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BOUT ME

-

Today
-
Yesterday
-
Total
-
  • 추사 김정희가 석방되던 날
    잘 알려지지 않은 흥미로운 역사 이야기 2025. 8. 28. 23:58

     

    앞서도 말했지만 다산 정약용이 유배를 간 까닭은 정치적 사유가 아니라 천주교를 믿어서이다. 그의 4형제 중 배 다른 맏형 정약현을 제외한 약전, 약종, 약용 3형제는 천주교를 믿었고 1801년 신유사옥 때 체포되었다. 이중 정약종은 배교의 요구를 거부하고 꿋꿋이 버티다 결국 순교하였으나 정약전, 정약종은 배교하여 유배를 갔다.

     

    이중 정약전은 흑산도로 정배되었다. 그는 무료한 유배생활을 극복하기 위해 <현산어보(玆山漁譜)>라는 물고기를 비롯한 현지 생물을 조사한 책을 쓰고 현지 청소년들을 가르치며 상경할 날을 기다렸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끝내 그날은 오지 않았으니 1816년, 16년의 유배생활을 결국 죽음으로 마쳐야 했다.

     

     

    영화 '자산어보' 세트장으로 재현된 정약전의 유배처 '복성재'

     

    ※ 전에도 말했지만 <玆山魚譜>는 '자산어보'가 아닌 '현산어보'로 읽혀야 옳다. '玆'의 훈과 음은 '검을 현'으로 천자문의 3번째 글자 玄과 같다. 그는 자신이 유배생활을 한 흑산도(黑山島)의 지명을 따라 책의 제목을 <玆山魚譜>라 했던 것인데, 책 이름에 흑산(黑山)을 쓰지 않고 현산(玆山)이라고 한 이유에 대해 "흑산이라는 이름은 음침하고 어둡고 두려운 어감이어서 현산으로 바꿨다"고 서문에서 스스로 말한 바 있다.  

     

     

    <현산어보>

     

    정약용은 포항 장기현을 거쳐 강진으로 정배되었다. 그는 그곳에서 18년의 긴 유배기간을 보냈지만 중형(仲兄) 정약전과 달리 구명(求命)돼 고향인 남양주 마재로 돌아왔다. 죄인이 장기간의 형량을 극복하고 귀향하는 경우는 매우 드문 일로서,  모두가 궁금해하는 구명 이유가 2008년 <성도일록(成都日錄)>의 내용으로서 밝혀졌다. <성도일록>은 순조 때 영의정 등을 역임한 신현(申絢, 1764~1827)이 13년 동안 기록한 15권 15책의 개인 일기다.

     

    <성도일록> 1819년 9월 1일자 일기에는 의원 정후상이 찾아온 일과, 그의 아비 약용이 신유사옥에 연루되어 오랜 세월 유배되었으나 후상이 뛰어난 의술로 당대의 권세가들을 치료하면서 아비의 구명 로비를 했고, 마침내 풀려나게 되었다는 내용이 쓰여 있다. 정후상은 아비의 일로 관직 진출 길이 막히자 당시 중인(中人)들이 하는 의원이 되었고 그 의술로써 아비를 구한 것이었다. 일기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정아사(丁雅士) 후상(厚祥)이 찾아왔는데 그는 승지를 지낸 약용(若鏞)의 아들이다. 그 아버지가 사옥(邪獄, 신유사옥)에 걸려 숱한 세월을 귀양살이로 보냈는데 후상이 의술(醫術)에 정통하여 권세를 잡은 사람과 사귀어 마침내 죄에서 풀려 돌아오게 하였던 바, 가히 효(孝)라 이를 만하다."

     

     

    <성도일록>

     

    추사 김정희도 제주도에 유배된 죄인 중 드물게 풀려나 섬을 떠났다. 8년 3개월의 제주도 귀양살이가 비로소 끝난 것인데, 석방이 결정된 날은 1848년 12월 6일, 그의 나이 63세 때였다. <헌종실록>은 그날의 일을 "하교하기를 이목연, 조병현, 김정희를 석방하라 하였다"고 간단히 적고 있지만, 그것이 그리 간단히 결정되지는 않았을 터, 권돈인, 조인영과 같은 오랜 친구들이 석방에 앞장섰고 신헌, 허련, 조희룡 같은 제자들이 그 뒤를 밀었다.  

