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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홍제동 사현사 탑과 호랑이보다 무서운 것
    토박이가 부르는 서울야곡 2025. 8. 31. 21:09

     

    서울 서대문구 독립문과 홍제동 사이에 무악재라는 고개가 있다. 지금은 여러 번의 공사로 레벨이 낮아졌으나 조선시대에는 매우 험하고 가빠은 고갯길이었던 듯, 성종 19년(1488) 명나라 사신 동월(董越)은 <조선부(朝鮮賦)>에서 무악재에 대해 다음과 같이 읊었다.

     

    "여기는 천 길의 험한 산세를 이루었으니 장수 한 명이 지키면 천 명의 군사를 대적할 만하다. 서쪽으로 난 관문을 바라보니 겨우 말 한 필만 지나갈 수 있을 정도다."

     

     

    <한국의 백년>에 실린 1907년의 무악재
    1966년의 무악재 / 홍제동에서 무악재 쪽을 찍었다.


    조선시대 무악재는 호랑이가 자주 출몰하는 곳으로도 유명했다. 그래서 사람을 모아 건넜다 하여 '모아재'라고 불렸으며, 이것이 무악재의 어원이라고도 한다. 조선초의 대덕인 무학대사로부터 나왔다는 설도 있으나 이름만 비슷할
    뿐 그에 얽힌 전설 같은 것은 전해지지 않는다. 북동쪽으로는 인왕산, 남서쪽으로는 안산(鞍山)이 있는데, 인왕산에 다수 서식했다는 호랑이가 이곳까지 출몰해 행인들에 호환(虎患)을 입혔다. 

     

    안산은 말안장같이 생긴 산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안산에 있는 고개는 기슭을 따라 넘는다는 뜻으로 길마재 고개라 불렸으며, 무악재와 마찬가지로 호환을 당하는 사람이 많았다고 한다. 한자로는 안현(鞍峴)인데, 조선 인조 때인 1624년, 평안도에서 거병해 남하한 이괄의 반군(叛軍)이 관군과의 건곤일척의 전투를 벌인 곳이기도 하다. 이괄은 조선왕조 건국 이후 변방에서 거병해 한양을 점령한 유일무이한 장수였으나 안현 전투에서 패해 목숨을 잃었다.

     

     

    안현전투가 벌어진 안산
    안산 정상의 봉수대 / 관군은 이 봉수대를 선점해 전투를 유리하게 이끌었다.
    이괄이 죽은 경안천 / 안현 전투에서 패한 이괄은 곤지암 쪽으로 도망갔다가 이곳 경안천 부근에서 부하들에 의해 죽었다.

     

    고려시대에 무악재는 모래재, 혹은 사현(沙峴)이라 불렸으며, 그때도 마찬가지로 호환이 잦았던 듯하다. 이에 1045년 이 길에 혜소국사(慧炤國師, 972~1054)가 사현사(沙峴寺)와 객관을 건립했다. 혜소국사의 법명은 정현(鼎賢)으로 1060년(문종 14) 칠장사에 세워진 혜소국사비에 따르면 삼각산 사현 고갯길을 넘는 사람들이 호랑이와 도적떼에 시달리자 혜소국사 정현이 절과 객관을 설치해 사람들의 왕래를 순조롭게 만들었다고 한다.

     

     

    칠장사 혜소국사비 (보물 제488호)

     

    이 소식을 들은 국왕 정종은 사찰과 객관을 '홍제원'(弘濟院)과 '서인관(棲仁館)'이라 사액하고 많은 시주를 하였다. '널리 사람을 구제하는 절'과 '인의(仁義)가 머무는 객관'이라는 뜻이다. 이중 홍제원은 지금도 홍제동의 이름으로 남아 있다. 그러나 정작 사현사는 없어졌는데, 그 위치마저 홍제동 유진상가 쪽인지 그 건너편 홍제교 터 부근인지 불분명하다. 물론 건물 터 같은 것은 사라진 지 오래고, 지금은 모래내라는 지명으로써 옛 모래재의 흔적을 더듬을 수 있을 뿐이다.

