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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박원종이 중종반정을 일으킨 이유
    잘 알려지지 않은 흥미로운 역사 이야기 2025. 9. 3. 22:27

     
    남양주시 와부읍 도곡리 산31에 있는 박원종 무덤의 문석인은 이제껏 내가 본 조선시대의 어느 석인상보다도 크다. 그 크기는 태조 이성계 무덤인 건원릉 문석인을 능가한다. 사대부 무덤 문석인의 크기가 왕릉의 것을 능가하는 것은 사실 불법이다. 이에 대해 잠시 설명 드리자면, 조선 왕릉의 경우 <국조오례의 / 흉례>에 문인석은 높이는 8척 3촌(약 250cm), 무인석은 9척(약 270cm)이라고 명시되어 있다.  
     
    사대부의 경우는 조선 초까지는 별도의 규정이 없다가 성종대에 비로소 그 크기를 법제화하였는데 석인의 경우 1품에서 2품까지는 5척 5촌(약 170cm), 3품에서 6품까지는 5척(약 155cm), 그 이하는 4척 5촌(약 140cm)으로 정하였다. 그러나 실제로는 제대로 지켜지지 않아서 대략 150cm에서 2m 내외의 크기로 만들어졌으며 지방과 가문, 그리고 피장자가 누렸던 생전의 권력 정도에 따라 크기가 달라졌다. 
     
    하지만 사대부 무덤의 것이 왕릉을 능가하는 경우는 없었는데, 오직 중종 때 권신인 박원종의 무덤 만이 예외적이다. 그의 무덤 문석인의 높이는 263cm로 왕릉에 버금가거나 능가한다. 사진으로 보면 아래와 같은 바, 그가 생전에 누린 권력이 어느 정도였는가를 능히 짐작할 수 있다.  

     

     

    박원종의 묘
    우측 망주석과 문석인
    좌측 망주석과 문석인
    우측 문석인 / 아래는 55cm 길이의 배낭이다.
    이성계의 건원릉
    우측 망주석
    좌측 망주석과 문석인 / 앞에 서 있는 사람과 크기가 비견된다.


    박원종은 성종·연산군 때의 무신으로 본관은 순천, 자(字)는 백윤(伯胤)으로 판서 박중선의 아들이다. 성종17년(1486) 무과에 급제한 후 성종 23년 성종의 특지로 동부승지에 발탁됐고 공조참의와 병조참의를 역임하였다. 그의 누나인 승평부대부인 박씨는 성종의 친형인 월산대군의 부인이 됐는데, 자식이 없던 월산대군은 손아래 처남인 박원종을 친동생처럼 사랑하였고, 이로 인해 월산대군 사후 성종이 형의 죽음을 애도해 박원종을 동부승지로 삼았다.
     
     

    서울 망원동 망원정
    망원정에서 본 한강 / 제 동생(성종)에게 왕위를 빼앗긴 비운의 월산대군이 시름을 달랬던 정자이다.

     
    박원종은 연산군 때도 왕의 사랑을 받았으니 병조참의 · 경상좌도 병마절도사 · 평안도병마절도사 · 강원도관찰사를 역임하였고, 강원도관찰사 시절인 연산군 9년 평해 월송정(越松亭)을 중건했다. 연산군 11년인 1505년에는 지중추부사를 거쳐 경기도관찰사 · 함경도병마절도사가 되었고 평성군에 봉해지고 도총부도총관을 겸하였다. 
     
     

    평해 월송정 / 고려 때부터 전해오던 정자를 박원종이 중건했다.
    월송정에서 본 바다 / 관동팔경 중 가장 남쪽에 있다. 경북일보 DB


    박원종이 역사에 이름을 남기게 된 것은 연산군 12년인 1506년 성희안, 유순정 등과 함께 연산군을 폐위시키는 중종반정을 일으켰기 때문이다. 다행히도 반정은 성공해 연산군을 몰아낸 후 진성대군을 중종으로 옹립하였고, 박원종은 정국공신 1등에 책록되고 우의정에 올랐으며 평원부원군이 되었다. 중종은 반정세력에 의해 옹립된 왕이니 당연히 실권이 없었고, 세상은 박원종이 쥐락펴락하였다. 
     
    그가 우의정에 제수되었을 때 "한낱 무부(武夫)가 정승의 직책을 맡을 수 없다"고 사양하였으나 임금이 "국론(國論)이니 따르라"하여 하는 수 없이 명을 받들었다 하는데, 그저 제스처에 불과했을 것이다. 아무튼 무신 출신으로 정승이 된 사람은 세조때 이시애의 난을 평정해 영의정에 오른 귀성군 이준과 박원종 두 사람 뿐이다. 박원종이 중종반정을 일으킨 이유는 누나 승평부대부인 박씨의 자결과 무관치 않다는 것이 중론인데, 그 전후 사정을 정리한 앞서의 글을 옮기자면 다음과 같다. 
     
