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BOUT ME

-

Today
-
Yesterday
-
Total
-
  • 제주의 추사 김정희와 위작 '추수백운도'
    잘 알려지지 않은 흥미로운 역사 이야기 2025. 8. 26. 06:07

     

    이미 여러 번 얘기했거니와, 추사(秋史) 김정희(1786~1856)가 제주도로 정배된 이유는 이른바 윤상도 옥사 사건에 연루된  때문이다. 윤상도 옥사 사건은 윤상도라는 사람이 호조판서 박종훈 등의 관리를 탐관오리로 탄핵했다가 역공을 받아 국문 중 사망한 사건을 말한다. 당시의 세도가인 안동김문은 이 사건의 배후로 전(前) 세도가의 좌장인 경주김문의 김노경을 지목했던 바, 바로 김정희의 아버지였다. 이에 김노경은 전라도 절해고도인 고금도로 유배가게 된다.

     

    사실인지 아닌지는 알 수 없으나, 김정희는 윤상도가 제출한 탄핵문의 초안을 작성했다는 죄로 (집에서 자다가) 뒤늦게 잡혀갔다. 안동김문은 그의 죄가 아비 김노경보다 더 깊다 하여 사형에 처할 것을 주장했지만 국문 과정에서 관련된 증인들이 모두 고문치사하는 바람에 공소유지가 어렵게 되었다.(김정희도 6차례의 고문을 당했다) 따라서 요즘으로 보자면 증거 불충분으로 풀려나야 정상이었겠으나 그때는 통하지 않았으니 다만 사형만이 면제되어 제주도로 귀양가게 되었다.  

     

    그때가 1840년(헌종 6) 쉰다섯 살 때였다. 전주, 남원, 나주, 해남, 강진을 거쳐 김정희가 도착한 곳은 제주도 북쪽의 화북포구로서, 이후 김정희는 제주목 관아에서 형식적인 조사를 받고 대정현으로 이송돼 대정현 군교(軍校) 송계순의 집에 위리안치된다.  2년 뒤 그는 대정현 갑부였던 강도순의 집으로 옮기게 되는데, 이때부터는 몸이 제법 자유로워졌던 듯 대정현 향교에 현판 글씨도 써주고 후학들도 키우고 하였다.

     

     

    김정희가 유배됐던 살던 대정읍의 성벽
    대정읍성 안내문
    대정향교 동재(東齊) 현판 '의문당' / 추사의 유배시절인 1846년에 쓴 글로 대정 훈장 강사공이 간청해 받았다. 의심이 있으면 당연히 물어야 한다는 뜻이다.(제주 추사관)
    '유재'(留齊) 현판 탁본 / 유제는 제자 남병길의 아호이다. 추사는 제주도에 와 5년간 가르침을 받은 남병길에게 당호 현판을 써주며 "기교를 다 하지 않고 남김을 두어 자연으로 돌아가게 하고, 녹봉을 다 하지 않고 남김을 두어 조정으로 돌아가게 하고, 재물을 다 하지 않고 남김을 두어 백성에게 돌아가게 하고, 내 복을 다 하지 않고 남김을 두어 자손에게 돌아가게 한다"는 글을 덧붙였다.(제주 추사관)

     

    그가 살던 강도순의 집이 현재 서귀포시 대정읍 안성리 1640번지에 재현되어 관광객들을 맞는데, 실은 추사의 편지 속에 나오는 송계순의 집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것이다. 그러므로 정확히 말하자면 송계순의 집이라 해야 옳다. 다만 주소가 강도순의 집 부근인 것은 맞는 바, 이를 근거로 바로 옆에 전시관인 제주추사관을 세웠다. 건축가 승효상이 <세한도>에 나오는 집에 착상해 지은 건물로서, 2010년 75억을 투입해 개관했다.

     

    원래 입찰 대상이었지만 당시 문화재청장이던 유홍준이 직권으로 승효상을 지명해 완공한 건물이다. 유홍준은 1974년 민청학련 사건으로 이해찬 등과 함께 약 1년간 투옥됐다 풀려났는데, 그런 그의 첫 직장이 김수근의 월간 <공간> 편집부였고 그때 건축설계회사 '공간'에 속했던 사람이 승효상이라 두 사람은 같은 파(波)라 할 수 있다. 2013년 tvN 예능프로 '유 퀴즈 온 더 블럭'에 소개된 대로 유홍준의 강남 저택 '수졸당'을 건축한 사람도 승효상이다.   

