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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아오지 못한 황제의 밀사 이준토박이가 부르는 서울야곡 2025. 10. 23. 23:08
헤이그 밀사 이준은 우리가 매우 잘 아는 위인이다. 혹시라도 모르는 분이 계실까, 노파심에 간단한 프로필을 언급하자면 다음과 같은데, 사실 간단히 쓰기는 매우 어렵다. 그의 삶 자체가 워낙 드라마틱하기 때문이다. 아무튼 최대한 축약해 보겠다.
이준(李儁)은 1859년(철종 9년) 함경남도 북청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전주이다. 족보를 거슬러 올라가자면 그는 태조 이성계의 이복형이었던 완풍대군 이원계의 후손으로, 그와 같은 연유로 젊어서는 순릉(純陵)의 능참봉(종9품)을 지냈다. 순릉은 조선 도조(度組, 추존) 이춘의 아내 경순왕후(추촌)의 능묘로, 함흥에 있다. 도조 이춘은 태조 이성계의 할아버지로 이때부터 함흥에 거주하게 되는데, '용비어천가'에 자주 등장하는 인물이라 아주 생소하지는 않다.

함흥 의릉(義陵) / 도조 이춘의 무덤이다. 부인 경순왕후의 순릉(純陵)도 가까이 있으나 사진은 전해지지 않는다. 
순릉 능참봉 시절의 이준 이준은 5살 되던 1863년 양친을 모두 잃고 조부 이명섭의 휘하에서 자라다가 다시 숙부 이병하에 의해 양육되었다. 앞서 말한 대로 그는 순릉의 능참봉을 지내다가 29세에 함경도 향시에서 장원급제한 후 교육사업에 뜻을 두고 고향 북천에 작은 학교를 세웠다. 이때 한경도관찰사였던 조병식이 도와줘 약 2천 평 가량의 토지를 학원부지로 매입할 수 있다고 하는데, 뜻밖이다. 조병식은 우리에게 일본에 대한 쌀수출을 금지한 1899년 방곡령(防穀令) 사건으로 익숙한 인물이나 실은 가렴주구를 일삼은 악덕 관리였다. 동학난을 촉발시킨 고부군수 조병식은 친족이다.

탐관오리 조병식(1823~1907) 이후 이준은 서울로 올라와 1893년 당시 이화학당 학생이던 이일정과 결혼했다. 그리고 그 신여성의 영향 때문인지 능참봉을 그만두고 1894년 갑오개혁 때 생긴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 법학교육기관인 법관양성소에 입학해 1회로 졸업했는데(1895년) 요즘으로 말하자면 로스쿨 1기생인 셈이다. 그의 입학에는 당시에 교류했던 박영효, 서광범 등이 영향을 미쳤다고 하며, 졸업 후 한성재판소 검사보로 임명되었다.

최초의 법원 한성재판소 / 의금부 건물을 함께 썼다. 
종각 전옥서 터에서 바라본 옛 한성재판소 자리 / SC제일은행 건물 자리에 한성재판소가 있었다. 1896년 검사시보 때부터 이준의 활약은 발군이었다. 이준은 왕족인 이재규가 친일 내각과 협잡하여 논밭 문서를 위조하고 백성들의 토지를 강탈하자 기소하여 징역 10년을 구형하였다. 그러나 은사령이 내려지며 죄가 무효화되자 은사령 작성은 국법상 검사의 고유 권한임에도 법부(법무부)에서 임의로 은사 대상자를 결정한 것에 항의해 상관인 형사국장 김낙헌을 고소하였다. (검찰청 해체에도 아무런 말도 않는 요즘의 겁쟁이 검사들과 너무 대비된다)
법부는 부하가 상관을 고소했다는 이유로 이준을 체포했으나, 애국계몽단체 등의 시민단체들과 백성들이 석방을 강력히 요구함에 따라 3일 만에 석방되었다. 이준은 석방되자 역으로 법부대신(법무부장관)과 재판장 이하 관리들을 기소하였다. 기소 사유는 관리들의 독직(瀆職)으로서, 그들에 대한 면직으로써 나라를 현장을 바로잡고 국민의 분원을 풀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이와 같은 기소가 받아들여질 리 없을 터, 오히려 이를 빌미로 검사에서 면직되었다. 임관 33일 만의 일이었다.

