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사기/열전> '궁예' 편에서 이르기를, 궁예의 성은 김씨로, 헌안왕 혹은 경문왕의 서자이다. 더불어 그의 유모가 어린 궁예를 안고 궁을 탈출하는 급박한 과정에서 실수로 눈을 찔러 애꾸가 되었다고 언급돼 있는 바, 신라 왕실의 물고 물리는 왕위 쟁탈과정에서 왕재(王材)였던 그가 경주를 탈출해 영월 산골에 칩거해 살기까지의 과정이 미루어 짐작된다. 따라서 그의 어릴 적 이름은 김씨 성을 가진 다른 이름이었을 가능성이 농후하다.
경문왕릉으로 비정되는 경주 구정동 방형분 / 경문왕 김응렴은 신라 48대 희강왕의 손자다. 경문왕은 아이러니하게도 희강왕과 왕권을 두고 죽고 죽이는 싸움을 벌였던 헌안왕의 사위가 되며 왕위를 이어받았다. 궁예는 이와 같은 당대 권력싸움의 희생양일 듯싶다.북서쪽에서 찍은 사진 / 호석에 12지신상과 폴로를 든 서역인상을 세웠으나 서역인상은 국립경주박물관으로 옮겨졌다.무덤 입구의 12지신상문이 열려 있어 엎드려 들어가볼 수도 있었으나.대구일보의 사진을 빌려왔다. / 안상문의 석관이 보인다.
그는 강원도 영월에서 유모를 자신의 모친으로 여긴 채 컸다. <삼국사기>에는 그 소년이 매우 말썽꾸러기였는데, 아들에 대한 걱정이 지대한 어머니의 근심을 덜어주기 위해 세달사로 가 머리를 깎고 중이 되었다고 한다. 세달사는 그간 위치가 알려지지 않다가 2012년의 발굴조사를 통해 해발 540m에 위치한 영월읍 흥월리 1083-1번지 옛 흥교분교 일대라는 것이 확인됐다. 그러나 이후 영월초등학교 흥교분교는 학생수 감소로 폐교되고 지금은 인근 태화산 탐방객을 위한 주차장으로 변했던 바, 옛 세달사지에서 궁예의 흔적을 찾기란 아예 불가능하다.
기록으로 남아 있는 것은 아니나 안성 칠장사에 궁예의 젊은 날에 얽힌 전설이 전한다. 칠장사 승려 궁예가 19세까지 이곳에서 수도를 하며 무술을 연마했는데, 활 솜씨가 무척 뛰어나 사람들이 그를 궁예라고 불렀다는 것이다. 필시 궁사(弓師)의 후예(後裔)라는 뜻일 터이다. 세달사 출가 후 이 절, 저 절을 떠돌던 궁예가 칠장사에서 수도를 하다 한주 개산군(介山郡/지금의 안성)에서 봉기한 도적 기훤의 휘하로 합류했으리라는 추론이 가능한 대목이기도 하다. 때는 학정과 부정부패로 얼룩진 신라 하대 진성여왕(재위 887~897) 시절이었다.
칠장사 대웅전명부전의 궁예 벽화 / 근자에 그려진 것이다.칠장사 입구의 철당간
하지만 기훤은 궁예가 탐탁치 않았는지 크게 쓰려하지 않았다. 이에 실망한 궁예는 892년(진성여왕 6) 기훤의 부하였던 신훤, 원회 등과 함께 북원경(지금의 원주)으로 가 양길에게 의탁하는데, 이후 발군의 활약으로써 주천 · 나성 · 울오 · 어진 등의 군현을 공격하여 복속시켰다. 이후로도 궁예는 중원경(중추), 명주(강릉과 그 일대) 등의 큰 고을을 점령하며 존재감을 부각시켰는데, 명주를 함락시킬 무렵 처음의 600명이던 군사가 물경 3,500명으로 불어 있었다. <삼국사기>에는 이 무렵의 궁예에 관한 중요한 기록이 있다. "사졸과 함께 고생하며, 주거나 빼앗는 일에 이르기까지도 공평무사하였다"는 것이다. 이는 <육도삼략>에서 첫손가락에 뽑은 장수의 미덕으로서, 궁예가 어떻게 민심을 얻게 되었는지를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다. 그의 이 같은 처신은 당시의 가렴주구에 시달리던 신라 백성들에 있어 한줄기 빛으로 다가왔을 것임에 분명하다.