    1489년 월산대군이 죽자 성종은 무던히 슬퍼하며 국장에 준하는 극진한 예로써 월산대군의 별서(別墅)가 있는 경기도 고양군 원당면 견달산 기슭에 장사 지냈다. 슬프기로 따지자면 월산대군의 아내 순천 박씨가 더할 터, 남편의 무덤 주변에 흥복사(興福寺)라는 작은 절을 지어 불공을 드리며 슬픔을 달랬다. 하지만 불교를 믿는 박씨에 대한 조정 대신들의 비난이 일자 이후로는 안국방 연경궁(延慶宮)에서 조용히 살았다.
     
    * 흥복사는 재실(齋室) 규모의 작은 절로 현재 월산대군 사당 서쪽 밭 가운데 그 흔적만이 남아 있고, 연경궁은 풍월정이 있던 안국동 월산대군의 사저로 현 풍문여고 자리에 있었다.
     

    고양시 견달산 월산대군의 묘
    월산대군의 사당 석광사

     
    혼자 남은 그녀의 낙(樂)은 서자 덕풍군(德豊君)과 자신보다 먼저 죽은 여동생의 어린 딸을 키우는 것이었는데, 연산군 5년(1499)에는 왕의 세 살 배기 큰아들도 맡아 길렀다. 이상하게 여겨질지 모르나 왕실에서 그 자식을 혈연 있는 사가(私家)에 맡겨 키우는 일은 흔한 경우였다. 박씨는 연산군의 아이 또한 정성스레 돌보았으며, 그 아이는 일곱 살 되던 연산군 9년 세자로 책봉되면서 궁궐로 돌아갔다.

     

    이때 연산군이 제 자식을 보러 승평부부인의 집에 자주 들렀다. 그러면서 제 큰엄마인 승평부부인 박씨를 겁탈했다고 하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1506년 연산군은 제 자식을 키워주고 성종의 어머니이자 자신의 할머니인 소혜왕후의 병환을 돌보아준 박씨에 대한 고마움을 치하해 다음과 같이 포상했는데, 실은 이것이 간통에 대한 보상이라는 것이다.  
     
    "절부(節婦)·효부(孝婦)는 반드시 정려(旌閭)를 해야 한다. 이정(월산대군)의 처가 소혜왕후께서 미령(未寧)하실 때 곁에서 모시기를 게을리하지 않았고 평시에 시봉(侍奉)할 때도 뜻을 어김이 없었으며, 또 춘궁(春宮, 왕세자)을 교양할 때도 사랑하여 돌보기를 자기가 낳은 자식 같이 하였으니, 마땅히 포양(褒揚)하는 은전을 내려 뒷사람들을 권장해야 하겠다"하고, 이어 또 전교하기를,
     
    "승평부부인(昇平府夫人)의 부인이란 글자 위에 대(大) 자를 더 넣어 도서(인장)를 만들고, 문신(文臣)에게 책문(冊文)을 짓도록 하라" 하였다. (<연산군일기> 62권)

     

    연산군이 승평부부인 박씨를 돌보아준 일에 대해서는 이외도 많은 얘기가 전한다.  그리고 그 아래 붙은 사관의 논평은 연산군이 승평부부인 박씨를 범했다는 데 의심의 여지를 없게 만든다. 연산군이 박씨와 함께 자다가 꿈에 월산대군 이정이 나타나자 재수 없다며 긴 쇠 지팡이를 만들어 월산대군의 묘 구덩이 가운데 꽂게 하였는데, 그때 천둥 치는 소리와 같은 굉음이 들렸다는 것이다. 그래서 사관은 이렇게 썼다.  
     

    사신은 논한다.(※ 사관 개인 생각이란 뜻) "박씨는 수십 년을 과거(寡居)하며 불교를 받들고 믿어 정(婷, 월신대군 이정)의 묘 곁에 흥복사를 세우고, 따라서 명복을 비느라 자주 그 절에 가므로 사람들이 혹 의심하기도 하였다. 왕이 박씨로 하여금 그 집에서 세자를 봉양하게 하다가 세자가 장성하여 경복궁에 들어와 거처하게 되면서는, 왕이 박씨에게 특별히 명하여 세자를 입시(入侍)하게 하고, 드디어 간통을 한 다음 은(銀)으로 승평부 대부인이란 도서를 만들어 주었다. 어느 날 밤 왕이 박씨와 함께 자다가 꿈에 정(월산대군 이정)을 보고는 밉게 여겨 내관으로 하여금 한 길이나 되는 철장(鐵杖)을 만들어 정의 묘 광중(壙中)에 꽂게 하였는데 우레와 같은 소리가 들렸다."

