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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오토 디 본도네의 예술 세계미학(美學) 2019. 2. 19. 01:17
훌륭한 예술가들에게는 흔히 위대한 예술혼이 동반된다. 얼어죽어도 곁불은 쬐지 않는 지독한 자존심은 그 예술혼의 표상이니 당연히 배고픔은 감내해야 한다. 꼭 부정한 시대와 싸우는 외로운 영혼은 아니었지만 반 고흐는 생전에 그린 900여 점의 작품 중 단 한 점밖에 팔지 못했던 바, 죽을 때까지 가난할 수밖에 없었다. 이와 같은 예술가의 일생은 가끔 우리의 심금을 울리는데, 그것이 드라마나 영화로 제작되어 고착화되는 경우도 있다. 그래서 우리는 예술가들을 가난하고 괴팍하지만 영혼만큼은 순수한 사람들로 인식하게 된다.
그러나 이같은 생각은 바보같은 생각이다. 역대의 유명 예술가들은 대부분 크게 돈 걱정을 안 하고 살았으며(명성을 얻으면 부가 동반되는 것이 상례이므로) 반드시 영혼이 순순한 것도 아니었다. 순수한 사람이 있는 반면 그렇지 않은 놈도 부지기수였으니 다른 직업군의 사람들과 크게 다를 것이 없었다. 오늘 소개하려는 이탈리아의 화가 지오토 디 본도네(1265-1337)는 그렇지 않은 놈의 대표적인 케이스였다.
지오토 디 본도네가 그린 스크로베니 성당 벽화
성당 중앙 벽에 그려진 '예수의 심판'
지오토 디 본도네의 조각상
지오토 디 본도네는 '현대 회화의 시작점', '중세 시대의 비잔틴 미술을 마감하고 르네상스의 서막을 연 화가이자 건축가'로 일컬어진다. 흔히 르네상스 미술을 이끈 미켈란젤로를 천재 화가라 부르지만, 위 스크로베니 성당의 중앙 벽 '예수의 심판'이라 이름 붙여진 그림을 보면 로마 시스티나 대성당에 그려진 미켈란젤로의 '최후의 심판'은 지오토 그림의 모방작임을 쉽게 알 수 있다.(미켈란젤로는 지오토의 원근법까지 흉내냈다)
미켈란젤로의 '최후의 심판'
뿐만 아니라 시스티나 대성당에 그려진 나머지 종교화들도 모두 지오토가 창안한 그림 서술 방식을 답습한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지오토의 사후 150년이 지난 일인 것을 보면 지오토 디 본도네의 예술이 얼마나 선구적이었는가를 알 수 있게 해준다.(어린 시절 미켈란젤로가 지오토의 작품을 모사하며 그림 공부를 했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특이하게도 그는 화가의 직업을 사채업과 병행했다. 당연히 그림을 그리는 것보다 고리대금이 더 돈이 되기 때문이었는데, 그림으로 벌어들인 돈이 그 밑천이었다. 돈이 돈을 번다는 것을 안 그는 그림을 더욱 열심히 그려 자본금을 키웠고 그 돈을 굴려 더욱 큰 돈을 벌었다. 말하자면 그는 예술의 가치보다도 돈의 가치를 소중히 여긴 사람이었다.
지오토의 초상화는 영락없는 채권추심자로 온 조폭의 모습이다.
돈에 환장한 지오토가 무리한 주문을 받는 경우는 다반사였다. 이에 반드시 회벽이 마르기 전 그려야 되는 프레스코화를 몇 달 후에 그리는 경우도 있었고, 공기(工期)를 맞추지 못한 건축물도 허다했다. 아래의 피렌체 대성당의 종탑(캄파닐레)은 그가 하단부만을 쌓고 사망한 경우지만(그의 제자인 안드레아 피사노와 프란체스코 탈렌티가 이어 완성시켰다) 그 유명세 덕분에 '지오토의 종탑(Campanile di Giotto)'으로 불린다.
