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해군은 1575년(선조8) 6월 14일 서울 경복궁에서 선조와 공빈김씨(1553~1577)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공빈김씨는 선조의 후궁으로 선조의 첫아들인 임해군에 이어 둘째 아들인 광해군을 낳았으나 광해군을 낳은 지 2년 만에 산후병으로 사망했다. 광해군은 죽은 모친에 대해 무척이나 애달파했으니 훗날 자숙단인공성왕후(慈淑端仁恭聖王后)로 추존하고 묘를 성릉(成陵)의 격상했으나 광해군이 폐위된 후 다시 성묘(成墓)로 환원되었다.
경기도 남양주시 진건읍의 성묘 / 성릉일 때 왕릉급 규모가 갖춰졌다.성묘는 드라마 <허준>의 인기로 인해 박주미 무덤이라고도 불렸다.광해군의 태항아리와 태지석
광해군은 13세 되던 해인 1587년 장악원 첨정 유자신의 딸과 혼인하였는데 이후로는 한성부 동부 연화방 배오개에 집을 짓고 궁에서 나와 살았다. 그가 살던 집은 그로부터 20년 후 광해군이 왕위에 오르며 왕의 잠저로서 '이현궁'(梨峴宮)으로 불렸다. 이현궁은 지금의 종묘광장공원 오른쪽 인의동 길에 있던 배오개에서 비롯된 이름이다. 앞서도 말했지만 '개'는 '재'와 더불어 고개를 의미하는 우리말로, 근방에 배밭이 많아 배오개가 됐고 한자로는 이현(梨峴)이라 썼다.
배오개의 흔적배오개 다리에서 본 청계천이현궁에 있던 500년 된 은행나무 / 오른쪽으로 인의빌딩이 보인다.은행나무 밑 이현궁 터 표석인의빌딩과 종로플레이스도 이현궁 터에 속했다.부근의 한성부 동부관아 터 표석
사실 광해군은 서차자(서자 중에서도 차남)로서 왕위와는 거리가 있는 몸이었다. 선조는 정비(正妃)인 의인왕후 사이에는 자식이 없었던지라 후궁 인빈 김씨의 아들인 신성군이 차기 국왕으로 유력했다. 임진왜란 때 의인왕후 대신 인빈김씨와 신성군을 데리고 몽진했던 것을 보아도 선조의 마음이 어디 있는가를 알 수 있었다. 하지만 그것이 오히려 독이 되었으니 여독(旅毒)에 시달리던 신성군은 의주에서 15세를 일기로 생을 마감했다. 그러자 대신해 광해군이 부각됐다. 광해군은 어미인 공빈 김씨가 일찍 죽어 뒷배가 없었고 서열상으로도 형 임해군에 밀렸으나, 임진왜란 중 분조(分朝)를 성공적으로 이끈 지도력을 인정받아 큰 무리 없이 세자가 되었다. 광해군은 세자로 책봉된 후 아내 유씨와 함께 궁으로 들어갔고 배오개 집은 빈 집이 되었다. 이후 배오개 집은 광해군의 생모 공빈김씨의 사당으로 변모했으나 1623년 인조반정 후에는 인조가 제 어머니 연주부부인 구씨의 사저로 주었고 이때 이름이 계운궁(啓運宮)으로 바뀌었다. 세월이 지나 이 집은 다시 숙종의 후궁 숙의최씨(동이)의 저택이 되었다.
좋았어!
정조 즉위 후 이현궁 자리에는 장용영이 설치됐다. 정조는 집권 후 장용영 군인의 수를 꾸준히 늘려 나중에는 그 수가 무려 2만여 명에 이르렀는데, 외영은 수원 화성에, 내영은 이곳 이현궁 자리에 본영을 두었다. 따라서 그 면적이 적지 않았을 것임을 짐작할 수 있다. 구한말을 근거로 말하자면 면적이 대략 31,551㎡(9,544평) 정도로, 지금의 서울특별시 선거관리본부, 경찰공제회, 혜화경찰서 등의 관공서 부지 및 효성쥬얼리시티, 인의빌딩, 종로플레이스 건물 등이 전부 장용영에 속했다.