     

    그런데 연산군12년인 1505년 승평부대부인 박씨가 느닷없이 자살을 하였고, <연산군일기>은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월산대군 이정의 처 승평부부인 박씨 죽었다. 사람들이 왕에게 총애를 받아 잉태하자 약을 먹고 죽었다고 말했다.  

     

    말한 대로 박원종은 승평부부인 박씨의 동생이다. 당시 함경도절도사였던 그가 이 일을 묵과할 수는 없을 터, 수하와 측근들을 데리고 와 왕을 몰아냈다고 한다. 그런데 혹자는 이상의 이야기는 모두 박원종이 반정의 명분을 만들기 위해 지어낸 픽션이라며, 승평부부인 박씨를 옹호하기도 한다. 당시 30살인 연산군이 적어도 53세는 되었을 여자를 왜 건드렸겠냐고도 묻는다. 또 그 나이에 과연 임신이 가능했겠는가 묻기도 한다.

     

     

    월산대군의 무덤 뒤의 승평부부인의 무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이상은 모두 사실인 듯하다. 또라이 연산군이기에 가능한 이야기다. 다만  박씨 부인은 간통이 아니라 불가항력이었을 것이다. 아마도 그래서 자살했을 것이다. 아무튼 그녀는 죽어 남편 곁에 묻혔는데, 그 무덤을 보면 왕족이라 크긴 하지만 어쩐지 을씨년스럽다. 그리고 일반적인 경우처럼 사후 합장하여 한 무덤 안에 두거나 옆으로 나란히 만들거나 하지 않고 남편의 무덤 뒤에 숨듯 만들어 두었다. 그 이유는 모르겠다. 부끄러우니 숨어 있으라는 것인지, 아니면 든든한 남편 뒤에서 안심하고 편히 쉬라는 것인지.....

     

    이상한 무덤은 또 있다. 여주읍 능현리 311에 있는 휘숙옹주의 무덤이다.  휘숙옹주는 성종의 3녀로 어머니는 후궁 명빈 김씨이다. 휘숙옹주는 임사홍의 아들 풍원위 임숭재와 혼인했다. 연산군은 형제들과의 사이도 좋지 않았는데 휘숙옹주는 다른 형제들과는 달리 연산군에게 여러 차례에 걸쳐 땅과 노비를 하사받았다. 이것 역시 간통의 보상이라는 주장이 있는데, 사실이라면 이복오빠와의 근상(近相)이다.

     

    하지만 이것도 남편 임숭재에 비하면 새발의 피다. 임숭재는 제 아버지 임사홍 뺨 칠 정도의 간신이어서, 여색을 밝히는 연산군을 위해 남의 집 첩을 빼앗아 바쳤으며, 창덕궁 곁에 집을 두고 뻑하면 궁에 들어가 왕과 함께 혼음하였다. 아무튼 노는 데는 일가견이 있었으니 장악권 제조로서 음악에 능했고 특히 처용무에 뛰어났다. 중종반정이 일어나자 부관참시당했는데, 휘숙옹주와의 합장묘인 무덤은 아이러니하게도 묘표가 정갈히 아름다우며 정5각형 봉분으로서 특이하다. 

     

     

    휘숙옹주와 풍원위 임숭재의 힙장묘

     

    본론으로 되돌아와 말하면, 박원종은 반정에 성공한 후 연산군이 모은 팔도 흥청(기생) 300명과 그들을 수용할 큰 집까지 하사받았다. 그의 집은 대·중·소 3개의 문을 통과해야 이를 수 있었고 손님이 오고 갈 때 대문마다 머리에 꽃을 꽂은 화려한 복색의 기생들이 영접을 하고 마중 나갔다. 그는 뇌물을 과도하게 밝혔으며 지나치게 호사한 생활을 한다고 비난받았지만 아랑곳하지 않았다. 좋게 말하자면 300명에 달하는 기생들을 먹여 살리기 위한 방편일 수도 있었다. 

     

    <중종실록> 박원종 졸기에는 "뇌물이 사방에서 모여들고.... 남에게 이기기를 좋아하여 임금 앞에서도 말과 얼굴빛에 표시가 났다. 연산의 궁궐에서 나온 이름난 창기(娼妓)들을 많이 차지해 여종으로 삼고 별실을 지어 살게 했으며 거처와 음식이 분수에 넘쳐나 사람들이 그르게 여기었다"라고 했다. 박원종은 42세의 젊은 나이에 등창으로 죽었는데, 산해진미, 주지육림의 생활과 무관치 않아 보인다.

     

     

    이수에 두 마리 용이 꿈틀대는 박원종 신도비 / 전체 325cm
    안내문
    박원종의 묘
    묘표
    장명등
    박원종의 묘 앞에 자리한 아들 박순 부부 묘
    박순의 묘표
    삼족오가 뚜렷한 이수
    조산인 운악산
    박원종 사당 세덕사 숭모문
    세덕사
    세덕사 가는 길 / '순천박씨 장학생 환영'이라는 현수막이 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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