     

     

    홍제삼거리의 모래내로 표지판
    홍제동 유진상가
    홍제천변 홍제교 터

     

    다만 국립중앙박물관 야외전시장에 사현사지(沙峴寺址)에 있었던 석탑이 홍제동 오층석탑이라는 이름으로 남아 있다. 들리는 말에 의하면 이 탑은 현 홍제동 유진상가 부근에 있었으나 시가지 확장에 따라 1970년 경복궁 경내로 옮겨졌다고 한다. 이 탑이 사현사에 세워진 탑이라는 것 역시 위 혜소국사탑비의 비문에 의해 밝혀진 사실로서 고려 정종 11년(1045) 사현사 창건 당시 함께 조성된 것임이 비석에 명기돼 있다.  

     

    홍제동 오층석탑은 현재 기단부와 상륜부가 망실된 채 5층의 비신만이 남아 있는 상태이나 그럼에도 안정감을 선사하며,  탑신에 받침처럼 덧붙인 돌 및 탑신 장식조각 등이 많은 공력이 들어간 탑임을 짐작케 한다. 전체적으로는 백제탑의 느낌도 있어 백제인의 후예가 만든 탑일지도 모른다는 상상력도 제공하는 고려 전기의 아름다운 석탑이다. 

     

     

    홍제동 오층석탑 (보물 제166호)
    안내문

     

    홍제동 사현사의 건립유래는 이처럼 의미 깊다. 당대의 여행객들을 호환과 도적으로부터 보호하고자 절과 객관을 세운 것인데, 고려시대 같은 뜻으로 세워진 절로는 천안시 성환읍에 건립된 봉선홍경사(奉先弘慶寺)를 들 수 있다. 절 이름 앞의 '봉선'(奉先)은 고려 안종(安宗)이 절의 완성을 보지 못하고 붕(崩)함에 아들 현종(顯宗)이 절을 완성하였던 바, 아버지의 뜻을 받든다는 의미로서 붙여진 이름이다. 파주 혜음원지에 있던 혜음사(惠陰寺)도 마찬가지 경우이다.

     

     

    봉선홍경사 갈기비 (국보 제7호)

     

    차제에 대한민국 정부에서는 국민들을 위해 이 같은 노력을 하고 있는가 묻고 싶은데, 작금의 상황은 오히려 정부가 호환 마마 도적보다도 더 무서운 듯싶다. 간단히 설명하자면 우리나라는 세계 4위의 이민국이다. 해외로 이민을 떠나는 인구 비율이 세계에서 4번째로 높다는 뜻이다. 이민 사유로서 가장 큰 것이 세금이다. 반면 정부의 씀씀이는 일일이 열거하기 힘들 정도로 매우 방만하며, 게다가 사회주위 경제를 흉내내며 자산가의 것을 뻬앗으려고도 한다. 

     

    실질적으로 나라 경제를 이끄는 사람들은 자산가이다. 일반 서민들도 마찬가지지만, 현실이 허락지 않아 머물 뿐 이민을 가고자 하는 희망하는 사람은 자산가 쪽이 훨씬 더 많을 것이다. 다산 정액용은 '가혹한 정치는 호랑이보다 무섭다'(苛政猛於虎)고 한 공자님 말씀과 비슷한 말을 <목민심서>에 담았는데, 살면서 이 문장이 요즘처럼 다가온 때가 없다.  

     

    "근래에 와서 조세와 부역이 무겁고 번잡하며 관리들의 횡포가 심하여 백성들은 나라를 믿고 살 수 없게 되었다. 이리하여 모든 사람이 전부 난(亂)을 생각하게 되었으니 요언망설(妖言忘說)이 동(東)에서도 서(西)에서도 일어나고 있다. 이것을 법에 비추어 처단한다면 백성은 한 사람도 살아 있지 못할 것이다." 

     

     

    목민심서
    정약영이 살던 광주 마재 여유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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