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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사 김정희의 과천집을 다시 다녀옴잘 알려지지 않은 흥미로운 역사 이야기 2025. 8. 24. 22:28
앞서 소개한 관악산 일명사지(逸明寺址)부터 시작해 각각의 다른 일로 연속해서 4회 과천에 다녀왔다. 우연찮게 그렇게 되었는데, 오늘 방문은 과천 추사박물관에 뭔가 새로운 작품이 전시되지 않았을 하는 기대감 때문이었다. 비록 새로운 것이 아니더라도 모르는 것을 다시 공부한다는 마음도 있었는데, 추사의 오랜 벗 권돈인의 명필 글씨를 다시 보니 기분이 새로웠다. 그 외 새롭게 발견한 것들을 시간 나는 대로 적으려 한다.

추사의 과지초당 청나라 금석학자 소재(蘇齋) 옹방강의 글씨도 새로웠다. 옹방강이 김정희에게 보낸 편지를 묶은 <담계수찰첩> 속의 '고고증금 산해숭심(攷古證今 山海崇深)' 글씨는 옹방강과 추사가 얼마나 밀접한 관계인가를 여실히 증명한다. 추사박물관에 전시된 '고고증금 산해숭심'은 일본의 추사 연구가 후지츠카 치카시 교수가 영인한 것으로 위작(僞作) '산숭해심 유천희해(山崇海深 遊天戱海)'의 모본이 된 글씨로도 유명하다.

옹방강의 <담계수찰첩>과 '고고증금 산해숭심' 이 글씨를 바탕으로 하여 어떤 사기꾼이 아래의 '산숭해심 유천희해(山崇海深 遊天戱海)'이라는 글씨를 썼다. '산은 드높고 바다는 깊으니, 하늘에서 즐기고 바다에서 노닌다'는 의미의 이 글은 207x 42cm의 대작으로서, 경로는 알 수 없으나 호암박물관을 거쳐 지금은 리움미술관에 전시돼 있다. 물론 추사 진품으로서의 가치를 지니고서이다. 하지만 감히 말하거니와 이것은 절대 추사의 작품이 아니다.

리움미술관의 '산숭해심 유천희해' 이 글씨는 왜 그런가 따질 필요도 없는 졸작이요, 추사체와도 거리가 멀다. 감히 추사체라고도 견주기 어려운 위작이다. 그래서 이러저러한 설명도 필요 없이 누구라도 보면 위작이라고 생각이 들 정도인데, 놀랍게도 과거 유홍준 교수가 이를 진품으로 인정했다. 아마도 지금도 그럴 할 터, 그는 아예 이 글씨를 세로로 꾸며 자신의 저서 <추사 김정희>의 표제로 삼았다. 이 책은 서점에서 쉽게 눈에 뜨인다. 올드한 표현으로 놀랄 노 자이다.

<추사 김정희> 이에 대해서는 원로 미술사학자 강우방 교수도 일갈한 바 있다. 그는 유홍준의 <추사 김정희>에 대해 "추사의 작품이 아닌 글씨와 그림을 대거 추사의 것으로 둔갑시키고 있다"고 비판했다. 과거 <주간동아>에 실린 강우방의 글은 적어도 내 시각으로는 줄줄이 옳았다. <추사 김정희>는 유홍준 교수가 2002년 펴낸 <완당 평전>이 오류가 너무 많아 폐기하고 2018년 새로 출간한 책임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오류 투성이다.

이미 위작임이 판명된 '명선(茗禪)'도 다시 실렸다. 진위의 문제는 아니나, 과거 <나의 문화유산답사기>에 실렸던 추사의 해남 대흥사 현판 '무량수전'에 관한 이야기도 수정 없이 그대로 살렸다.
즉, 추사가 1840년 제주 귀향길에 해남 대흥사에 들러 초의선사를 만났을 무렵, 대흥사 대웅전에 걸린 원교 이광사의 글씨에 보고, "조선의 글씨를 다 망쳐놓은 것이 원교 이광사인데 어떻게 안다는 사람이 그가 쓴 대웅보전 현판을 버젓이 걸어놓을 수 있는가. 차라리 나의 글씨를 걸라"며 무량수각 4자를 써주어 초의가 그 극성에 못 이겨 원교 현판을 떼어내고 추사의 글씨를 달았다는 얘기다.
그런데 추사가 1848년 12월, 63세 노령으로 귀양지에서 풀려나 서울로 올라가는 길에 대흥사에 들렀을 때는 사뭇 세상을 보는 눈이 달라져 있었으니, 초의에게 "옛날 내가 떼어내라고 했던 원교의 대웅보전 현판이 지금 어디 있나? 다시 달아주게. 그때는 내가 잘못 보았어"라고 했다는 것이다. 그것을 유홍준은 "추사 인생의 반전은 그렇게 이루어졌다. 법도를 넘어선 개성의 가치가 무엇인지를 외로운 귀양살이 9년에 체득한 것이다"라고 했다.