피렌체 두오모 성당과 지오토의 종탑
하지만 그의 능력은 무척이나 출중하였으니, 아래의 그림은 그가 젊은 나이에 로마 시스티나 대성당의 입구에 그린 것으로서 원근법이 활용된 사례이다.(원근법은 그의 스승인 치마부에가 창안했지만 지오토가 완성한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다만 아래 그림은 지오토의 그림 양식과 달라 그의 것이 아니라는 설도 있다)
'물위를 걷는 예수'(10x14m)
풍랑 이는 바다와 예수를 만나러 가던 베드로가 물에 빠지는 광경이 원근법으로 묘사됐다.
지오토는 1303년, 새로 지어진 스크로베그니 성당의 벽화를 그리기 위해 그해 이탈리아 북쪽 마을 파도바로 가게 된다. 파도바는 베네치아 서쪽 30km 지점에 있는 작은 마을로, 지오토는 사실 성당 측의 벽화 의뢰를 탐탁해 하지 않았다. 로마 바티칸 대성당 쯤이면 모를까, 한 사채업자에 의해 베네치아의 외곽의 작은 마을 파도바에 세워진 멋대가리 없는 성당의 벽화에 자신과 같은 대가의 손이 얹혀진다는 것은 아무래도 자존심이 상하는 일이었다.
스크로베니 성당(Cappella degli Scrovegni)의 외관
그럼에도 그는 결국 파도바를 향했는데, 그 이유는 대강 두 가지로 정리된다. 첫번 째는 당연히 돈이었다. 스크로베그니 성당은 국책사업으로 건설된 당대의 성당과는 달리 베네치아의 사채업자인 스크로베그니가 자신의 개인 돈으로 지은 성당이었다. 그의 가문은 베네치아에서 상인들을 대상으로 하는 고리대금업으로 큰 돈을 모았던 바, 셰익스피어의 '베네치아의 상인'에의 모델 같은 집안이었다. 스크로베그니와 동시대를 살았던 작가 단테 역시 자신의 '신곡'에 스크로베그니의 실명을 이름을 과감히 삽입하자(지옥에서 고통을 받는다) 이에 두려움을 느낀 아들 엔리코 스크로베그니가 파도바에 있던 옛 로마 경기장 땅을 매입하여 성당을 짓게 된 것이었다.
스크로베그니는 이 성당의 실내장식, 즉 마감 벽화를 당대의 유명화가인 지오토에게 의뢰했다. 지오토는 앞서 말한 이유로 그의 제안을 마뜩지 않아 했지만 화료를 대폭 올린 흥정 끝에 수락하게 된다. 사채업자가 돈이 얼마나 돈이 많은지는 누구보다 지오토 자신이 잘 알고 있는 터였다. 대신 그는 하늘나라에 가기를 희망했던 스크로베그니의 희망을 화폭에 담았던 바, 지옥의 악마 밑에서 고통받는 사람들 왼쪽에 성당을 하늘나라에 봉헌하는 스크로베그니의 모습을 그려넣었다.('예수의 심판' 중앙 십자가 아래)
'예수의 심판' 상세도. 왼쪽 사람이 스크로베그니이며 오른쪽은 지오토이다. 지오토는 슬쩍 뭍어 하늘나라에 가려 한 것 같다.
