱 부각될 것이다. 인구감소 현상으로 심각한 병력부족 문제가 닥칠(지금도 한국군의 병력수는 북한의 3분의 1에 불과하다) 미래에는 그 역할을 더욱 기대할 수 있을 터인데, 신통하게도 '예비역 일병' 출신의 안규백 국방장관께서 지난 9월 4일, 육군 제36사단을 방문하여 50만 드론전사 양성을 위한 소형드론 · (對)드론 분야 실증 전담부대를 최초 지정하고, 본격적인 50만 드론전사 양성 추진을 강조했다. (※ 국방부 보도자료 참조)
     
    상찬하여 말하거니와 이는 가히 현대판 십만양병설이라 할 만하다. 하지만 당장의 문제가 산적해 있다. 국방부가 북한의 드론 위협 등에 대비해 '50만 드론 전사 양성' 프로젝트를 띄웠지만, 내년부터 군부대에 투입될 드론 1만여 기의 부품은 모두 중국산인 것으로 확인됐다. 다른 이유는 아니다. 일찍부터 드론 개발에 나선 중국의 드론 기술력이 세계에서 압도적 1위이기 때문이다. 국내 드론 산업 기술을 한시 바빠 끌어올려야 할 이유다.  
     
     

    중국의 드론 굴기의 현주소 / 이 사진은 잠실 롯데 타워가 아닌 중국 광둥성 선전에서 드론이 음식을 배달하는 실제 모습이다. 회사는 중국 대표 배달앱 '메이퇀'이다. 이 정도이니 군사드론은 얼마나 무시무시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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