당시의 장용영을 그린 그림
광해군의 업적은 뭐니 뭐니 해도 등거리 실리 외교이다. 1616년 만주 한 구석에서 후금이란 나라를 세운 여진족은 점점 힘을 키워 500년 전 조상의 나라 금나라가 그랬던 것처럼 중원을 공격한다. 그리하여 1618년 만리장성을 향해 파죽의 지세로 공격해 오자 급박해진 명나라는 조선에 파병을 요청했다. 약소국으로서 대국의 명령을 거부할 수 없었던 광해군은 도원수 강홍립을 사령관으로 하는 1만여 명의 조선군을 파견하는데, 그는 이때 강홍립에게 은밀히 이렇게 말했다.
"형세를 봐 행동을 결정하라.(觀形向背)"
도원수 강홍립은 광해군의 명령대로 행동했다. 사르후(隆爾滸) 전투에서 전세가 불리해지자 도원수 강홍립이 군사들과 함께 항복한 것이다. 그러면서 강홍립은 명나라의 요청으로 어쩔 수 없이 참전하게 된 사정을 고했고, 이로 인해 조선군은 무사히 귀국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인조반정을 일으킨 자들의 생각은 달랐던 바, 반정의 명분 중 하나로 든 것이 명나라에 대한 광해군의 배은망덕이었다.
"우리는 임진왜란 때 원군을 보내 나라를 다시 일으켜 세워준 중국의 은혜를 영원토록 잊어서는 안 된다. 그러나 광해는 천자의 명을 두려워하지 않고 명나라를 배반하고 오랑캐와 화친했다. 예의의 나라인 우리 삼한(三韓)을 금수의 나라로 만든 광해를 응징해야 한다."
사르후의 위치와 조선군의 참전로김후신이 그린 파진대적도(擺陳對賊圖) / 조선군(오른쪽)과 후금군의 심하(深河) 유역에서의 첫 만남이다.김후신이 그린 양수투항도(兩帥投降圖) / 강홍립이 조선군을 이끌고 청태조 누르하치에게 항복하는 광경을 그렸다.
놀랍게도 인조반정을 일으킨 자들의 생각은 작년 12월 윤석열 대통령 탄핵소추안의 명분과 같다. 작년 12월 3일 더불어민주당·조국혁신당·개혁신당·진보당·기본소득당·사회민주당 등 야 6당이 공동 발의한 윤 대통령의 1차 탄핵소추안에는 외교분야 평가에 대한 다음과 같은 내용이 명시돼 있었다.
"소위 가치외교라는 미명 하에 지정학적 균형을 도외시한 채 북한과 중국, 러시아를 적대시하고, 일본 중심의 기이한 외교정책을 고집하며 일본에 경도된 인사를 정부 주요 직위에 임명하는 등의 정책을 펼침으로써 동북아에서 고립을 자초하고 전쟁의 위기를 촉발시켜 국가 안보와 국민 보호 의무를 내팽개쳐 왔다."
요지인즉, 북한 · 중국 · 러시아를 적대시하고 한 · 미 · 일 협력 외교노선을 구축했다는 것이 탄핵사유라는 것이다. (이 대목은 조국혁신당의 탄핵소추안을 그대로 실은 것이다. 누가 썼는지도 알지만 모두 아실 것 같기에 굳이 언급은 피하겠다) 하지만 이 내용은 국회에 제출된 2차 탄핵소추안에서는 삭제됐다.