     

     

    서울 화계사의 신헌 글씨 / 보화루에 걸린 것으로 오른쪽 흥선대원군의 글씨와 함께 나란히 걸려 있다. 두 사람은 모두 추사 김정희의 제자로서 신헌은 훗날은 강화도조약 및 조미수교를 체결한 인물이다.
    신헌의 서체 모음집 <집편첩(集片帖)>
    허련의 서첩
    조희룡의 서간문 / 추사박물관

     

    그리고 운이 좋게도 국가의 여섯 가지 경사가 겹쳤다. 즉 대왕대비의 육순, 왕대비 망오(望五, 나이 50을 바라봄을 경축하는 잔치), 순종 추상존호(追上尊號, 사망한 임금의 존호를 올리는 일), 대왕대비 가상존호(加上尊號, 기존의 존호에 다시 더 높은 존호를 덧붙이던 일), 익종 추상존호, 왕대비 가상존호와 같은 행사가 겹치며 사면이 성사된 것이었다. 말하자면 8.15광복과 같은 국경절에 묻어 사면된 조씨나 윤씨 같은 경우였다.  

     

     

    얼마전 사면된 조씨와 윤씨 & 이들을 풀어준 이 / sbs뉴스 캡처

     

    육지에서 날아든 석방 소식에 추사가 뛸 듯 기뻐했을 것임은 보지 않아도 알 일이다. 그가 소식을 접한 날은 12월 19일로, 출도(出島)의 기쁨에 마음이 들떴던 추사는 "7일 이내에 10년 묵은 온갖 잡다한 일을 다 처리했다"고 편지에 적었을 만큼 바삐 주변을 정리했다. 그러면서도 혹시 빠뜨리는 게 있을까, 4개의 물목(物目)을 만들어 가지고 나갈 것들을 하나하나 기록했다. 

    첫째 물목에는 책, 둘째 물목에는 책과 공책과 종이, 셋째 물목에는 책 · 향 ··· 병풍, 넷째 물목에는 음식물을 담은 항아리 등을 적었는데, 의복은 두 상자에 나누어 담았다. 필시 의복으로써 감싸 물건의 파손을 막으려는 의도였을 터였다. 그리고 축하를 위해 일부러 찾아와 준 제주목사 장인식과 석별의 술 한잔을 나눈 후 이듬해 1월 화북포구로 출발했다. 장인식은 매달 물품(月惠)을 보내주며 조금씩 추사를 돌봤던 바, 앞서 광해군이 유배왔을 때의 이시방 제주목사와 더불어 죄인에게 은혜을 베푼 의인들이라 할 수 있다.  

     

     

    추사가 적은 첫째 물목
    추사가 적은 둘째 물목

     

    제주목 화북포구는 자신이 9년 전 제주에 유배올 때 도착했던 곳으로, 당시에 지은 '영주화북진도중'(瀛州禾北鎭途中, 제주도 화북진 가는 길에서)이라는 시가 전한다. 육지에서 온 죄인을 구경하기 위해 몰려든 아이들에 대해 제 꼴을 우스워하면서도 임금의 은혜를 읊었는데, 정말로 그 임금(현종)의 석방 결정으로 풀려나게 된 것이었다. 아마도 추사는 그때가 떠올랐을 것이다. 

     

    촌구석 아이들 구경거리에 난리가 났구나

    쫓겨난 신하의 꼴 가히 증오스럽도다

    온갖 고난을 극복하고 다다른 곳

    하해 같은 임금의 은혜에 파도도 치지 않도다.  

     

    村裏兒童聚見那

    逐臣面目可憎多

    終然百折千磨處

    南極恩光海不波

     

     

    제주 화북 포구
    화북 포구를 관장하던 화북진 터 표석

     

    출항에 앞서 추사는 남해신에 올리는 제문(祭南海神文)을 지어 무사 귀환을 빌었다. 지금은 비행기를 타고 손쉽게 제주도를 오갈 수 있는 세상이지만 당시는 배가 유일한 교통수단이었고 또 풍랑 등으로 인한 사고도 빈번한 시절이었다. 그리고 풍랑으로 인해 멀리 명나라까지 표류한 최부라는 사람도 있었지만 사고는 거의가 사망으로 이어졌던 바, 추사의 무사 귀환을 비는 마음은 여느 때보다 간절했을 것이었다. 화북포구 해신사에 올린 제문에는 그와 같은 간절함이 알알이 매달려 있다. 

