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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장희빈과 정치보복의 굴레
    토박이가 부르는 서울야곡 2025. 10. 29. 00:21

     

    장희빈이 살았다 전해지는 서울 종로구 원서동은 조선시대 궁에 의지해 생활하던 하급 관리나 궁녀들이 많이 기거했다고 한다. 하지만 고향은 아니다. 그녀가 태어나 자란 곳은 은평구 불광동으로 그녀의 친정이 있던 관동 마을에는 어수정(御水井)이라는 지명이 남아 있다. 관동(館洞)은 은평구립도서관 아래의 동네 이름이며 장희빈이 입궁한 후 관가 사람들이 자주 왕래하였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분위기 있는 동네 관동마을

     

    장희빈 생가는 지금은 폐교된 은혜초등학교 후문 근처에 있었다고 전해지나 자취가 남아 있지는 않다. 다만 산비탈로 한참을 올라가야 하는 곳이니 장옥정(장희빈, 1659~1701)의 집이 산골짜기에 자리잡았음을 알 수 있다. 장옥정의 아비 장형(張烱, 1623~1669)은 역관(譯官)이었다고 하는데 왜 이리 궁벽한 곳에 살았을까? 그녀의 숙부 장현(張炫)은 <숙종실록>에 '국중(國中)의 거부(巨富)'였다고 기록될 정도인데 말이다. 정답은 아마도 서녀(庶女)이기 때문일 것이다.

     

    즉 장옥정은 첩의 딸로서 태어난 것인데, 아비 장형은 딸이 왕비가 되자 옥산부원군(玉山府院君)에 추숭됐고, 현역 역관이던 장현은 수역(首譯, 역관의 우두머리)이 되고 종1품 숭록대부(崇祿大夫)에까지 오르며 거부가 될 수 있었다. 런데 장옥정은 어떻게 빈한(貧寒)한 첩의 자식에서 정1품 희빈의 자리를 너머 왕비까지 될 수 있었을까? 그 역시 <숙종실록>에 답이 있다. 그녀는 '용모가 아름답다'(頗有容色)고 실록에 기록된 유일무이한 여성이다. 그만큼 훌륭한 무기를 장착했던 것이었다. 

     

     

    관동마을에서 은혜초교 후문 가는 길
    옆으로 난 골목으로 가면 정문을 만난다.
    지금은 폐교된 은혜초교
    인근의 가게들도 덩달아 문을 닫았다.

     

    그녀는 어릴 적부터 빼어난 미모로 이름이 높았다고 한다. 이에 궁녀로서 궁에 들어가기는 어렵지 않았지만 사대부의 자식이 아닌 탓에 후궁이나 왕비를 바라볼 수는 없었다. 하지만 타고난 미모와 끼로 왕의 마음을 빼앗았으니 21살 초절정의 아름다움을 뿜어내던 옥정에 숙종의 마음은 녹아내렸다. 장옥정은 두 살 아래의 숙종을 쥐락펴락했다. 다만 모든 것이 형통한 것은 아니었으니, 숙종의 어머니 명성왕후의 눈에는 들지 않았다.

     

    명성왕후가 누구인가? 그는 지아비 현종이 후궁을 두지 못하게 만들어 조선왕조 최고의 공처가 왕으로 등극시킨 센캐가 아니던가? 그의 눈에는 궁중 나인 장옥정이 그저 제 아들을 홀리는 요부(妖婦)로밖에 비쳐지지 않았던 바, "성품이 극악(劇惡)하며 임금이 꾐을 받을 수 있다"는 이유를 들어 궁밖으로 내쫓았다. 센캐끼리의 충돌이긴 했으나 아직은 장옥정이 명성왕후의 상대가 될 수 없었다. 

     

    앞서 따로 말한 바 있지만, 쫓겨난 옥정은 친정인 관동으로 돌아가지 않았다. 체면치레가 심하고 자존심 강했던 그녀에게 친정행이란 쪽팔림을 넘어 죽음보다 못한 일이었다. '차라리 죽었으면 죽었지....' 그녀는 이런 생각 속에 창덕궁 밖 중인촌(中人村)인 원서동에 머물며 권토중래를 꿈꿨다. 원서동은 비원(秘苑, 창덕궁)의 서쪽에 있다 하여 일제강점기인 1936년 붙여진 이름이고 당시는 원동(園洞)이었다. 원동에는 창덕궁 안을 돌아 흐르던 소하천이 지나갔는데 수량 많았던 그 하천의 빨래터는 지금도 남아 있다. 

