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인조반정과 인조별서유기비토박이가 부르는 서울야곡 2025. 10. 13. 22:14
광해군 정권을 거꾸러뜨린 인조반정이 얼마나 어설픈 쿠데타였는지가 서울 은평구 곳곳에 지명으로 남아 있다. 앞서 '이괄의 난의 성패를 가른 안현 전투'에서도 말했거니와 김류(金瑬), 이귀(李貴), 이괄(李括), 이서(李曙) 등은 광해군을 몰아낼 역모를 모의하고 마침내 거병했으나 막상 일이 터지자 김류는 겁을 먹고 아예 집 밖을 나서지 않았다. 1624년 1월 24일 밤, 집결지 홍제원 역참에서 기다리는 동지들은 속이 타 들어갔다.

서대문구 홍제동 홍제원 터 김류는 끝내 나타나지 않았다. 하지만 어차피 돌이키지 못할 일이라 생각한 이귀와 이괄은 예정대로 행동했고, 반정에 참가한 왕족 능양군(인조)도 자신의 무리를 이끌고 반군 합류지인 홍제원으로 나갔다. 그런데 이번에는 장단부사 이서가 문제였다. 능양군은 실군(實軍)이 없었으므로 이서의 군대에 의지해야 했는데, 어찌 된 셈인지 그가 나타나지 않고 있는 것이었다.
조바심을 견딜 수 없었던 능양군은 무리와 함께 몸소 홍제원 전 역참까지 나가 이서를 기다렸다. 역참과 역참 사이를 한참이라고 한다. 옛 역참은 대개 30리마다 하나씩 두었으므로 미터법으로 환산하면 12km가 되겠다. 그래서 '오래 걸리는 거리'라는 뜻의 '한참'이라는 단어가 생겼는데, '한참 동안'은 공간적 개념이 시간적 개념으로 바뀐 경우가 되겠다. 아무튼 능양군은 한참을 간 후 한참 동안 기다리다 해질 무렵 이서가 이끄는 군대와 상봉할 수 있었다.
훗날 이곳의 지명은 이서가 늦게 도착한 곳이라는 의미의 연서(延曙)가 되었고, 능양군이 이서를 맞은 곳이라는 뜻의 영서역(迎曙驛)으로도 불려졌다. 부근의 하천은 연서천, 혹은 신하를 늦게 만난 개천이라는 의미로 연신내(延臣川)라는 이름으로 불리다가 갑오개혁 즈음 연신내(延新川)로 한자가 바뀌었다.

은평구 구산동 연서로 표지판 
지하철 3호선 연신내역 드디어 이들은 약 1000의 군사를 몰아 북소문인 창의문(彰義門)으로 쳐들어갔다. 창의문을 지키던 금위영 군인들은 몰려드는 횃불에 놀라 대응할 생각을 잃었는데 그 틈에 무장 출신 이괄이 이끄는 부대가 성벽을 넘어 들어가 창의문을 열었다. 창의문을 돌파한 반군은 곧장 창덕궁으로 향했고, 창덕궁 금호문을 내응세력인 훈련대장 이흥립이 열어주었다. 금호문으로 들어간 일부 군사는 정문인 돈화문을 열었고 곧 반군들이 쏟아져 들어왔다. 광해군은 반군이 진선문을 통과하고 나서야 비로소 위급을 눈치채고 달아났다.

반군이 들어온 도성의 창의문 
반군이 들어온 창덕궁 진선문 
반군이 통과한 창덕궁 인정문 그런데 이쯤에서 궁금해지는 것이 있다. 영창대군을 죽인 후 늘 역모에 민감했던 광해군이 이 날의 반정에 있어서는 반군이 창덕궁에 들이닥칠 때까지 왜 몰랐는가 하는 것이다. 이에 대해 역사가들은 이구동성으로 김개시라는 상궁을 원인으로 지목한다. 인조반정이 일어나기 이미 며칠 전에도 역모에 대한 고변이 있었고, 반정 당일에도 밀창부원군 박승종의 결정적 고변이 있었으나 김개시가 이를 눌렀다. 그런 낌새가 전혀 없으니 걱정하시지 말라는 것이었다.
광해군은 늘 김개시의 말을 들었고 그날도 그의 말을 따랐다. 광해군이 김개시를 신뢰하는 것은 오래된 관계에서부터 기인한다. 앞서 말했듯 광해의 생모 공빈김씨는 광해군을 낳고 2년 뒤 산후병으로 죽었다. 이에 광해군은 선조의 정비였던 의인왕후에 의해 길러졌고, 그녀가 1600년 마흔다섯의 나이로 죽자 궁녀 김개시가 광해군을 길렀다. 어릴 적부터 남다른 정이 있을 수밖에 없는 관계였다.

