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헤파이스테이온 - 가장 불우했던 신에게 남겨진 가장 완전한 신전미학(美學) 2019. 7. 28. 06:55
그리스 아테네 헤파이스테이온(Hephaisteion)
헤파이스테이온은 대장장이 신이자 불의 신인 헤파이스토스의 신전이다.
헤파이스테이온의 근경(近景)
오늘은 사진부터 몇 장 올리고 시작합니다. 설명을 붙인 대로 위 사진들은 아테네의 아고라 근방에 있는 대장장이 신 헤파이스토스의 신전입니다. 이 신전을 특징지을 수 있는 것은 보시는 바 그대로 완벽한 보존상태이니 맨 아래 위키피디아에서 빌려온 사진은 마치 엊그제 지은 신전 앞을 한 여성이 걸어가는 듯 보입니다. 사실 엊그제는 아닐지라도 위 사진들을 보면 이 헤파이스테이온은 근방의 파르테노스 신전이나 제우스 신전에 비해 한참 뒤에 지어졌을 듯합니다.
하지만 실상은 다르니 기원전 449년에 지어진 파르테논보다 2년 먼저 착공됐습니다. 다만 파르테논 공사에 밀려 그보다 23년 뒤인 기원전 415년에 완공되었을 뿐입니다. 기원전 457년에 완공된 올림피에온(제우스 신전)보다는 42년 뒤입니다만 그리 큰 차이는 아닐 것입니다. 올림피에온은 올림픽이 열릴 때마다 성화가 채화되는 곳이라 우리의 눈에 익은 장소인데, 지금 남아 있는 올림피에온의 흔적을 보면 42년이라는 그 차이는 정말로 아무 것도 아니라는 것을 느끼게 해줍니다. 게다가 올림피에온은 그리스 문화에 탐닉해 있던 로마제국의 하드리아누스 황제(재위 AD 117-138) 때 다시 손 본 것이라고 합니다.
흔적만 남은 제우스 신전 올림피에이온.(104개 기둥 중 15개만 남았다) 멀리 아크로폴리스 위의 파르테논 신전이 보인다.
올림픽 성화 봉송의 출발지 제우스 신전. 태양열에 의해 채화된다.
다만 헤파이스테이온은 파르테논이나 올림피에온에 비하면 그 규모가 많이 작습니다. 참고적으로 말씀드리면 파르테논은 약 70x31m이고 올림피에온은 96x40m로 매우 크지만, 헤파이스테이온은 32x18m로 파르테논의 반, 올림피에온의 1/3에 지나지 않습니다. 기둥 수도 동서 6개, 남북 13개로, 총 104개였다는 올림피에온에 비하면 거의 왕궁과 민가 수준이라고나 할까요. 게다가 헤파이스테이온은 기둥을 도리아 오더(doric order=도리스 오더)를 채택해 코린트 오더를 사용한 화려한 올림피에온에 비하면 비주얼에서도 많이 뒤쳐졌을 것입니다.
물론 단순한 도리아 오더를 사용했다 해서 그 건물의 격이 떨어지는 것은 절대 아닙니다. 아테네 시의 주신(主神)이자 지혜의 여신인 아테나를 모심으로써 아크로폴리스의 간판 신전이 된 저 유명한 파르테노스(동정녀의 뜻) 신전도 도리아 오더를 채택한 건물입니다. 그럼에도 그 신전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건축물로 손꼽히고, 본인도 그와 같은 제목으로 본 블로그에 포스팅을 한적이 있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건축물') 다만 여기에는 조건이 살짝 붙는데, 큰 건물에 도리아 오더를 채택하며 더욱 웅장하고 아름답게 보이지만 작은 건물은 그저 단순하게 보입니다. 솔직히 그건 부정할 수 없을 것 같 습니다.
앞서 설명을 했지만 여기서 그리스 건축의 기둥 양식을 다시 소개하면 오른쪽의 3가지 오더로서, 그중 왼쪽이 도리아 오더이고 맨 가운데가 이오니아 오더, 오른쪽이 코린트 오더입니다. 이것을 시대나 지역에 따른 분류를 하신 분도 있지만 대체적으로 시대나 지역에 상관없이 선택적으로 쓰여졌다는 것이 중론입니다. 예를 들어 아크로폴리스의 파르테논은 도리아 오더를 채택한 반면 에레크테이온은 이오니아 오더를 선택해 지어졌기 때문입니다. 아마도 두 건물 간의 조화를 생각해 그리 한 것 같습니다. 아래의 사진은 그 아름다운 조화를 잘 나타내줍니다.
