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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초기 백제를 찾아서 I - 포천 고모리 산성
    잘 알려지지 않은 흥미로운 역사 이야기 2021. 1. 29. 08:05


    포천 고모리(古毛里)산성은 가장 오랜 백제산성으로 추정되는 곳이다. 이 산성에 대해서는 2001년 단국대학교 매장문화재연구소(소장 박경식 교수)의 지표조사가 있었는데, 당시 문지 1개소, 건물지 7동, 우물지 1개소 등이 확인되었다. 전체 둘레 1.1㎞ 정도의 토성으로, 부분적으로는 할석으로 이루어진 토석혼축의 흔적도 발견되어졌다. 형식은 고모산(일명 노고산, 해발 380m) 정상을 둘러서 쌓은 테뫼식 산성으로 내·외성의 이중구조로 이루어져 있다.(내성 둘레 96.7m) 소는 포천시 소흘읍 고모리 산64이다.   


    지표조사 때 성내에서 많은 양의 백제 토기가 출토되었다. 대표적으로는 건물지에서 발견된 흑색 연질(軟質)토기인 직립구연 단경호를 들 수 있다. 기타 경질 무문토기와 양이부호, 고배류, 뚜껑류, 옹기류 등이 출토되었는데, 풍납토성과 몽촌토성에서 발굴된 초기 백제 유물과 유사하다. 3~5세기 연질 백제토기가 주로 수습되었고, 한성백제 이후 시기의 고구려나 신라, 통일신라의 유물이 거의 발견되지 않아 한성백제기에 축성된 산성으로 추정함에 무리가 없다. 



    고모리산성 입구의 고모리 저수지


    비득재 표지판

    비득재(해발 254m)는 고모리에서 직동리로 통하는 고개다. 광개토대왕비와 중원 고구려비에 나오는 고모루성(古牟婁城)과 혼용되고 있다

     

    고모루산성 전경 

    앞에 보이는 석축이 아니라 뒤로 보이는 산을 말함이다. 



    지금은 산에 올라봐야 안내판 외에 이곳이 성이라고 짐작할 무엇을 찾기 힘들다. 이에 편의상 단국대학교 매장문화재연구소의 사진을 빌리자면 석축구간이 눈에 띄는 바, 토석혼축의 성이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아래 사진) 발굴보고서에 따르면 석축의 높이는 2m가 채 못 되며 뒤채움 길이도 1m 정도로 본격적인 석성의 모습과는 거리가 있다고 되어 있으나, 완전판축 기법으로 조성한 풍납토성과 몽촌토성에 비하면 산성으로서의 위용과 역할이 느껴진다. 


    석축으로 축조된 곳은 동쪽 벽 일부 구간으로, 성벽 단면에 대한 조사 결과 기저부에 폭 2m정도 잡석을 깔고 그 위에 돌을 쌓은 것으로 확인됐다. 서쪽 벽 일부는 언덕을 깎는 삭토법을 사용하였다. 이로써 평균 60도 이상의 급한 경사도를 만들었는데 그 위쪽을 성토해 성벽을 만들었다고 한다. 내성 북쪽 벽의 토석혼축 구간은 할석을 막쌓기 형태로 2~3단을 쌓은 후 그 위로 성토하여 성벽을 축조한 것으로 보인다.



    고모리 산성 내성 동벽 20구간, 2001 ©단국대학교 매장문화재연구소


    고모리 산성 내성 북벽 15구간, 2001 ©단국대학교 매장문화재연구소


    고모리산성 출토 토기, 2001 ©단국대학교 매장문화재연구소


    고모리산성 지도


     

    이와 같은 축조 형태나 발굴 유물로써 고모리산성은 가장 오랜 백제산성의 하나로 여겨졌고 이에 대해서는 학자들 간에도 이견이 없어 보인다. 그런데 이를 더 소급하여 이 산성을 <삼국지(三國志)> 위서(魏書동이전(東夷傳)에 나오는 마한(馬韓) ‘모로비리국(牟盧卑離國)’의 흔적으로 여기거나, '마한에 편입되었던 그 땅을 백제의 시조인 온조가 말갈의 침입을 막는다는 조건으로 (도읍지로부터) 북쪽으로 100리의 땅을 마한 왕으로 부터 넘겨받았다'는 흥미있는 구전을 사실로 여기는 사람들도 있다. 


    첨예한 것은 이 산성이 광개토대왕비와 중원 고구려비에 나오는 고모루성(古牟婁城)이냐 아니냐의 논쟁이다. 이 성을 고모루성이라고 주장하는 대표적인 사람은 서병국 대진대 사학과 명예교수(발해사, 고구려사)로, 그는 “<삼국사기백제본기 진사왕(辰斯王) 8년(392) 10월조의 기사, 즉 '진사왕은 광개토대왕이 용병에 능함을 알고 싸우려 하지 않아 북쪽에 있는 백제 700개의 부락이 거의 고구려군에게 함몰됐다'는 내용 및 백제 건국 초기에 포천 등 동북 변경 일대의 성들이 루()자로 많이 표현되고 있는 점, 그리고 백제의 왕 중에는 다루왕(多婁王), 기루왕(己婁王), 개루왕(蓋婁王등 자로 표현된 왕이 많아  자의 사용이 백제 사회에서 보편화된 점을 증거로 들었다. 그 바탕이 되는 광개토대왕비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백잔(百殘.백제)과 신라(新羅)는 예로부터 (고구려의) 속민(屬民)으로 조공(朝貢)을 해왔다. 그런데 왜(倭)가 신묘년(辛卯年)에 신라 땅을 침범하니 (태왕께서) 바다를 건너 백잔(百殘)과 왜를 파하고 신라(新羅)를 신민(臣民)으로 삼았다. 영락(永樂) 6년 병신(丙申)년에 왕이 친히 수군을 이끌고 백잔국(百殘國)을 토벌하여..... 모루성(牟婁城), 우루성(于婁城), 소회성(蘇灰城), 연루성(燕婁城), 석지리성(析支利城), 암문□성(巖門□城), 임성(林城), 리성(利城), 취추성(就鄒城), 발성(拔城), 고모루성(古牟婁城)..... 을 공취(攻取)하였다. 

     

    중원 고구려비에도 고모루성이 등장하는데, 대형(大兄) 관등인 수사(守事)라는 지방관이 파견되어 다스린 성으로 나온다. 서 교수의 주장을 받아들이면 포천 고모리 성은 광개토대왕·장수왕 대에 고구려에 빼앗겼으며 이후 신라 진흥왕 대에 신라로 편입되었고, 다시 고구려에 속했다가 신라의 삼국통일 이후로는 폐성(廢城)이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기존 학계에서는 고모루성이 충북 음성 혹은 덕산이라는 설에 더 힘이 실리고, 포천시에서도 서 교수의 주장을 근거 박약의 이유로써 받아들이지 않고 있는데, 그 주장의 옳고 그름을 떠나 고모리성이 백제가  수도의 북쪽을 방어하기 위해 축조한 성이라는 것, 그리고 한성백제가 망하며 잃어버린 초기 백제의 성인 것만은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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