     

     

    제주추사관
    추사유배지와 제주추사관 안내문
    재현된 강도순의 집 밖거리
    주인집인 안거리
    추사가 살던 모거리
    부근의 김정희 동상

     

    제주추사관에는 추사의 많은 작품이 전시돼 있지는 않으나 적어도 위작의 논란이 있는 것은 제외되어 있는 듯하다. 전문가의 세심함이 느껴지는 부분이다. 그래서 원본이 아닌 사본 일지라도 편안한 마음으로 감상할 수 있는데, 그 중심에 있는 그림은 당연히  '세한도(歲寒圖)'다. 바로 추사가 제주 유배지에서 그린 그림이기 때문인데, 그는 거기에 '세한연후 지송백지후조야(歲寒然後 知松柏之後凋也)'라는 논어의 글귀를 써넣었다.

     

    '세한도'는 정확히 그가 59세 때인 1844년 강도순의 집에서 그려졌다. 이 그림을 받은 사람은 제자인 역관 이상적(李尙迪, 1804~1865)으로, 추사는 자신이 지위와 권력을 잃어버렸는데도 사제 간의 의리를 저버리지 않고 책을 구해다 주는 등 지극정성으로 자신을 도와준 이상적에게 고마움을 표하는 뜻에서 그려 선사했다. '세한도' 그림의 이름이 유래된 '歲寒然後 知松柏之後凋也'는 날씨가 추워진 뒤에야 소나무 잣나무가 늦게 시듦과 푸르름을 안다는 뜻으로, 사람도 어려움이 닥쳐야 그 사람됨을 알 수 있다는 속뜻을 담았다.

     

     

    제주 추사관의 <세한도>


    그에 덧붙여 추사는 '지금 그대는 내게 있어 이전에도 더함이 없고 이후에도 덜함이 없다. 그러나 이전의 그대에게 칭찬할 게 없다면, 이후의 그대는 성인의 칭찬을 받아 마땅하다 할 것이다(今君之於我由前而無可焉. 由後而無損焉. 然由前之 君無可稱 由後之君 亦可見稱於聖人也耶)라는 글귀를 써넣었다. 대역 죄인으로서 귀양 간 자를 돕는다는 것은 보통의 의리로는 될 일이 아니었기에 이를 더욱 상찬한 것이었다. 

     

     

    <세한도> 화제
    이상적이 구하여 준 책 중의 하나인 <황조경새문편>

     

    이와 같은 지고지순한 의리, 우정, 충절의 정도를 원하는 것은 아니지만, 이재명 집권 직후에 있었던 국무회의에서의 특검법 통과 과정은 문자 그대로 개들의 판이었다. 알다시피 이재명은 지난 6월 10일 국무회의에서 3대 특검법을 공식 의결해 공포시켰다. 3대 특검법은 소위 내란종식을 명목으로서, 민주당에 반대했던 과거 윤석열 정부의 관료와 여당 정치인, 아울러 직무에 충실했던 군인 및 대통령의 부인까지도 쓸어버리려 만든 무시무시한 법안이었다. 

     

    3대 특검법은 한마디로 정치보복 악법이다. 까닭에 이 법안에 대해 국무위원들이 당연히 반대하리라 생각했지만, 생각과는 다르게 이 악법의 법안은 국무위원들의 전원 참석 속에 무난히 통과되었다. 윤석열 내각 국무위원들은 마치 영혼 없는 기계처럼 거수기 노릇을 하며 부역을 했는데, 거기에는 이재명이 과거 야당대표 시절에 내란 동조자로서 처벌을 예고했던 장관 등도 포함돼 있었다. (그것이 현실화돼 그들은 지금 특검에 불려 다니고 있다. 치졸한 겁쟁이들이 제 발등을 찍은 셈이다) 

     