두번 째 이유는 그가 1301년에 목격한 혜성(헬리 혜성) 때문이었다. 그 혜성의 휘황함은 지오토에게 강한 영감을 불어넣기 충분하고도 남음이 있었다. 그는 이 혜성을 예수 탄생 때 동방박사가 목격한 바로 그 별임을 믿어 의심치 않았고 자신이 본 혜성을 '동방박사의 경배'라는 그림에 분명하게 묘사했다.(학자들에 따라서는 그가 묘사한 혜성이 1304년에 나타나 74일 간 목격된 비주기 혜성일 것이라는 주장도 있지만 시기적으로 1301년의 혤리 혜성이 더 가까워 보인다)
지오토의 '동방박사의 경배'는 성당 천장으로부터 두 번째 줄, 말하자면 첫 그림이 시작되기 가장 적합한 곳에 그려졌는 바, 그는 자신이 받은 영감을 최초의 벽화 그림으로 표현했음을 알 수 있다. 꼭 순차적으로 그리지는 않았지만 예수의 탄생이 그 일생에 관한 연작화(連作畵) 중 첫 번째로 장식됨 또한 당연한 노릇일 터였다. 아무튼 이 그림은 역대 그림 중 혜성이 그려진 최초의 사례로 남게 되었는데, 까닭에 ESA(유럽연합 우주기관)가 1985년 혜성 탐사선을 우주로 쏘아보냈을 때 그 이름을 지오토라 명명하는 계기가 되었다.
헬리 혜성과 지오토 탐사선의 가상 이미지
조립 과정의 지오토 탐사선
'동방박사의 경배'는 벌써 세 번째 올린다.
가게 된 연유야 어쨌든 그는 2년 여에 걸쳐 그야말로 '큰 그림'을 완성시킨다. 그 연작화 중의 하나인 '동방박사의 경배'는 이미 다른 챕터에서도 소개했었는데, 그 바로 밑에는 예수가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었다는 성서의 내용을 근거해 그린 '예수의 세족식'이라는 그림이 위치한다. 이 두 그림은, 로마 군인들과 함께 예수를 잡으러 온 유다가 바로 이자임을 알리기 위해 했다는(어쩌면 마지막 인사일 수도 있겠지만) '유다의 키스', 십자가 매달렸던 예수가 끌어내려진 후의 광경을 그린 '애도(Lamentation)'와 함께 특히 유명하다.
'예수의 세족식'
'유다의 키스'
'애도'
'애도' 속에는 슬퍼하는 천사들의 디테일까지 담겨있다.
살면서 매양 느끼는 것이 사람의 능력과 인간성은 절대 비례하지 않는다는 것인데, 이것은 성직자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그리고 그와 같은 괴리는 내가 '성서와 UFO'에 천착하게 되는 큰 이유이기도 한데, 요즘처럼 성직자의 성폭행 소식이 자주 전해지는 마당에 즈음해서는 오히려 허탈감을 느낀다.
출처: https://kibaek.tistory.com/197 [나는 왜 UFO를 믿는가]훌륭한 예술가들에게는 흔히 위대한 예술혼이 동반된다. 얼어죽어도 곁불은 쬐지 않는 지독한 자존심은 그 예술혼의 표상이니 당연히 배고픔은 감내해야 한다. 꼭 부정한 시대와 싸우는 외로운 영혼은 아니었지만 반 고흐는 생전에 그린 900여 점의 작품 중 단 한 점밖에 팔지 못했던 바, 죽을 때까지 가난할 수밖에 없었다. 이와 같은 예술가의 일생은 가끔 우리의 심금을 울리는데, 그것이 드라마나 영화로 제작되어 고착화되는 경우도 있다. 그래서 우리는 예술가들을 가난하고 괴팍하지만 영혼만큼은 순수한 사람들로 인식하게 된다.
그러나 이같은 생각은 바보같은 생각이다. 역대의 유명 예술가들은 대부분 크게 돈 걱정을 안 하고 살았으며(명성을 얻으면 부가 동반되는 것이 상례이므로) 반드시 영혼이 순수한 것도 아니었다. 순수한 사람이 있는 반면 그렇지 않은 놈도 부지기수였으니 다른 직업군의 사람들과 크게 다를 것이 없었다. 오늘 소개하려는 이탈리아의 화가 지오토 디 본도네(Giotto di Bondone, 1265-1337)는 그렇지 않은 놈의 대표적인 케이스였다.