이후 899년경 궁예는 개산군의 기훤마저 제압하고 기훤의 근거지를 기반으로 독립한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이에 분노한 양길이 대군을 몰아 궁예를 공격하며 이른바 후삼국시대의 관도대전으로 불리는 비뇌성(非惱城) 전투가 벌어지게 된다. 조조와 원소가 중원의 패권을 놓고 충돌한 관도대전에서 의외로 조조가 승리하며 중원의 새로운 강자가 되었듯, 비뇌성 전투에서도 예상외로 궁예가 승리를 거두며 중원의 패자가 되었다.
그 비뇌성이 어디인가 밝혀지지 않았다가 한국전통문화대학교 이도학 교수 등의 지속적인 논문 개진으로 지금은 안성 죽주산성이 옛 비뇌성으로 비정되고 있다. 899년 7월, 양길은 국원성 등 30여 성의 군사를 동원하여 비뇌성에 이르렀으나 궁예는 먼 행군으로 지친 양길의 군사를 선제공격해 대승을 이끌어냈다. 이후 양길에 대한 기록이 보이지 않는 것을 보면 아마도 전사한 듯 여겨진다.
외성 내성 중성으로 이루어진 죽주산성의 현황도죽주산성 동문죽주산성 남문죽주산성 암문
이렇게 중원을 평정한 궁예는 파죽지세로 북진하여 저족 · 성천 · 부약 · 금성을 함락시키고 철원성까지 점령하였다. 그러자 그 기세에 눌린 패서(浿西) 일대의 호족들이 무더기로 항복해 왔던 바, 그 가운데는 송악(개성)의 호족 왕륭도 있었다. 바로 왕건의 아버지였다. 이후 궁예는 왕륭을 비롯한 패서 호족들의 추대로 드디어 새나라를 세우니 901년 송악을 수도로 건국된 후고구려였다.
궁예의 후고구려는 완산주(전주)를 도읍으로 건국된 남쪽의 후백제와 10년간 한반도의 패권을 겨뤘는데, 그 중간인 905년 도읍을 국토의 중앙인 철원으로 옮겼다. 궁예가 송악을 근거지로 후고구려를 세울 때 건국을 뒷받침한 세력이 바로 패서인들이었던 바, 송악은 사실상 왕건의 구역이라 할 수 있었다. 까닭에 일말의 불안의 느낀 궁예는 철원평야에 신도시를 세워 천도하고 국호도 태봉으로 바꾸었다.
대한민국 정책 브리핑이 설명하는 철원도성현재 철원도성으로 가는 길은이처럼 위험하다.2023년 1월에 찍은 사진이다.철원역사문화전시관의 태봉국 철원성 안내문일제강점기 촬영된 철원도성 터철원도성 미니어처철원도성은 남북군사분계선에 의해 정확히 반으로 나뉜다.소이산전망대에서 바라본 철원평야
그러나 이와 같은 노력이 무색하게 철원도성에서의 왕노릇은 13년에 그쳤다. 918년 6월 왕륭의 아들 왕건 일파가 일으킨 쿠데타에 궁을 나와 도망쳐야 했기 때문이다. 과거 궁예를 옹립했던 패서인들은 새도읍인 철원에서도 귀족으로 세력을 유지하다 신진 장교들을 포섭하여 왕건을 새로운 임금으로 세우는 쿠데타를 일으켰다. 홍유, 배현경, 신숭겸, 복지겸, 박술희 등의 무리였다. 궁예는 당연히 포악한 임금으로써 처결 대상이 되었는데, 실제 포악했다기보다는 그렇게 포장되었을 가능성이 더 크다. 한마디로 정적에게 정치보복을 당한 것이었다. 매스미디어가 활발한 요즘에도 그와 같은 일이 자행되는 것을 보면 과거에 어떠했을지는 안 봐도 비디오다. 앞서도 말했지만 이후 발생한 환선길, 이흔암, 임춘식과 같은 궁예 구세력의 역(逆)쿠데타는 궁예가 학정으로 민심을 크게 잃어 역성혁명을 일으켰다는 왕건 측 대의명분과의 괴리를 증명한다.