     

     

    지금도 맑은 물이 흐르는 원서동 빨래터
    원서동 뻘래터 안내문
    빨래터 옆 외삼문 / 창덕궁에 딸린 외삼문이며, 왼쪽은 백홍범 가옥의 삼문이다.
    담장 너머로 보이는 건물이 백홍범 가옥이고, 유리건물과 오른쪽 중층 건물은 한샘 DBEW 디자인센터이다.
    백홍범 가옥은 1910년대에 지어진 것으로, 본래 상궁이 살던 집터라고 한다. 근래에 지은 양옥의 안채와 별채인 한식 목조기와집 한 채, 그리고 동남쪽에 있는 작은방 한 채로 구성되어 있다. 대지는 588.43㎡이고, 건평은 69.59㎡이다. 별채는 남쪽을 향해 있으며 대청마루와 건넌방이 있다.
    백홍범 가옥 안내문 / 서울시문화재로 지정될 당시 소유자 이름을 따 '원서동 백홍범 가옥'이라 부르게 되었다. 근래 보수하면서 일부 변한 것도 있으나 1910년대 한국 소형 가옥의 전형적인 요소를 비교적 잘 갖춘 집이라는 평을 듣는다. 들어가 볼 수는 없다.

     

    장옥정은 이곳 빨래터에서 담장 너머의 궁궐을 바라보며 돌아갈 날만을 기다렸을 것인데, 오매불망의 그날은 생각보다 빨리 왔다. 1686(숙종 12) 원수와 같았던 명성왕후가 죽었던 것이니, 이후 그녀는 다시 숙종의 부름을 받아 가마를 타고 궁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2년 후인 1688년 10월 드디어 왕자(조선 20대 왕 경종)를 생산하였던 바, 지금의 어떤 여자처럼 왕에 버금가는 최고 권력자리에 올라 세상을 주무르게 되었다. 아래 글은 장옥정의 파워를 보여주는 일화이다. 

     

    숙종 14년(1688) 11월 21일. 한 민간인이 탄 옥교(屋轎, 지붕 있는 8인이 메는 큰가마)가 궐 문을 들어섰다. 옥교에 탄 여인은 10월 27일 숙종이 바라던 왕자를 낳은 후궁 장씨의 모친 윤씨였다. 그를 알아본 사헌부 관리 지평(사헌부 정5품 관직) 이익수는 당장 금리(禁吏)와 조례(관아 노비)로 하여금 윤씨를 끌어내리게 한 후 옥교를 멨던 노비들을 처벌했다. 그러자 화가 난 숙종은 역으로 그들을 처벌하였던 바, 혹독한 형신을 받은 금리와 조례는 귀양을 가기 위해 옥문을 나섰다가 쓰러져 죽고 말았다.

     

     

    장옥정의 모친이 드나들었을 창덕궁 쪽문
    쪽문에서 본 원서동 풍경
    쪽문 맞은편의 금위영 서영(西營) 터 표석 / 장옥정의 오빠 장희재가 정3품 내금위장을 지내는데, 장옥정의 입궁 이전 이미 무과에 급제해서 숙종 6년 금위영에 재직 중이었다.

     

    1689년 1월, 숙종은 숙원장씨(장옥정)가 낳은 아기를 원자(元子, 왕의 적장자)로 삼았다. 그리고 이에 반대하는 서인들을 정권에서 내몰고 남인들을 대거 등용하였다. 1689년 2월 2일에 단행된 이른바 기사환국(己巳換局)이다. 숙종의 서슬이 얼마나 퍼랬는지, 그는 원자(元子)의 정호(定號)를 반대해 제주도에 유배 보냈던 송시열을 서울로 다시 불려 올려 국문코자 했다가 당도가 더디자 아예 사약을 내려보내 죽여버렸다. 서울로 올라오던 송시열은 그해 6월 전라도 정읍에서 사약을 받고 죽었다. 

     

     

    제주시 오현단 비 / 제주도에 정배됐던 5명의 유학자를 모셨다.
    오현단 송시열의 '해중유감' 시 / "한 마디 말이 무슨 큰 죄일까, 외로운 충정에 눈물만이 흐른다"는 내용이 쓰여 있다.
    오현단 송시열 유허비

     

    숙원장씨가 낳은 자식으로 원자를 봉한 숙종은 숙원장씨를 정1품 빈(嬪)에 올렸고, 원자의 외조부인 장형을 정1품 영의정에, 장형의 아버지 장응인을 정1품 우의정에, 장형의 할아버지 장수를 정1품 좌의정으로 각각 추증하였다. 희빈장씨의 선조 3대에게 모두 정승을 추증한 것이었는데, 유사 이래 용례가 드문 일이었다. 이어 송시열의 추천으로 왕비가 된 숙종의 계비 인현왕후 민씨를 끝내 폐출시키고 희빈장씨를 왕비로 책봉할 것을 선포하였다. 