     

    높은 사람 바다를 지나니 / 高人過海

    온갖 신이 영()을 드날리어 / 百神揚靈

    해약(=해신)이라 천오마저 / 海若天吳

    모두 다 인()에 길들었네 / 莫不馴仁

    하찮은 이 몸 가고 오매 / 藐玆去來

    왕령(王靈)을 의지한 것 / 王靈寔依

    옛 귀양엔 잡귀 도왔고 / 昔貶魑禦

    이제 풀려 돌아가니 / 今恩環歸

    빛나도다 왕의 영은 / 於赫王靈

    신 또한 거역 못하리 / 神且不違

    상서 바람 조각 돛에 / 祥風一帆

    천리 파란(波瀾) 잠잠하여 / 安瀾千里

    탈 없이 잘 건너기는 / 利涉太平

    신의 힘에 달렸다오 / 在神作使

    감히 엷은 정성 올리오니 / 敢薦菲悃

    신이여 강감(降鑑)하소서 / 神鑑垂只

     

    그러고도 불안했던지 추사는 해신사를 나와 다시 남해신(南海神)을 향해 제문을 써 올렸다. 해신사 단 아래서 썼다 하여 따로 '단하제문(下壇祭文)'이라 불리는 제문의 내용은 이러하다.  

     

    자욱이 뭉친 저 혼이여 / 有渰者魂

    맺혀맺혀 못 오르니 / 鬱而不上

    저녁 조수(潮水) 새벽 썰물 / 昏潮曉汐

    아득아득 몇 만년을 / 萬古況冥

    솟아 날고 굽어 서리니 / 夭矯蟠屈

    뉘 더불어 도창(導暢)하리 / 誰與導暢

    예로부터 주식(酒食)이란 / 維酒維食

    배불리고 즐기는 것 / 昔所飽嗜

    화풍(和風)으로써 마시고 / 歠以和風

    화기(和氣)로써 밥을 지어 / 餐以協氣

    함께 태화에 감싸이면 / 同囿太和

    거의 뉘우침 없으리라 / 庶無祗悔

     

     

    1820년 제주목사 한상묵이 건립한 화북포 해신사
    추사 김정희 등의 유배인 기록이 적혀 있는 화북포 유지 표석

     

    그 간절함이 통했는지 김정희는 무사히 바다를 건너 뭍에 당도했다. 1849년 1월 7일이었다. 추사는 석방돼 뭍으로 돌아오는 날, 그렇게 간절했고 또한 경건했다. 그래서 앞서 말한 조국 씨와 더욱 비견된다. 추사의 사면에 조인영, 권돈인 신헌, 허련, 조희룡 같은 사람들의 도움이 있었다면, 조국 씨의 사면에는 백낙청, 함세웅, 이해찬, 문재인 같은 좌파 거물들의 도움이 있었다.

     

    현직 대통령도 움직일 수 있는 뒷배를 가진 때문인지 석방된 그의 모습은 시종 당당했다. (그래서 아닌 줄 알면서도 많은 사람들이 독립운동으로 투옥됐다 출소하는 줄 착각했다) 출소를 앞둔 자들에게서 보여지는 삶에 대한 간절함이나 경건함의 느낌도 없어 보였다. 

     

    사실 조국 씨가 사면 복권되는 것은 여러가지로 불합리한 일이었다. 그 죄질 자체가 지저분하기도 하거니와 반성의 기색도 없고 법적으로도 복역기간이 너무 짧았다. 그는 겨우 2년 형을 받았지만 잔여 형기가 1년5개월이나 남아 있었다. 출옥해서도 역시 반성의 태도는 보이지 않았으니 자신의 입시 비리를 사과하겠냐는 질문에는 "제가 몇 번의 사과를 한다고 2030세대가 마음을 열겠냐"고 되물었다. 당연히 "용서받을 때까지 수십 번, 수백 번이라도 사과할 생각"이라고 말해야 옳았음에도....

     

    사면 이후 대통령 지지율 하락에 대해서는 "(내 책임은) N분의 1 정도라고 생각한다"고 답했다. 하일라이트는 역시 소 잡아 먹고 된장국 내민 소셜미디어 영상이었다. 이와 같은 가벼움이 조국스럽기는 하지만 큰뜻을 지닌 사람의 행동으로는 도무지 여겨지지 않는다.  

     

     

    댓글

아하스페르츠의 단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