지오토 디 본도네가 그린 스크로베니 성당 벽화와 성당 중앙 벽에 그린 '예수의 심판
지오토 디 본도네는 '현대 회화의 시작점', '중세 시대의 비잔틴 미술을 마감하고 르네상스의 서막을 연 화가이자 건축가'로 일컬어진다. 흔히 르네상스 미술을 이끈 미켈란젤로를 천재 화가라 부르지만, 위 스크로베니 성당의 중앙 벽 '예수의 심판'이라 이름 붙여진 그림을 보면 로마 시스티나 대성당에 그려진 미켈란젤로의 '최후의 심판'은 지오토 그림의 모방작임을 쉽게 알 수 있다.(미켈란젤로는 지오토의 원근법까지 흉내냈다)
출처: https://kibaek.tistory.com/197 [나는 왜 UFO를 믿는가]지오토 디 본도네의 조각상
미켈란젤로의 '최후의 심판'
뿐만 아니라 시스티나 대성당에 그려진 나머지 종교화들도 모두 지오토가 창안한 그림 서술 방식을 답습한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지오토의 사후 150년이 지난 일인 것을 보면 지오토 디 본도네의 예술이 얼마나 선구적이었는가를 알 수 있게 해준다.(어린 시절 미켈란젤로가 지오토의 작품을 모사하며 그림 공부를 했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특이하게도 그는 화가의 직업을 사채업과 병행했다. 당연히 그림을 그리는 것보다 고리대금이 더 돈이 되기 때문이었는데, 그림으로 벌어들인 돈이 그 밑천이었다. 돈이 돈을 번다는 것을 안 그는 그림을 더욱 열심히 그려 자본금을 키웠고 그 돈을 굴려 더욱 큰 돈을 벌었다. 예술가로서는 매우 특이하기도 하거니와, 또한 드문 경우이기도 했다.
지오토의 초상화는 영락없는 채권추심자로 온 조폭의 모습이다.
돈에 환장한 지오토가 무리한 주문을 받는 경우는 다반사였다. 이에 반드시 회벽이 마르기 전 그려야 되는 프레스코화를 몇 달 후에 그리는 경우도 있었고, 공기(工期)를 맞추지 못한 건축물도 허다했다. 아래의 피렌체 대성당의 종탑(캄파닐레)은 그가 하단부만을 쌓고 사망한 경우지만(그의 제자인 안드레아 피사노와 프란체스코 탈렌티가 이어 완성시켰다) 그 유명세 덕분에 '지오토의 종탑(Campanile di Giotto)'으로 불린다.피렌체 두오모 성당과 지오토의 종탑
하지만 그의 능력은 무척이나 출중하였으니, 아래의 그림은 그가 젊은 나이에 로마 시스티나 대성당의 입구에 그린 것으로서 원근법이 활용된 사례이다.(원근법은 그의 스승인 치마부에가 창안했지만 지오토가 완성한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다만 아래 그림은 지오토의 그림 양식과 달라 그의 것이 아니라는 설도 있다)
'물위를 걷는 예수'(10x14m)
풍랑 이는 바다와 예수를 만나러 가던 베드로가 물에 빠지는 광경이 원근법으로 묘사됐다.
'물위를 걷는 예수'(10x14m)
풍랑 이는 바다와 예수를 만나러 가던 베드로가 물에 빠지는 광경이 원근법으로 묘사됐다.
'물위를 걷는 예수'(10x14m)
풍랑 이는 바다와 예수를 만나러 가던 베드로가 물에 빠지는 광경이 원근법으로 묘사됐다.
지오토는 1303년, 새로 지어진 스크로베그니 성당의 벽화를 그리기 위해 그해 이탈리아 북쪽 마을 파도바로 가게 된다. 파도바는 베네치아 서쪽 30km 지점에 있는 시골 마을로, 지오토는 사실 성당 측의 벽화 의뢰를 탐탁해 하지 않았다. 로마 바티칸 대성당 쯤이면 모를까, 한 사채업자에 의해 베네치아 외곽에 세워진 작고 멋대가리 없는 성당에 자신과 같은 대가의 손이 얹혀진다는 것은 아무래도 자존심이 상하는 일이었다.