     

     

    폐위된 인현왕후가 6년간 칩거했던 곳 / 인현왕후는 왕비가 된 후 친정을 위해 이곳 덕성여고 자리에 대저택을 지었으나 자신이 이곳에 유폐될 줄은 꿈에도 몰랐을 것이다.
    덕성여고 정문 앞의 감고당터 표석 / 영조는 이 저택에 '고통을 감내한 집'이라는 의미로 '감고당'이라는 현판을 하사하였다.

     

    기사환국으로 재집권에 성공한 남인들은 서인들에 대한 보복에 나섰다. 10년 전 경신환국 때 당한 정치보복의 앙갚음이었다. 과거 경신환국 때 윤휴(尹鑴)가 사문난적으로 몰려 처형된 이야기는 유명하다. 이후 100여 명이 넘는 남인이 갖가지 죄목으로 처벌되었다. 이번에는 그 피바람이 서인에게 불어닥쳤던 바, 오두인·박태보는 국문 끝에 사망하고 수십 명의 정치인들이 귀양을 갔다. 10년 전 우여곡절 끝에 성균관 문묘에 올랐던 이이(李珥)와 성혼(成渾)은 다시 축출되었다. 서인 출신이라는 것이 이유였다.

     

    서인은 숨 죽일 수밖에 없었지만 그렇다고 가만히 당하지만은 않았다. 서인에 속한 노론에서는 숙종의 장인인 광성부원군 김춘택이 은밀히 환국(換局) 모의를 주도했고, 소론에서는 승지 한구(韓構)의 아들 한중혁이 나섰다. 소론에 속한 글쟁이 김만중은 한글 소설 <사씨남정기(謝氏南征記)>를 지어 민심을 교란시켰다. <사씨남정기>의 주인공인 착한 사씨(사정옥)는 인현왕후를, 사씨를 내쫓는 악독한 첩 교씨(교채란)는 희빈장씨을, 교씨에게 휘둘리는 무능한 남편 유연수는 숙종을 모델로 했으며, 무대는 명나라 중기의 중국 금릉(난징)이다.

     

     

    김만중의 소설 <사씨남정기>

     

    이런 노력이 효과를 보았는지 어느 날 상황이 재역전됐다. 일은 장옥정의 오빠 포도대장 장희재(張希載)가 당시 숙종이 새롭게 마음을 연 숙빈최씨를 독살하려는 사건으로부터 시작되었다. 숙종은 숙빈최씨에 대한 독살설과 더불어 퍼진 남인의 역모설에 빡쳤고 이에 다시 환국을 단행하였다.

     

    1694년(숙종 20) 4월 1일에 발생한 이른바 갑술환국(甲戌換局)이었다. 남인들은 기사환국 당시 처벌받은 서인보다 더 많은 수가 처벌받았던 바, 우의정 민암과 아들 민종도, 이의징·조사기·노이익과 왕비 장씨와 가까웠던 궁녀 정숙 등 14명이 사형당했고 무려 67명이 유배되었다. 기타 헤아릴 수 없을 정도의 많은 사람이 이런 저런 죄가 씌워져 처벌받았다. 정권이 바뀌면 행해지는 정치보복은 그때나 지금이나 다름이 없다. 

     

    왕비 장씨는 다시 희빈으로 강등되고 폐비되었던 인현왕후 민씨는 복위되어 왕비가 되었다. 인현왕후는 그로부터 7년 후인 1701년 34살의 젊은 나이로 소생 없이 세상을 뜨는데, 그의 죽음에 장옥정이 저주가 일익을 했다 하여 희빈장씨 역시 인현왕후가 죽은 그해 사약을 받고 죽었다.

     

     

    장옥정의 무덤인 서오릉 대빈묘
    장옥정의 사당인 칠궁의 대빈궁 / 장옥정의 신위는 종묘에 배향되지 못하고 청와대 옆 칠궁에 모셔졌다.

     

    갑술환국으로 영의정에는 남구만이, 좌의정에는 박세채가, 우의정에는 윤지완이 올랐는데, 남구만은 처형 주장이 비등했던 희빈장씨의 오빠 장희재를 세자의 외숙임을 생각해 목숨을 살리는 등, 정치보복 속에서도 관용을 보였다. 여담으로 말하자면 남구만의 11세 손이 개그맨 남희석이다.

     

    반면 탕평책에 관해 쓴 <황극탕평론>의 저자이자 온건주의자로 알려진 좌의정 박세채는 의외로 장희재에 대한 참형을 주장하였던 바, 1701년 8월 희빈장씨가 사사된 얼마 후 참수되었다. 정치란 참 알 수 없다. 다시 여담을 덧붙이자면 장옥정의 집안은 모두 미남 미녀였다고 하는데, 탤런트 장동건이 장희재의 직계 후손이라고 한다. 잘생김 DNA가 이어진 모양이다. 

     

     

    박세채가 살던 마포구 현석동 밤섬현대아파트 부근 정자
    마포구 현석동 밤섬현대아파트 입구 박세채 집 터 표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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