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BOUT ME

-

Today
-
Yesterday
-
Total
-
  • 사영 김병기의 묘는 명당이었을까?
    잘 알려지지 않은 흥미로운 역사 이야기 2025. 8. 14. 21:19

     
    앞서 '도래한 이재명, 정청래, 조국의 3호경식지경(三虎競食之境)'에서 앞으로 펼쳐지게 될 그 세 사람의 각축을 조선말 천하의 권력을 다툰 김병국, 김병학, 김병기, 이 세 사람의 권신에 비유한 바 있다. 오늘은 그중의 한 사람인 김병기(金炳冀, 1818~1875)에 대해 말해보려 한다. 
     
    김병기의 본관은 안동, 자는 성존(聖存), 호는 사영(思穎)이다. 1847년(헌종 13) 정시 문과에 급제하고 1849년(철종 즉위년) 대사성이 된 뒤 1850년 이조참의ㆍ실록청수찬관ㆍ규장각직제학ㆍ예조참판, 1851년 이조참판, 1852년 대사헌을 거쳐 평안도관찰사가 됐다. 이후로도 잘 나갔는데 실력보다는 영의정 김좌근(金左根)의 양자로 입양되며 누린 후광이 컸다. 김좌근은 1853년(철종 4)부터 1863년까지 세 차례나 영의정을 지내며 천하를 좌지우지한 자였다.
     
     

    경기도 이천시 백사면의 김좌근 고택

     
    이미 말한 대로 철종은 안동김문에 의해 세워진 허수아비 임금이었다. 이에 철종의 치세는 당연히 안동김씨의 세상이 되었던 바, 순조 때 시작된 세도정치를 이어갈 수 있었다. 관료로서 6조의  판서를 두루 섭렵한 김병기는 그야말로 나는 새도 떨어뜨릴 만큼의 권세를 누렸으나 권불십년으로, 1864년 고종이 즉위하고 흥선대원군이 실권을 쥐자 곧바로 좌천되어 광주유수(지금의 성남시장 정도)로 밀려났다. 
     
    김병기로서는 어쩌면 그나마도 다행이랄 수 있었으니 여차하면 목숨을 내놓아야 될지도 모를 위태로운 처지였다. 흥선대원군의 파락호 시절, 안동김문에서는 그를 상갓집 개 취급을 했었고 김병기도 그를 하대한 죄가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처지가 역전되었던 바, 어떻게든 새로운 권력자 흥선대원군의 눈에 들어 살아남아야만 했는데, 다행히도 그럴 기회가 왔다. 안동김문의 좌장 영의정 김좌근이 흥선대원군을 장동(지금의 효자동) 옥호정 저택으로 초대하여 점심 식사를 할 때 마침 김병기도 그 자리에 끼게 되었던 것이다.
     
     

    서울 종로구 삼청동 다락정 앞 옥호정 터 표석
    표석의 위치와 달리 옥호정은 이 골목 안쪽에 위치했었다.

     
    점심은 평소 면을 즐기던 대원군의 입맛에 맞춰 안동국시를 대접했다. 안동국시는 건진국수라고도 불리는 향토음식으로서, 은어, 양지머리(소의 가슴살), 닭, 꿩 등으로 국물을 낸 후 그 재료가 된  고기로써 고명을 얹고 야채로 색을 내는 전통 국수였다. 따라서 국수라고 해도 일반 백성들은 맛을 보기 힘들었고 안동김문에서도 귀한 손님이 올 때만 대접하는 음식이었던 바, 김좌근으로서는 최대한의 예우을 한 셈이었다.
     
    흥선대원군도 만족한 얼굴이었다. 그런데 국수 한 두  젓가락을 베어 물던 그가 갑자기 '욱' 하는 소리와 함께 입안의 국수를 토해냈다. 뿐만 아니라 마당으로 뛰쳐나가 먹었던 국수를 게워내기까지 했다. 좌중의 안동김문 인사들은 졸지에 사색이 되었다. 그의 입맛에 안 맞았던 것인지, 아니면 그 안에 들어가면 안 될 것이 들어갔는지는 알 수 없는 노릇이지만, 주위 사람들을 얼어붙게 만들기에 충분한 상황이었다. 
     
    다행히 대원군은 곧 제 자리로 돌아왔는데, 바로 그때 김좌근의 아들 김병기가 대원군이 먹던 국수 그릇을 제 앞으로 가져와 남은 국시를 허겁지겁 제 입 안에 밀어넣었다. 뿐만 아니라 마당으로 나가 대원군이 게워놓은 국수가락까지 손가락으로 집어 제 입에 넣었다. 음식 안에 독극물이 없었다는 사실, 즉 우리는 당신을 죽일 의도가 없었다는 사실을 온몸으로 증명한 셈이었다. 
     
    이것이 눈물 나는 용기인지, 구역질 나는 아첨인지는 보는 사람의 서 있는 자리와 위치에 따라 다를 터였다. 하지만 의도만큼은 주효했던 듯, 피바람이 불 것이라는 시정의 예상과 달리 안동김문은 향후 큰 피해를 입지 않았다. 김병기 역시 다시 요직에 기용되어 1865년 병조판서ㆍ좌찬성, 1866년 공조판서ㆍ예조판서, 1867년 이조판서 등을 두루 역임하였다. 그의 집은 종로 가회동에 99칸 대저택으로서 한일합방 이후까지 존재하였으나 1920년대 디벨로퍼 정세권이 일대의 대저택을 필지분할해 북촌을 조성하며 사라졌다. 
     