    향후의 국무회의 속에서도 윤석열 내각의 국무위원들은 모두 이재명에 협조적이었고 어느 정신 나간 자는 이재명의 진행이 휼륭하다는 아부성 발언까지 얹기도 했다. 국무위원은 아니나 국무회의 배석자로서의 참여 자격이 있는 이진숙 방통위원장만이 3대 특검법이 정치보복으로 비칠 수 있다는 외롭고 의로운 발언을 날렸을 뿐이다. (하지만 그로 인해 이재명으로부터 향후 국무회의 참석 불가의 통보를 받아야 했으며, 현재도 외롭고 의로운 투쟁 중이다) 

     

    이미 사직했기에 국무회의 참석과는 무관했지만, 어제 특검에 의해 영장이 청구됐다는 한덕수 전 총리도 충분히 비겁했다. 그는 대통령 후보가 되지 못한 게 못내 분했는지 선거 때 끝까지 자당 후보를 돕지 않았다. 그가 도왔다고 결과가 좋았으리라는 보장은 없지만 '세한연후 지송백지후조야'(날씨가 추워진 뒤에야 소나무 잣나무가 늦게 시듦과 푸르름을 안다)와는 충분히 거리가 있는 모습이었다. 결국 그도 구속을 면치 못할 것이며, 향후 세상이 달라져도 좋은 소리를 듣지 못할 것이다.

     

    추사가 제주도에서 그린 그림 중에는 '추수백운도(秋樹白雲圖)'도 있다. 유홍준이 <추사 김정희>에서 제주 유배 시절 추사가 살던 집을 그렸을 개연성이 높다고 한 그림으로, 당연히 진품으로 평가한 작품이다. '추수백운도'는 일반적으로도 유배 중인 추사가 친구인 황산(黃山) 김유근(金逌根)을 그리워 하며 그린 그림으로 알려져 있으며, 김유근이 쓴 화제(畵題)로도 이름이 높다. 참고로 화제는 다음과 같으며 김유근의 문집 <황산유고>에도 실려 있다.  

     

    뭉게뭉게 흰 구름 / 가을나무에 둘렀네 / 누추한 집의 주인을 찾으니 / 그 누구 때문이런가 / 산과 강이 아득히 멀어 / 예전에는 나를 돌아보지 못했지 / 하지만 지금은 어떠한가 / 아침 저녁으로 만나세나. (英英白雲 繞彼秋樹 從子衡門 伊誰之故 山川悠邈 昔不我顧 今者何如 庶幾朝暮)

     

     

    '추수백운도'

     

    아마도 두 사람은 과거에 소원했던 때가 있었으나 그것을 극복하고 자주 만나는 절친한 사이가 된 듯하다. 그러나 이 그림은 화제의 시기상 제주도에서 그려진 그림이 아닌 추사가 금호별서(琴湖別墅/ 동작진과 노량진 사이로 추정되는 추사의 별서)에 살았던 1832년 5월~1835년 9월 사이에 그려진 것으로 보이는데, 그보다는 김유근의 시를 집어넣은 교묘함이 돋보인다. 말인즉, 이 그림은 제주도에서 그려진 것이 아니며 글씨를 쓴 사람도 추사나 김유근이 아니라는 것이다. 한마디로 기품이다. 

     

    서귀포시 대정읍 안성리에서 오래 살아 본 나의 경험으로는 추사 유배지에서 위 그림의 배경으로 등장하는 산하를 본 적이 없다. 반면 배경의 산하는 분명 강(한강)이며 강 뒤로 산이 그려져 있다. 앞서 말한 강우방 선생도 이 그림에 대해, "구도에 질서가 없고 글씨의 획이 날림이라 분명한 위작"이라며 선을 그었는데, 덧붙여 "이런 짜임새 없는 그림을 추사가 그렸을 리 만무하다"고도 했다.   

     

     

    대정읍에서 본 산방산 / 추사가 정말로 유배지에서 '추수백운도'를 그렸다면 대정읍 어디서도 보이는 산방산을 그려 넣었서야 마땅하다.
    억지로나마 이 사진을 찾았으나 이 앞에는 강이 없다. 정말이지 이 길을 지겹게 걸어다녔다.

     

    댓글

아하스페르츠의 단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