하지만 그의 능력은 무척이나 출중하였으니, 아래의 그림은 그가 젊은 나이에 로마 시스티나 대성당의 입구에 그린 것으로서 원근법이 활용된 사례이다.(원근법은 그의 스승인 치마부에가 창안했지만 지오토가 완성한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다만 아래 그림은 지오토의 그림 양식과 달라 그의 것이 아니라는 설도 있다)
출처: https://kibaek.tistory.com/197 [나는 왜 UFO를 믿는가]스크로베니 성당의 외관
그럼에도 그는 결국 파도바를 향했는데, 그 이유는 대강 두 가지로 정리된다. 첫번 째는 당연히 돈이었다. 스크로베그니 성당은 국책사업으로 건설된 당대의 성당과는 달리 베네치아의 사채업자인 스크로베그니가 자신의 개인 돈으로 지은 성당이었다. 그의 가문은 베네치아에서 상인들을 대상으로 하는 고리대금업으로 큰 돈을 모았던 바, 셰익스피어의 '베네치아의 상인'에의 모델 같은 집안이었다.
스크로베그니와 동시대를 살았던 작가 단테는 작가적 사명감을 발휘, 자신의 '신곡'에 당대의 '큰 손'이었던 레지날도 스크로베그니의 실명을 과감히 삽입하였고,(지옥에서 고통받는다) 그러자 이에 두려움을 느낀 아들 엔리코 스크로베그니가 파도바에 있던 옛 로마 경기장 땅을 매입하여 성당을 짓게 된 것이었다.
스크로베그니는 이 성당의 실내장식과 마감 벽화를 당대의 유명화가인 지오토에게 의뢰했다. 지오토는 앞서 말한 이유로 그의 제안을 마뜩지 않아 했지만 화료를 대폭 올린 흥정 끝에 수락하게 된다. 사채업자가 돈이 얼마나 돈이 많은지는 누구보다 지오토 자신이 잘 알고 있는 터였다. 대신 그는 하늘나라에 가기를 희망했던 스크로베그니의 희망을 화폭에 담았던 바, 지옥의 악마 밑에서 고통받는 사람들 왼쪽에 성당을 하늘나라에 봉헌하는 스크로베그니의 모습을 그려넣었다.('예수의 심판' 중앙 십자가 아래)
'예수의 심판' 상세도
왼쪽 사람이 엔리코 스크로베그니이며 오른쪽은 지오토이다. 지오토는 슬쩍 뭍어 하늘나라에 가려 한 것 같다. 아무튼 이 그림은 대단히 상업적인 발상이다.
두번 째 이유는 그가 1301년에 목격한 혜성(핼리 혜성) 때문이었다. 그 혜성의 휘황함은 지오토에게 강한 영감을 불어넣기 충분하고도 남음이 있었다. 그는 이 혜성을 예수 탄생 때 동방박사가 목격한 바로 그 별임을 믿어 의심치 않았고 자신이 본 혜성을 '동방박사의 경배'라는 그림에 분명하게 묘사했다.(학자들에 따라서는 그가 묘사한 혜성이 1304년에 나타나 74일 간 목격된 비주기 혜성일 것이라는 주장도 있지만 시기적으로 1301년의 핼리 혜성이 더 가까워 보인다)
'동방박사의 경배'는 성당 천장으로부터 두 번째 줄, 말하자면 첫 그림이 시작되기 가장 적합한 곳에 그려졌는 바, 지오토는 자신이 받은 영감을 최초의 벽화 그림으로 표현했음을 알 수 있다. 꼭 순차적으로 그리지는 않았지만 예수의 탄생이 그 일생에 관한 연작화(連作畵) 중 첫 번째로 장식됨 또한 당연한 노릇일 터였다. 아무튼 이 그림은 역대 그림 중 혜성이 그려진 최초의 사례로 남게 되었는데, 까닭에 ESA(유럽연합 우주기관)가 1985년 혜성 탐사선을 우주로 쏘아보냈을 때 그 이름을 지오토라 명명하는 계기가 되었다.