    김병기가 나이 들어 묘자리를 찾을 때 청주에 사는 유명 지관 정총각을 모셔왔다. 정총각은 당시 일흔두 살의 노인이었으나 장가들 들지 않아 내내 총각으로는 불리는 기인으로서, 앞날을 내다보는 예지력도 있어 정신사(鄭神師)라고도 불렸다. 요즘 풍속을 빌리지면 쪽집게 총각도사라 할만할 인물이었는데, 하는 짓도 비슷하여 클라이언트에게 지위 불문 반말짓거리를 해댔다. 
     
    김병기 대감이라고 예외를 두지 않았으니 상면하자마자 다짜고짜 반말로 자신을 찾은 연유를 물었다. 김병기도 그에 관해서는 익히 들은 바가 있어 태도를 문제 삼지 않고 용건을 말했다. 그런데 뜻밖에도 정총각은 김병기의 청을 거절했다. 뿐만 아니라 일갈하기까지 하였던 바,
     
    "너는 땅이 많으니 아무 데나 묻히면 되는 것을, 왜 이런 일로 사람을 오라 가라 하느냐? 언제 송장 거부하는 땅 보았느냐? 너는 아비가 정승이요, 누이가 왕비일뿐더러 너 또한 1품의 벼슬아치다. 또 집안에도 벼슬아치 아닌 자가 없다. 그럼에도 더 잘되려고 명당을 구하려드느냐? 세상의 부귀영화도 정도가 있는 법, 권력도 그침을 알아야 하거늘, 이보다고 더 얻겠다니 도적놈이 따로 없도다. 나는 그냥 가겠노라."
     
    하고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가버렸다. 이에 집안의 권속과 하인들이 분노하며 그를 포도청에 가둘 것을 권했다. 정총각의 행위는 요즘으로 치면 모욕죄에 해당하는 죄였다. 하지만 김병기는 크게 먹은 한 방에 아직 제 정신이 돌아오지 못한 듯 한동안 멍하니 서 있었고, 그동안 정총각은 총총히 사라져 버렸다. 
     
    일이 이렇게 마감됐다면 김병기는 관용을 베풀줄 아는 이해심 있고 도량 있는 인물로서 평가되었을 것이었다. 그러나 김병기는 얼마 후 청주병사에게 명을 내려 정총각을 물고해 죽게 만들었다. 정총각에게 받은 충격이 워낙 심했고 그 충격으로부터 못내 헤어나지 못한 것이 원인일 터였다. 이유야 어찌됐든 이에 대한 평판은 좋지 못하였으니, 정총각을 넓은 관용으로 헤아려 용서해 주었다면 훗날 큰 복을 받아을지도 모르는데 애석하는 것이 세간의 평이었다
      
    김병기는 사후 아비 김조순의 묘 옆에 묻혀 장사 지내졌다. 현재의  경기도 이천시 백사면 내촌리, 위 김좌근의 고택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이다. 김좌근이나 김병기나 모두 이름난 지관이 선택한 땅에 묻혔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묘택이 둘 다 사라졌다. 이장된 것이 아니라 2006년 후손에 의해 개장되어 수목장으로 처리됨에 따라 아예 없었진 것이니 그 묘비만이 서울대학교박물관에 기증되어 박물관 주변에 남아 있다.

     

     

    서울대박물관 뒷뜰의 김좌근·김병기 묘 석물
    김좌근의 묘표 / 흥선대원군이 썼다.
    김병기의 묘표


    이를 보면 뭔가 인상무상 같은 게 느껴진다. 살아생전 일세를 풍미하였고, 죽어서도 본인과 후손 모두의 평안을 위해 유명 지관이 고른 그 세도가들의 묘택이 지금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으니 말이다. 2018년 개봉한 <명당>이란 영화에서는 '이대지지 천하지명당'(2대에 걸쳐 천자가 출현할 천하의 명당)이라는 덕산 가야사의 자리를 두고 흥선대원군과 사영 김병기가 피 터지게 싸우는 광경이 그려진다.

     

    실제로 김병기가 그러하지는 않았지만, 흥선대원군 집권 후, 위에서 처럼 땅에 게워진 국수조각을 집어먹은 적은 있다. 지금 새로운 집권자의 광란극을 보노라면 김병기처럼 국수를 집어먹는 자도 보이고, 드물지만 정총각처럼 상대의 지나친 욕심을 꾸짖는 사람도 보인다.

     

     

    영화 <명당>에서의 사영 김병기와 흥선대원군


    좀 거창하기는 하지만, 이탈리아 역사가 크로체의 말을 빌리자면 모든 역사는 현대사이다.(All history is contemporary) 그래서 풍수쟁이
    정총각의 말이라 해도 그저 흘려들을 일이 아니니 , 아무리 무한한 권력이라도 그칠 줄을 알아야 한다. 그 권력의 칼은 결국 부메랑처럼 되돌아와 구(舊) 권력을 노릴 수 있기 때문이니, 1.7평으로 좁아진 뜨거운 감방이 앞으로 어떤 권력자를 불편하게 만들는지 모르고, 또 부부를 동시에 가둘는지도 알 수 없는 일이다.  
     
     

    영화 <명당>의 포스터

     

    댓글

아하스페르츠의 단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