동구릉 목릉 / 선조와 인원왕후의 능이다. 
인원왕후의 능 / 선조의 첫 번째 부인이었으나 끝내 자식을 생산하지 못했다. 천민의 딸이었던 김개시는 궁에 들어와 처음에는 광해군의 궁녀였다가 이후 선조의 궁녀가 되었다. 그녀는 임진왜란 때 선조를 지극정성으로 모신 덕에 선조의 총애를 받게 되었지만 후궁이 된 것 같지는 않다. 얼굴은 못 생긴 편이었는지 실록은 '나이가 차서도 용모가 피지 않았다'(年壯而貌不揚)고 특별히 적고 있다. 하지만 선조의 신뢰를 얻었던 바, 광해군과 선조의 나쁜 관계를 잘 중재할 수 있었는데, 선조가 두 번째 부인의 소생 영창대군으로 세자로 바꾸려고 하는 상황에서 김개시가 광해군을 도왔다는 기록이 있다
1608년 선조의 임종을 지키고 유언을 전한 것도 바로 김개시였다. 이로 인해 광해군은 무난히 왕위에 오를 수 있었고, 이후 김개시는 최고 상궁으로서 조정의 고위신료들과 함께 국정을 논하는 신분이 되었던 바, 권신 이이첨과 쌍벽을 이룰 정도가 되었다. 그녀는 상궁이었음에도 당상관 이상의 권력을 휘둘렀는데, 후궁의 위치에도 오를 수 있었지만 후궁이 되면 궁 밖 출입이 불가하고 행동에 제약을 받는 까닭에 스스로 상궁 자리에 머물렀다고 한다.
광해군의 비호 아래 김개시는 제멋대로 국정을 농단하며 고위직의 인사까지 주물렀다. 실록에는 '업무처리능력이 뛰어났고 눈치가 빨라 대궐 안의 모든 일이 한결같이 그녀의 손에서 처리되었다'(宮中之事 一出其水必)고 적혀 있다. 힘이 생기니 자연히 매관매직을 일삼게 되었는데 이를 탄핵한 윤선도(尹善道), 이회(李洄)가 역으로 유배를 갔다. 광해군 치세 말기 역모의 상소가 여러 번 올라왔으나 그럴 때마다 김개시가 그럴 리 없다며 광해군을 안심시켰다.
그리고 그럴 때마다 광해군은 김개시를 믿었고 항상 옹호하였던 바, 그녀는 상궁임에도 일인지하 만인지상의 위치가 되었다. 그런데 이쯤되면 대통령실 제1부속장 김현지가 떠오르지 않을 수 없는 노릇이다. 얼마 전까지 총무비서관으로 있다가 국감에 불려 나갈 처지가 되자 갑자기 국감 안전지대인 제1부속실장으로 자리를 옮긴 이 여자공무원은 행정관 인사는 물론이요 장관 인사까지 영향을 미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반면 등기부등본에 기재된 생년월일만 확인됐을 뿐 고향, 학력 등은 여전히 알려져 있지 않다. 사상 유례 없는 일이다.


그럼에도 밝혀진 것은 없다. / 사진 속 남자는 유튜브 뉴스트라다무스에 게스트로 나온 정혁진 변호사다. 김개시는 역모의 상소를 광해군에 올리지 않고 제 손에서 차단시켰지만 계속되는 모반의 정보를 접하며 광해군 정권의 종말을 예감한 듯싶다. 그는 마침내 간신 김자점 등과 내통하여 대북파를 버리고 소북파에 붙어 반정에 협조했던 바, 조건은 자신의 안위 보장일 것이었다.
그리하여 김개시는 당일의 반정에 있어서도 그럴 일 없다며 광해군은 눈과 귀를 가렸던 것이다. 명분이 어떻고 저떻고 떠들지만 인조반정 역시 양 붕당의 대결로서, 대북파와 소북파의 피 튀기는 싸움에서 소북파가 승리한 사건이었다. 하지만 김개시는 약속과 달리 무사하지 못하였으니, 창덕궁에 쳐들어온 반군에 의해 붙잡혔고 곧바로 참수되었다.
서울 은평구에는 또 인조가 왕위에 오르기 전, 별서(別墅)로 삼았다는 장소가 있는데, 아마도 그의 아버지 정원군이 만들었을 것이다. 인조는 능양군 시절 이곳 별서에서 김류, 이귀, 이괄, 이서 등과 반정을 모의하고 1623년에 실행에 옮겨 성공하였다. 숙종 때 이곳 별서지에 대한 자취를 남기기 위한 비석을 세웠는데, 지금은 별서지의 풍광은 사라지고 '서울 인조별서유기비'으로 불리는 비석만 남아 있다.
비석의 앞면에는 '인조대왕용잠지시별서유기비(仁祖大王龍潛之時別墅遺基碑)'라는 글자가, 뒷면에는 인조반정과 관련된 내용이 새겨져 있다. 앞면은 숙종의 글씨이며, 뒷면은 숙종이 지은 글을 동평군(東平君) 이항(李杭)이 썼다. 높이 291cm, 너비 72cm, 두께 26cm이며, 서울시문화재였다가 2006년 2월 보물(제1462호)로 승격되었다.


서울 인조별서유기비각 

서울 인조별서유기비 
비각 아래의 하마비 
지금은 주택가에 둘러져 있다. '토박이가 부르는 서울야곡' 카테고리의 다른 글
병자호란과 신경진의 묘 & 드론부대 (0) 2025.10.23 어사 김정희와 양평 공무원의 원통한 죽음 (9) 2025.10.17 홍봉한의 우우당(友于堂)과 권불십년 (4) 2025.10.12 진짜 외교 천재 광해군이 살던 곳 (7) 2025.10.03 을지문덕 장군의 을지로 그리고 중국화상 (7) 2025.09.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