영국 건축가 하딩이 설계하여 구한말에 건립된(1900-1910) 덕수궁 석조전은 이오니아 오더를 채택한 우리나라의 대표적 건물이 되겠으며, 이를 흉내내 만들었지만 기둥양식에서 차이를 준 경희대학교 본관건물은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코린트 오더의 건축물이 되겠습니다.
파르테논의 도리아식 기둥과 에레크테이온의 이오니아식 기둥
에레크테이온에서 바라본 파르테노스 신전
규모를 떠나 도리스 오더를 사용하는 건물에서의 유리한 점은 페디먼트* 아래의 메토프**가 건물을 웅장하게 보이는 효과를 만들어준다는 것입니다. 헤파이스테이온은 이로 인해 작은 건물이 크고 웅장하게 보이는 덕을 보고 있습니다. 기둥 중앙부가 가늘게 보이는 착시 현상을 방지하기 위해 기둥의 가운데 부위를 부풀려 제작한 엔타시스(Entasis, 배흘림), 건물의 보가 아래쪽으로 처져 보이는 현상을 방지하기 위해 건물 중앙의 보를 약간 위로 불룩하게 만드는 라이즈(Rise)도 헤파이스테이온을 돋보이게 만드는 건축기법들입니다. 이러한 기법은 우리나라의 무량수전을 비롯한 고건축물에서도 찾을 수 있습니다.
* 페디먼트: 정면과 후면의 삼각형 박공
** 메토프: 페디먼트와 보 사에에 끼어진 사각형 판석으로 도리아식 신전에서만 형성되는 특유의 양식
1923년에 찍은 헤파이스테이온
다음은 안을 좀 볼까요? 앞에서 사진과 함께 보여드렸지만 파르테노스 신전은 그리스 독립 전쟁 당시 크게 폭파돼 안타깝게도 신의 방인 켈라를 거의 살필 수 없었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건축물') 반면 헤파이스테이온에서는 켈라(cella)를 볼 수 있음은 물론이요, 입구 현관인 안타(anta)의 안티스(antis, 현관의 두 기둥)까지 살필 수 있으며 건물 상부의 프리즈 장식 또한 눈에 들어옵니다. 헤파이스테이온의 중앙 켈라는 2중의 열주로 둘러싸여 있는 페리스타일이라는 특별한 형태를 나타냅니다.
헤파이스테이온의 평면도
헤파이스테이온의 켈라
켈라 입구(오른쪽 방)
현관의 두 기둥(Colums in antis)과 프리즈(frieze)
프리즈의 목 없는 신상들. 중세기 이후 동방정교회의 교회로 사용되며 그리스 신들의 목이 모두 달아났다. 차라리 쓰지나 말지.
헤파이스테이온의 야경
이와 같은 헤파이스테이온의 완전한 모습은 지금 복원 공사가 진행 중인 파르테노스 신전을 비롯한 많은 그리스 신전의 모델이 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비록 그 규모가 작아도 말입니다. 하지만 앞에서 말한 제우스의 신전 올림피에온은 영원히 복구되지 못할 것 같습니다. 그 훼손도가 너무 심한 까닭이니, 그와 같은 경우에는 유네스코에서 복원 허가를 내주지 않는다고 합니다. 우리나라도 얼마전 월지(안압지)의 동궁을 복원하려고 잔뜩 준비를 했다가 유네스코로부터 보기 좋게 퇴짜를 맞았죠. 인류문화유산의 보편적가치에 벗어난다 것이 그 이유였는데, 한마디로 '아무 근거도 없는 걸 네 멋대로 만들지 말라'는 뜻입니다.
이건 참 잘하는 것 같습니다. 신라 시대 건물이 단 한 채도 남아 있지 않은 마당에 어떻게 동궁을 복원하겠다는 것인지, 생각할수록 웃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앞서 파르테노스 신전에 관해 쓸 때 황룡사 목탑이 재현될까 겁난다고 했는데, 이제 그럴 일은 없을 것 같아 안심됩니다. 1,200억원이나 되는 국민의 혈세로 어떤 흉물을 만들어낼까 늘 조마조마했는데, 올해 유네스코로부터 꿈도 꾸지 말라는 통보를 받았다지요? 아무튼 그건 그렇고, 다음 회에서는 이 신전의 주인인 대장장이 신 헤파이스토스 및 헤파이스테이온이 어떻게 지금껏 온전히 보존될 수 있었든가에 대해 포스팅해보겠습니다. '가장 불우했던 신에게 남겨진 가장 완전한 유산'에 대해 말입니다.
월지의 야경
경주시가 복원하려다 퇴짜 맞은 월지의 동궁지
대표적 과장 복원작 신라 월정교
절대 이렇듯 거창하지 않았으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