추사 김정희의 '무량수각' 
원교 이광사의 '대웅보전' 스토리텔링은 그럴싸하나 이 이야기 역시 사실이 아닌 것으로 지적받고 있다. 당시 쉰다섯의 나이에 36대의 곤장을 맞고 귀양길에 오른 김정희가 마치 산천유람을 하듯 그려진 것도 개연성 부족한 얘기거니와, 원교의 대웅전 편액을 본 것도 그 이후라는 추사의 서신 내용과도 부합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원교의 대웅전 편액을 다행히 본 적이 있다' / 大雄扁圓嶠書幸得覽過 大雄扁圓嶠書幸得覽過)



교보문고의 책 선전 문구도 잘못된 것이다. 
문화재청 보물 심사에서 진위논란으로 탈락한 '계산무진(谿山無盡)'도 유홍준은 '괴(怪)하다'는이유로 진품으로 믿고 있다. '괴'하면 추사체인가? 그외에도 유홍준이 지적을 받는 부분은 한 두 꼭지가 아니니, 그가 <나의 문화유산답사기>에서 득의로써 주장한 '석굴암 √2 비례미론'도 엉터리 이론이라는 지적을 받은 지 오래다. 그는 '석굴암 √2의 비례미론을 주장하는 유홍준 문화재청장님께 드리는 반론'을 공개적으로 제기한 조선일보 문화부 신형준 기자의 주장에 이렇다 할 답을 내놓지 못한 것으로 알고 있다. (☞ '석굴암 원형 탐구 I - √2의 문제')
이재명 정부가 청와대로 다시 돌아가겠다는 대통령실 이전 문제에 대해서도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유홍준은 문화재청장을 지내다 2019년 '대통령 광화문 시대 자문위원회' 위원인가를 역임했는데, 그 이전 문재인 대통령 후보 시절인 2012년부터 청와대 터가 나쁘다는 소리를 해댔다. 문재인이 집무실을 청와대에서 광화문 정부종합청사로 옮기겠다는 공약을 내건 직후였다. (말과 달리 문재인은 광화문 시대를 열지 않았지만)
~ 문재인 대통령은 야당 후보 시절인 2012년부터, "조선총독부 관저, 경무대에서 이어진 청와대는 지난 우리 역사에서 독재와 권위주의 권력의 상징이자 제왕적 대통령 문화의 상징", "국민 위에 군림하는 권력기관의 상징이며 대통령을 국민들로부터 철저하게 격리하는 곳"이라며 대통령 집무실 이전의 필요성을 주장한 바 있다. 아울러 "대통령이 되면 집무실을 광화문 정부종합청사로 이전해 청와대 대통령 시대를 끝내고 광화문 대통령 시대를 열겠다"고 공약했다.
유홍준은 이후로도 계속해서 "청와대 관저는 반드시 이전해야 한다"는 소신을 피력했다. 기자들이 이유를 물었을 때 "풍수상 불길하기 때문"이라고 했다. 이에 풍수상 불길하다는 근거가 무엇인지를 묻자 "수많은 풍수상의 근거"라고 답한 후 "풍수상 근거가 있다면 있는 거지요"라고 덧붙였다. 하지만 이후 그 수많은 근거 중에서 그가 자신 있게 꺼내놓은 것은 없었다.
워낙에 엉터리 주장이어서였는지, 아니면 좌파사상 때문인지 그는 이번에 이재명 정부가 대통령 집무실을 청와대로 되돌린다고 발표했을 때도 역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알려진 대로 이재명은 대통령실의 세종시 이전을 공약한 상태이며 그것을 철회한 적도 없다. 그런데도 과도한 지출이 요구되는 청와대 이전을 결정했다. 유홍준은 '풍수상 불길한 수많은 근거'를 가진 사람으로서의 소신은 아니더라도 과거 관료로써 국가의 녹을 먹은 사람으로서도 청와대 이전을 반대할 법하지만 이번에도 묵언 수행 중이다.
유홍준은 2004년 9월부터 2008년 2월까지는 문화재청(현 국가유산청) 청장을 지내다 재직 중 일어난 숭례문 화재라는 대사건에 옷을 벗었다. 즈음하여 그는 국립중앙박물관장에 응모했다가 신청을 철회한 적이 있는데, 이번 이재명 정부에서 국립중앙박물관장이 되었다. 그는 문화체육관광부 장관 후보로도 거론됐지만 나이가 많아 부적합 판정을 받고 중앙박물관장이 되었다는데, "이 자리(관장)가 더 맞다고 생각한다"는 변을 남겼다. 대통령실 이전에 관해서는 역시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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