작년 12월 4일 윤석열 대통령 탄핵소추안을 제출하는 야6당 / 오른쪽부터 김용민 더불어민주당 의원, 한창민 사회민주당 대표, 용혜인 기본소득당 대표, 윤종오 진보당 원내대표, 신장식 조국혁신당 의원, 천하람 개혁신당 원내대표, 이주영 개혁신당 의원
더불어민주당·조국혁신당·개혁신당·진보당·기본소득당·사회민주당 등 야 6당이 공동 발의한 윤 대통령의 2차 탄핵소추안에서 외교정책에 대한 평가내용이 제외된 이유는 불법도 아닌, 대통령 고유 권한에 따른 정무적 판단의 외교·안보 사안까지 탄핵 사유에 포함시킨 것은 무리수라는 비판이 쏟아진 까닭이었다. 삭제를 했지만 의도는 알 수 있었다. 1차 탄핵소추안에서 감히(?) 미국을 넣지 못하고 만만한(?) 일본만 넣었지만, 의도는 뻔한 것이었다. 또한 미국을 넣든 빼든 한 · 미 · 일 협력 외교노선은 탄핵감이라는 의도는 충분히 전달되었던 바, 중국은 2차 탄핵소추안에서 외교 관련 문단이 사라진 것에 대해 불만을 표했다. 그래서 중국 측은 복수의 비공식 채널을 통해 야당 측에 문구 삭제 이유에 대해 항의성의 문의를 했다. 중국 신화통신의 자매지인 <참고소식>은 윤 대통령의 탄핵 사유로 '구중친일(仇中親日, 중국을 미워하고 일본을 가까이하다)'이 명시됐다고 보도한 바 있는데, 이후 2차 탄핵소추안에서 해당 문구가 삭제되자 미국을 포함한 주변국 변수가 작동됐는지 눈깔 크게 뜨고 살펴본 것으로 알려졌다. 미국 측에서도 당연히 불만을 나타냈다. 미국 측은 여러 채널을 통해 야당들이 한미관계 및 한 · 미 · 일 협력을 탄핵 사유로 명시할 만큼 반대하는 것이냐고 물었고, 해리 해리스 전 주한 미국대사를 포함한 여러 인사가 강한 우려를 표명했다. 필립 골드버그 주한 미국대사는 예정돼 있던 이재명 민주당 대표와의 만남을 취소하기도 했다. 이처럼 외교 관련 논란이 일파만파 커지자 야당은 급하게 수습에 나섰다. 위성락 민주당 의원은 2차 탄핵소추안에 해당 문구가 빠지게 된 이유에 대해 미국과 일본 측에 자세히 설명했다. 그는 당초 1차 탄핵소추안은 조국혁신당이 작성한 것으로, 비상계엄 직후 급하게 탄핵을 추진했기 때문에 외교 관련 문구가 삭제되지 못한 것이라고 변명했다.
작년 10월 여의도 국회 소통관에서 국가안보상황점검위원회 3차 회의 관련 기자회견을 하고 있는 위성락과 박선원(왼쪽)
이렇듯 과정에서는 삭제되었지만,1차 탄핵소추안에 실린 의도는 윤 대통령이 탄핵되고 정권이 바뀌자 현실화되었다. 그리고 그 결과는 매우 나쁜 쪽으로 흘러가고 있으니, 광해군 탄핵 후 정묘호란이 일어나고 병자호란이 일어났던 것만큼 힘든 상황이다.
과거에는 명나라만을 존중하고 후금(청)은 오랑캐라고 개무시하며 까불다 된통 당한 것이고, 지금은 중화인민공화국만을 받들고 (더러는 북한을 받드는 놈도 있지만) 미국은 오랑캐 점령군이라 폄훼하다 당하는 중이다. 안타까운 것은 병자호란 때는 그 고통이 관민(官民)에 고루 미쳤지만 지금은 백성들만 죽어나게 될 것이라는 점이다.
어디...?탄핵 선고 즈음해 봉쇄된 헌법재판소 길이다.광해군의 영욕을 지켜봤을 이현궁 은행나무수령 500년, 수고 17미터이다.남한산성의 이 나무들도 인조의 영욕을 목도했을까?이현궁 길 건너 동순라길이 보인다.조선시대 순라군들이 돌던 길이다.동순라길은 종묘 앞으로 이어진다.종묘어정 / 문 앞쪽에 임금이 마시던 우물이 있다우물 옆 돌거북앙부일구 대석 / 아래와 같은 공공 해시계가 놓여졌던 곳이나 중종 시대 어떤 놈이 훔쳐간 후 다시 설치되지 않았다.경복궁 사정전 앞 앙부일구앙부일구 대석 앞 하마비하마비와 종묘전교1906년 찍은 종묘전교종묘전교 / 종묘 앞 다리라는 뜻이다. 조선시대 종묘의 앞길에는 폭 4.5m의 회동천이 흘렀다. 따라서 왕의 종묘 행차를 위해 다리가 필요했고, 임금의 가마가 지나가야 했으므로 다리 폭이 다른 다리의 평균 폭 4m보다 넓은 6m로 조성됐다.2008년 종묘 앞 광장 발굴 중 종묘전교의 유구가 발견됐다. / 일제강점기 하수도 정비 과정에서 매몰된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