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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천의 추사 김정희와 벼루 10개를 맞창낸 열정잘 알려지지 않은 흥미로운 역사 이야기 2025. 8. 30. 18:14
추사 김정희의 경주김문 상촌공파 가계는 자못 복잡·화려하다. 추사의 증조할아버지 김한신은 영조 임금의 부마로 1732년(영조 8) 영조의 서장녀 화순옹주와 결혼했다. 두 사람은 1720년생 동갑내기로 금슬도 매우 좋았다. 그런데 1758년 김한신이 또라이 장헌세자(=사도세자)와 말다툼을 벌이다 벼루를 머리에 맞고 죽었다. 그의 나이 38세였다. 격분한 화순옹주는 자학으로 복수하고자 단식에 들어갔고 14일 만에 세상을 떠났다.
더욱 불행히도 두 사람 사이에는 애도 없었다. 이에 감한신의 조카 김이주(?~1797)가 양자로 대를 이었는데, 외조부인 영조 덕분에 대사간, 대사헌, 형조판서로 이어지는 높은 벼슬을 지냈다. 김이주는 다복하여 장남 김노영, 삼남 김노경 등의 네 아들을 두었다. 그런데 그의 장남 김노영은 후사를 생산하지 못했던 바, 1793년 동생 김노경의 아들인 8살 김정희를 양자로 들여 대를 잇게 했다. 이에 추사는 왕족의 외장손이 되었다.

추사 김정희의 가계도 추사의 집안은 한때 영조의 계비 정순왕후(추사의 12촌 고모)를 주축으로 노론 벽파를 이끄는 세도가문으로 군림했다. 추사는 1819년(순조 19) 문과 합격 후 병조참판에까지 올랐고, 순조의 아들 효명세자를 가르치는 필선이 되었다. 그러나 1830년 효명세자가 급서하자 안동김문이 다시 발호하였고 김노경 부자는 숙청되어 유배를 갔다. 이에 관한 스토리는 '제주의 추사 김정희와 위작 '추수백운도'에서 다룬 바 있다.
제주 귀양살이에서 9년만에 돌아온 추사는 복권되어 관직에 나갔으나 또다시 유배를 가야 할 운명에 처해졌다. 그가 2차 유배를 간 때은 1851년(철종 2)으로 당시 나이 예순일곱 살이었다. 이유는 사도세자의 이복형 진종(眞宗, 효장세자)의 위패를 옮기는 문제, 이른바 진종조례론(眞宗祧禮論)에서 친구이자 영의정인 권돈인을 편들다 재차 안동김문에 밉보였기 때문이었다. 두 번째 유배지는 함경도 북청으로, 추사의 북청 생활에 관해서는 '한국 최초의 고고학자 김정희와 황초령 비'에서 자세히 다루었다.

함경남도 황초령 진흥왕순수비 보호각 / 비각 안에 추사가 고증한 황초령비가 보인다. 
오른쪽이 황초령비, 가운데는 글씨를 옮겨 새긴 모사비, 왼쪽은 황초령비에 관한 사적비로, 사진은 1910년대에 촬영됐다. 
추사가 쓴 '진흥북수고경' 현판의 탁본 
'사야' / '진흥북수고경'과 같은 서법이라 북청 유배에서 풀려나던 67세 무렵 쓴 글씨로 추정돤다. 추사는 1852년 8월 13일 북청 유배에서 풀려났으나 더 이상 관직에 나아가지 않고 과천 과지초당(瓜地草堂)에 머물렀다. 과지초당은 1824년 한성판윤(서울시장)이었던 추사의 생부 김노경이 과천에 마련한 별서이다. 별서를 마련함은 고금(古今)의 로망인 듯, 김노경이 그해 청나라 학자 등전밀(1795~1870)에게 보낸 편지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담겨 있다.
"노쇠한 데다 병까지 찾아와 의지가 갈수록 약화됨에도 직무는 여전히 번잡해 날마다 문서에 파묻혀 살고 있습니다. 다만 최근에 서울 가까운 곳에 집터를 구해 조그만 집 한 채를 마련한 후 그런대로 정원과 연못의 풍모를 꾸려 갖췄습니다. 연못을 바라보는 위치에 몇 칸을 집을 지어 '과지초당'이라 이름하였는데, 봄가을 휴가 때 찾아 아취를 느낄만하며 자못 친구들에게도 자랑할 만합니다."