헬리 혜성과 지오토 탐사선의 가상 이미지
조립 과정의 지오토 탐사선
이 블로그에서 몇 번이나 올려진 그림 '동방박사의 경배'
'동방박사의 경배' 밑에 그려진 '예수의 세족식'
나무 위의 삭게오가 표현된 '예루살렘에 입성하는 예수'
널리 알려진 '유다의 키스'도 이 성당 벽화 가운데 하나이다.
벽화 연작 중 가장 유명한 '애도(lamentaion)'
요한복음 19장의 내용을 바탕으로 그려진 이 그림 속에는 십자가에서 내려진 예수를 어머니 마리아를 비롯한 지상의 사람 10명과 천상의 천사 10명이 함께 애도하고 있는데, 그 슬픈 애도의 분위기를 한 그루의 삭막한 나무가 더욱 살려준다.
지오토는 울먹이는 천사의 디테일까지 담았다.
이상은 작년 말에 '스크로베니 성당 벽화와 지오토 디 본도네의 예술 세계'라는 제목으로 포스팅했던 글을 다시 써 본 것이다. 나는 그때 글의 말미에 지오토 디 본도네에 대해 '예술보다 돈을 더 사랑한 천재 화가'라는 평을 달았다. 그리고 사람의 재능과 인간성이 반드시 일치하는 것은 아니라는 취지의 맺음말과 더불어 한 때는 명망 높았던, 그러나 지금은 성폭행 등으로 감옥에 간(혹은 갈 예정의) 성직자들의 허울을 비판했다. 때가 때인지라 자연히 글이 그렇게 흘렀던 것 같다.(목사나 신부의 성폭행 사건이 그야말로 하루 걸러 터지곤 했던 때였던지라.....)
그런데 곧 그 글이 '티스토리' 관리 주체인 '다음'으로부터 명예훼손의 글로 임시 조치되어 읽을 수 없게 되었다. 위의 목사와 신부에 대한 실명 거론이 문제가 된 것으로, 그 중의 한 목사가 속한 교회가 명예훼손으로서 게시물 삭제를 요청한 것이 받아들여지게 된 모양이었다.(그 목사는 성폭행은 물론 횡령의 혐의도 중한 사람이었다) 물론 '다음'으로부터 게시물의 복원 기회는 주어졌다. 하지만 나로서는 별로 고쳐 쓰고픈 마음이 없었기에 그저 방치해두고 있었는데, 어느 날 보니 글이 아예 사라지고 없었다. 이에 여가가 생긴 요즘, 다시 쓰게 된 것이다.
물론 바람직한 경우는 아니겠지만, 예술가가 돈에 팔릴 수는 있다. 사실 따지고 보자면 그것이 그렇게 비난받을 일도 아니다. 하지만 성직자의 경우는 다르다. 예술가와 견주어 말하자면, 화가는 돈을 위해 그림을 그릴 수 있지만 목회자는 돈을 위한 목회 활동을 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성직자도 당연히 먹고 살아야 하며 그들 또한 당연히 즐길 권리가 있다. 개신교 목사의 경우는 제 가족도 부양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성폭행은 성직자가 아닌 사람들도 지탄의 대상이 되는 범죄이며, 상식적으로도 성직자는 보다 고결한 도덕성이 요구된다. 마땅히 돈에 대해서도 초월할 수 있어야 된다.
* 그림 및 사진의 출처: google jp.
- 성서의 불편한 진실들
- 국내도서
- 저자 : 김기백
- 출판 : 해드림출판사 2016.0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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