검사 시절의 이준 이후 그는 일본으로 건너가 와세다대학 법과에 입학해 근대법을 공부했다. 졸업 후에는 1899년 새롭게 바뀐 법제에 따라 신설된 최고재판부인 평리원(平理院)의 검사로 임용됐고, 1906년 6월에는 을사오적을 처단하려다가 투옥된 김인식, 나인영, 오기호, 기산도 등의 사건을 맡은 특별검사가 되었는데, 이준은 이들을 기소하지 않고 오히려 '황제의 은사'라는 사면권 형식을 이용해 방면시켜려 하였다. 친일파 법부대신 이하영은 당연히 반대했다.
그는 이번에는 법무부장관 이하영을 재판 간섭 혐의로 고소했다. 이하영에 대해 잠시 설명하자면, 빈한한 집안 출신으로서 어릴 적 부산 초량에서 일본인 상점 점원 노릇을 하며 일본어를 익혔다. 이후 점원으로 번 돈을 밑천 삼아 일본을 오가며 장사를 하다 나가사키에서 오는 배 안에서 만난 선교사 알렌 밑에 들어가 요리사로 일하며 영어를 배워 당시로서는 거의 유일한 3개 국어 가능자가 되었다.
이후 알렌이 제중원 원장 이후 조선의 이권에 관여하며 출세가도를 달리자 덩달아 요직에 올랐는데, 배운 바가 없어 한문으로 편지도 못 썼지만 일본어와 영어는 능통하였던 바, 주미공사관 서기관을 거쳐 대한제국의 법부대신과 외부대신(외무부장관)으로 입신했다. 아울러 국내에 미국식 철도 제도를 처음 도입한 인물로도 알려져 있는 바, 표면상으로는 입지전적 인물로도 비칠 수 있지만, 다만 말만 잘할 뿐 민족정신 따위는 1도 없는 개새끼였다.

자작 시절의 이하영(1858~1929) 이준은 이하영과 싸우면서 민족운동에도 매진하였던 바, 당시 전국적으로 확산되던 일본에 대한 국채보상운동에 부인 이일정과 함께 나섰다. 이준은 국채보상연합회의소 소장을 맡아 모금운동을 적극적으로 이끌었고, 이일정 역시 국채보상부인회를 설립해 남편을 지원했는데, 1907년의 어느날 갑자기 고종황제로부터 은밀한 전갈이 당도했다.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열리는 만국평화회의에 참석해 일본의 침탈을 받고 있는 대한제국의 현실과, 부당하게 외교권을 빼앗긴 사실을 세계만방에 알리라는 것이었다.

이준이 국채보상연합회의소장으로서 보낸 공문서. / 의연금을 많이 모은 고령군의무소의 활동을 치하하고, 고액기부자의 이름과 액수를 일러 달라는 내용이 담겨있다. 
이준이 고종으로부터 받은 임명장 이준은 1907년 4월 22일 서울역을 출발, 부산항을 거쳐 블라디보스토크로 가서 이상설과 합류하고, 시베리아 횡단 철도를 타고 상트페테르부르크로 가 이위종과 합류했다. 이준과 이상설은 러시어어에 능통한 이위종의 도움을 받아 지원을 요청하는 호소문을 러시아어 로 번역해 제2회 만국평화회의 의장국인 러시아에 제출하고 지지를 요청했으나 적극적으로 도와주겠다는 처음의 약속과 달리 별다른 응답이 없었다. 결국 일행은 직접 회의에 참가해 호소하기로 마음 먹고 6월 19일 상트페테르부르크를 떠나 베를린으로 향했다.

밀사의 힘든 여정 베를린에서 문서 인쇄작업을 거친 특사단은 6월 25일 개최지인 네덜란드 헤이그에 도착했다. 이어 6월 28일 회담장 앞에서 베를린에서 인쇄한 호소문과 문서들을 일본을 제외한 회의 참가국 40여국 의원들에게 배포했다. 의장인 러시아 넬리도프 백작은 문서를 받고 특사단과 네덜란드 정부의 접견을 주선해 주었으나 네덜란드 정부는 을사늑약은 이미 각국 정부에서 승인된 것이므로 무효화할 수 없으며 따라서 대한제국에는 외교권이 없으므로 회의 참석이 불가능하다는 회신을 보내왔다.