과지초당 현판 / 과천시가 2007년 과지초당을 복원할 때, 가산(佳山) 최영환이 쓰고, 이조(里朝) 임만선이 판각했다. 과지초당은 '오이밭의 초가집'이라는 뜻이다. 
과지초당을 과천시가 추사로 44에 기와집으로 복원했으나 
본래는 이름 그대로 이 정도의 초가였을 것이다. 
이 집은 남양주 궁집 내에 복원된 중부 지방 가옥으로서 
문간채를 둔 상류층의 초가이다. 
2022년 이동원이 화백이 그린 과지초당 / 추사박물관 추사는 1837년(헌종 3) 김노경이 세상을 떠나자 부친을 이곳에서 가까운 주암동 옥녀봉에 모시고 과지초당에서 3년 동안 시묘살이를 했다. 이후에도 추사는 과지초당을 자주 찾았는데 1852년 10월 북청 유배지에서 돌아온 후에는 과천 정착을 결심한 듯 이곳을 찾아 '가을날 과지초당에 다시 오다(秋日重到瓜地草堂)'라는 시를 읊었다.
문을 나서니 가을이 정히 좋아,
스님과 더불어 애련함을 다시 견디어 내네.
가물가물한 삼봉의 빛은,
어언간 다섯 해 전이로세.
푸른 이끼 낡은 집에 그대로 늙어가고,
붉은 잎 점차 숲을 곱게 물들이네.
동서로 떠돈 적이 하도 오래라
산 속에 저문 연기 잠기어 가네.出門秋正好
携衲更堪憐
款款三峯色
依依五載前
靑苔仍屋老
赤葉漸林姸
飄泊西東久
山中銷暮煙
추사는 1856년 서거하기까지 만 4년간을 과지초당에서 지내며 마지막 예술혼을 불태웠다. 그는 이곳에서 후학을 가르치며 학문을 연마하다가 70세가 되던 1855년(철종6) 백파율사의 입적 소식을 듣고 친히 그의 비문을 쓰고 일생을 찬했다. 추사는 기본적으로 유학자였으나 불교사상에도 상당한 식견을 자랑하였으니, 1843년 순창 구암사의 고승 백파긍선(白坡亘璇)이 지은 <선문수경(禪文手鏡)>의 내용을 두고 오랜 기간 백파와 선(禪)에 관해 논쟁한 이야기는 유명하다.
백파와의 선논쟁(禪論爭)에 먼저 불을 지핀 사람은 추사의 오랜 지인 초의선사(草衣禪師)였다. 이때 추사는 초의의 편을 들어 백파의 주장을 반박함으로써 선논쟁은 조선후기 불교사에서 1백년 가까이 지속되었는데, 그럼에도 백파가 입적한 후 그의 제자들이 비문을 부탁하자 추사는 쾌히 수락하고 정성껏 비문을 지어주었다. 이 비문은 현재 선운사 부도밭에 있으며 추사 말년의 완숙함이 느껴진다.

'화엄종주 백파율사 대기대용지비'의 전면 
"우리나라에는 근래에 율사(律師)로서 일가를 이룬 이가 없었는데 오직 백파만이 여기에 해당할 수 있다"로 시작되는 후면. 
1842년 추사가 초의선사에게 보낸 편지 추사체의 예서로 쓴 유명한 대련 '大烹豆腐瓜薑菜 高會夫妻兒女孫'(대팽두부과강채 고회부처아녀손)을 쓴 것도 과천시절로(정확히는 서거 두 달 전) 그 판각이 위 과지초당에 주련으로 걸려 있다. '좋은 반찬은 두부 오이 생강나물이고, 훌륭한 모임은 부부와 아들딸 손자'라는 의미인데, 명나라 말 오종잠(1607~1686)이 쓴 <추석의 집안잔치(中秋家宴)> 중의 일부를 변용했다.
옆으로는 '이것이 촌로의 제일가는 즐거움이다'(此爲村夫子第一樂上樂)라는 첨구를 부기했는데, 전체 문장은 '이것은 촌로의 제일가는 즐거움이다. 비록 허리춤에 큰 황금도장을 차고 온갖 산해진미에 수백 시녀가 있다한들 능히 이런 맛을 누릴 사람이 몇이나 될까'(此爲村夫子第一樂上樂 雖腰間斗大黃金印 食前方丈侍妾數百 能享有此味者畿人爲)라는 문장이다. '오래된 농부(古農)'가 썼다고 되어 있다.