궁예는 철원도성을 도망쳐 친위대인 소수의 군사들과 함께 포천으로 남하했다. 전해지는 이야기에 따르면 포천 산정호수 부근의 명성산(鳴聲山)은 당시 궁예 부하들의 울음소리가 그치지 않았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궁예는 명성산 일대에서 농성하다 최후를 맞은 것으로 보이지만, 역사에서는 그가 도망치다 화전민들에게 발각되어 해를 입어 죽었다거나,(<삼국사기>) 산골짜기에서 이틀 밤을 머물다가 허기져서 내려와 보리 이삭을 훔쳐먹다 성난 백성들에게 맞아 죽었다고 되어 있다.(<고려사>)
눈 덮힌 산정호수에서 바라본 명성산산정호수의 도망가는 궁예 그림산정호수의 궁예 동상
백성들에 의해 처단되었다는 <삼국사기>나 <고려사>의 기록 역시 크게 믿을 바는 못된다. 고려 사람에 의해 기록된 <삼국사기>의 궁예 관련 내용은 이렇게 처리하는 것이 태조 왕건에게 누를 끼치지 않는 가장 깔끔한 방편이었을 터이다. 하지만 궁예의 저항은 좀 더 지속되었던 듯하니, 명성산 아래 위치한 운악산에 궁예가 쌓았다는 궁예산성과 그가 기거했다고 전해지는 대궐터가 있다. 궁예는 이곳 운악산에서 약 반년을 저항하다 대궐터 아래 무지치 폭포에서 최후를 맞았다고 전해진다.
무지개 폭포라고도 불리는 무지치 폭포는 전체 길이 200m에 이르는 큰 폭포로서 겨울철 빙벽등반으로 유명한 곳이다. 궁예는 밀려드는 왕건의 군사와 싸우다 이곳에서 죽었다고 하는데, 일세의 영걸이 최후를 맞은 장소로서 부족함이 없다. 궁예는 신라의 정예병을 이끌고 무진주(武珍州)에 진주한 후백제의 견훤이나 패서(浿西)의 지벌(地閥)을 배경으로 성장한 고려 왕건과 달리 아무런 배경이나 지벌 없이 오직 맨 주먹 하나로 일어나 나라를 세운 그야말로 입지전적 풍운아였다.
궁예의 전설이 쓰여 있는 전망대 홍폭(=무지개폭포) 안내문전망대에서 당겨 본 무지치폭포하산길에 가까이서 찍은 사진무지치 폭포 겨울철 빙벽등반타이탄산악회 등반사진첩에서 발췌
그러나 패서인의 붕당이 그를 포악한 임금이라는 누명을 씌워 자리에서 끌어내렸던 바, 그들 패역무도한 패서인에 쫓기던 궁예는 결국 이곳 운악산에서 최후를 맞았다. 신선대와 이어지는 치마바위를 지나 무지치 폭포의 위쪽으로 조금 올라가면 옛날부터 대궐터라고 불린 건물터를 만나게 된다. 대궐터로 간주하기엔 면적이 너무 협소해 보이지만 이를 극복하려는 듯 건물터가 3단으로 조성돼 있다. 이 터에서는 옛 기와조각과 토기조각이 수습되기도 하였다.
대궐터 가는 길신선대의 위용신선대의 오른편의 치마바위대궐터 가는 길의 직벽궁예 대궐터에서 바라본 산하토지박물관 유물조사팀이 수습한 대궐터 유물 / 데일리안사진
대궐터 위쪽에 20여 미터 가량 남은 성벽의 흔적이 있다. 높이 2m, 폭 1m 정도이다. 그중에는 문지(門址)의 흔적도 있다. 이 정도가 궁예의 흔적으로 보이며 정상 가까이에 있는 약 3km의 운악산성은 궁예와 연결시키기 힘들다. 궁예의 잔여세력이 쌓을 수 있는 정도를 넘어서기 때문이다 (공교롭게도 운악산성 역시 축성에 관한 초기 기록이 없다) 전설에 따르면 궁예가 죽자 산성을 지키던 병사들이 사용하던 무기들을 우물에 던지고 뿔뿔이 달아났다고 한다.
그래서 우물을 발견하면 돈을 벌 수 있다는 소문에 찾겠다는 사람들이 지금도 나타난다는 후문이다. '나무위키'에도 그런 설명이 있다. 하지만 막상 가보니 요행이라면 모를까, 궁예 궁궐지에서 우물 찾기보다 한강 줄기에서 사금 찾기가 나아 보인다. 내친김에 다음 주에는 최근의 경기 침체와 비례에 열풍이 불고 있는 한탄강 사금 찾기에 도전하려 한다. 만일 사금을 캔다면 장소를 공개할 예정이니 많은 성원 부탁드려요. ^^
궁예성 북문지 성벽으로 추정되는 곳북문지 성벽의 치(雉)치에서 바라본 산하잔존하는 성벽 구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