만국평화회의가 열렸던 헤이그 비덴호프(국회의사당) / 1899년 1차 회의에는 26개국이, 1907년에는 44개국이 모여 군비축소와 국제평화 유지를 협의했다. 
당시의 회의장 광경 헤이그 만국평화회담에 참석해 일본의 불법적인 침탈을 호소하려 했던 이준·이상설·이위종 3인 밀사들의 계획은 그렇게 좌절됐다. 하지만 이위종은 회의장 앞에서 각국 기자들에게 호소문의 내용을 담은 일장 연설을 영어와 프랑스어로 했는데, 거기에는 놀랍게도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었다. (1896~1899년 주미공사였던 이범진의 아들 이위종은 어릴 때부터 영어에 능통하고 똑똑해 언어가 달리는 아버지의 비서 역할을 했다고 하는데, 그밖에도 프랑스어, 러시아어에도 능통했다)
우리 조선인들은 옛 정권의 잔인한 행정과 탐학과 부패에 지쳐 있었던지라 일본인들을 기대를 가지고 맞이했다 (We, the people of Korea, who had been tired of the corruption, exaction and cruel administration of the old Government, received the Japanese with sympathy and hope) 우리 백성들은 일본이 부패한 관리들에게 엄격한 잣대를 적용해 백성에게 정의를 구현해 주리라고 믿었으나 일본은 그런 신뢰를 배반하고 오직 자신의 이익만을 위해 조선을 불법적으로 병탄하려 하고 있다.
1907년 7월 5일 '만국평화회의보' 1면에 실린 헤이그 특사들 / 사진은 이준, 이상설, 이위종의 순이다. 
1907년 8월 22일 자 미국 '인디펜던트' 지에 실린 호소문 A Plea for Korea / 옛 정권의 잔인한 행정과 탐학과 부패에 지쳐 있었다는 이위종의 발언이 실려 있다. (색칠한 부분) 일반적 상식과 달리, 당시 조선인들은 일본에 대해 기대를 갖고서 그들의 조선 상륙을 내심 환영했다는 소리다. 얼마나 조선 정부가 백성들에게 가혹했는지는 알 수 있는 대목인데, 일본도 이에 못지않았다는 것이다. 이준은 마지막 희망으로서 외국 기자들에게 준비한 호소문을 배포하였다. 그리고 숙소인 '드 용 호텔'(De Jong Hotel)로 돌아와 지친 몸을 침대에 뉘었다. 그리고 이후 다시 일어나지 못했다. 오랜 여행에서 얻은 심신의 피로와 뺨에 생긴 종기로부터 비롯된 병원균 감염이 사인이었다. (한때 항간에 퍼졌던 자살설 및 일제에 의해 독살설은 사실이 아니다)

이준이 숨진 드 용 호텔의 침대와 호텔방 벽이 헤이그 이준열사기념관 2층에 당시 모습 대로 재현됐다. 
최초에 묻힌 헤이그 공원묘지의 무덤이 수유동 묘소에 재현됐다. 
이준은 순국 사흘 후 헤이그 공동 묘지에 안장되었다. / 그럼에도 조선 통감부에서는 이미 세상을 떠난 이준에게 궐석재판을 통해 종신형을 선고했다. 표석은 "죽어도 죽지 아니함이 있고 살아도 살지 아니함이 있다"고 한 이준 생전의 말을 새긴 것이다. 
묘소 입구의 안내문 / 이준의 유해는 순국 56년 후인 1963년 고국으로 돌아왔다. 
이준 열사 묘소 / 부인 이일정과의 합장묘이다. 
묘소 왼쪽의 고종 신임장과 '순국대절'이라고 쓴 박정희의 휘호 
이건 또 뭔 상황? / 왼쪽 벽에는 조선감국대신(사실상의 조선총독)을 지낸 위안스카이의 글이 새겨졌다. 
묘표 우리가 무심코 지나치는 곳이지만, 종로구 안국동 152번지 부근, 건물과 건물 사이 한 평 남짓한 좁고 절묘한 공간에 이준 선생 집터를 알리는 푯돌이 있다. 집터는 지하철 3호선 안국역 1번 출구로 나와 서울듀크의원, 안국동우체국, 안국동 빵집, 이 세 건물을 차례로 지나면 만날 수 있지만 그래도 눈을 크게 뜨고 봐야 보인다. 민족문화연구소가 헤이그 특사 110주년을 맞아 지난 2017년 세운 것이다.
다년간의 조사 끝에 이준 열사의 집터를 확인한 민족문화연구소는 종로구청을 통해 표석신설 신청서를 제출하였고 서울시 문화재위원회 표석분과의 심의를 거쳐 표석이 세워졌다. 이 자리가 1907년 헤이그 특사의 출발지였다는 사실과 더불어 이준의 아내 이일정이 우리나라 최초의 부인상회를 개설하여 운영했던 곳이라는 공간적 의미를 모두 고려된 결정이었다고 한다. 혹시라도 지나게 되면 한번 쯤 고개를 돌려 살펴볼 일이다.

이준 열사 집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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