이 추사 대련은 보물로 지정됐다. 추사가 평생 얼마나 학문에 열정적이었던지는, 과천 시절 친구 권돈인에게 보낸 편지에서 드러난다. 거기에는 '칠십 년 마천십연 독진천호'(七十年 磨穿十硏 禿盡千毫)라는 말이 나온다. '70년 동안 벼루 열 개를 구멍 내고, 천 개의 붓을 몽당붓으로 만들었다"는 말이다. 자세한 내용은 아래와 같다.
옛사람의 편지 글에 간찰체(簡札體)라는 것이 따로 없습니다. <순화각첩(淳化閣帖)>에는 진(晉) 나라 사람의 글씨가 많지만 간찰체만을 위주로 하지 않았으니, 간찰체는 우리나라의 가장 나쁜 습속입니다. 제 글씨는 비록 말할 것도 못되지만, 일흔 해 동안에 열 개의 벼루를 갈아 구멍을 냈고 천 자루의 붓을 다 닳아 몽당붓이 되게 했습니다. 그러나 한 번도 간찰의 필법을 익힌 적이 없고, 실제 간찰에 별도의 체식(體式)이 있는 줄도 모르겠습니다. 그런데도 와서 요구하는 자들은 바로 간찰을 말하며 쓰여달라고 하니 그때마다 못한다고 거절하고 써주지 않았습니다. 특히 승려들이 간찰체에 심하게 집착하는데 그 연유를 알지 못하겠습니다.

그 유명한 편지글 
<완당법첩> / 김정희의 다양한 글씨체를 모은 첩 
권돈인 서첩 / 추사박물관 이 편지는 추사 생애의 마지막 해인 1856년, 지금의 강남 봉은사에 잠시 머물 때 쓴 글로서, 편자글 형식의 글을 원하는 봉은사 승려들의 무지을 탄식하는 과정에서 '칠십 년 마천십연 독진천호(七十年 磨穿十硏 禿盡千毫)'의 인생노정이 드러났다. 봉은사 경판고(庫)에 걸린 판전(板殿) 현판은 그가 세상을 떠나기 4일 전에 쓴 추사체 글씨로서 기대에는 미치지 못한다. 그 이유를 현판 왼쪽에 써 있는 71살 과천 늙은이가 병중에 쓴 작품(七十一歲果病中作)'이란 첨구로 알 수 있다.
※ <불교신문>에서는 판전 글씨에 대해 "추사가 마지막 순간에 심혈을 기울여 쓴 추사체의 완성이라 할 만큼의 중요한 유물'"라고 했고, 유홍준은 <완당평전>에서 "고졸(古拙)한 가운데 무심의 경지를 보여주는 명작"이라고 상찬했으나 over이다. 현판은 봉은사 승려들의 부탁에 기력이 없는 상태에서 겨우 써 준 듯하다.

판전 현판 / 서울 강남에서 만날 수 있는 추사의 글씨다. 
오래된 봉은사 판전 사진 이후 그는 과지초당에 돌아와 자리에 누웠고 3일 후 세상을 떠났다. 그의 죽기 전 마지막 모습을 본 상유현(尙有鉉, 1844~1923)이라는 천재 소년이 있다. 그는 자신이 쓴 <추사방현기(秋史訪見記)>에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방 가운데 노인 한 분이 앉아 계셨는데 신체가 단소(短小)하고 수염은 희기가 눈 같고 많지도 적지도 않았다. 눈동자는 밝기가 칠(漆)같이 빛났고, 중들이 머리에 쓰는 대나무로 엮은 둥근 모자를 썼으며 푸른 모시에 소매 넓은 두루마기를 걸치고 있었다. 늙었음에도 얼굴에는 젊은이처럼 붉은 기가 가득했으며, 팔은 얇고 손가락은 가늘어 섬세한 아녀자처럼 보였다. 손에는 한 궤의 염주를 쥐고 만지며 굴리고 있었는데, 여러 사람들이 배례(拜禮)를 하자 몸을 굽혀 답하였다. 나는 그가 추사 선생인 줄 가히 알 수 있었다."

과천 과지초당 앞의 추사 동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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