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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초기 백제를 찾아서 3 - 깜놀! 그간 몰랐던 한성백제 유적
    잘 알려지지 않은 흥미로운 역사 이야기 2021. 2. 3. 01:20

     

    이제 초기 백제의 성인 삼성동토성에 대한 봉은사 수미산 쪽의 흔적은 찾은 셈이다. <삼국사기> 백제본기 온조왕 14년조의 기사에 언급된 "한강 서북에 성을 축조해 한성의 백성을 나누었다(築城漢江西北 分漢城民)"는 바로 그 성을 찾았을는지도 모를 일이다. 그런데  이쯤에서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할 문제가 있다. 여기서 말하는 '한성'이 대체 어느 곳이냐 하는 것이다.(한성이라는 지명은 위 온조왕 14년조의 기사에서 처음 등장한다)

     

    <삼국사기> 백제본기 온조왕 즉위년조에 보면, 남으로 온 온조는 처음에는 한수 이북에 자리를 잡았다. 하지만 나라의 동쪽과 북쪽에 있는 낙랑과 말갈이 지속적으로 침범해 오는 까닭에 나라를 한수 이남으로 옮겨 안위를 도모한다.(온조왕 13 · 14년조) 그것이 하남 위례성이다. 잠시 언급하자면 이 하남 위례성은 다산 정약용 이래 하남시 춘궁리(春宮里) 일대가 위례성이라고 비정되기도 했으나,(<여유당전서> 강역고 위례성조) 지금은 풍납토성과 몽촌토성의 두 성을 지칭하는 것으로 정리됐다. 

     

     

    이성산성 동문지에서 본 하남시.  하남 이성산성은 백제 초기의 성으로 비정돼 왔으나 1986년 이후 11차례 발굴에서 백제시대의 것은 전혀 발견되지 않았다.  

     

    표지판만 있는 춘군동. 춘궁리(동)는 다산 정약용 이래 하남위례성의 후보지로 줄곧 거론되었으나 1988년 판교~구리간 고속도로 공사에 따른 구제발굴 조사 결과 일대에서 아무 것도 발굴되지 않음으로써 급격히 힘을 잃었다. 

     

     

    그 한성이 풍납토성인가 몽촌토성인가는 뒤에 구체적으로 따로 설명할 기회가 있을 듯하니 오늘은 그저 한성  북쪽의 성만을 추적해보자. 앞서 '초기 백제를 찾아서 II - 서울 삼성동토성'에서 말한 대로 옛 토성의 흔적으로 여겨지는 구릉을 따라 걷다 발견한 삼성리토성 표석은 영동대로에서부터 경기고등학교 부지까지 이어지는 사면(斜面)이 백제의 토성임을 말해주는데, 이 사면은 다시 경기고등학교 정문에서 운동장에 이르는 길까지 연결되어 있다. 그렇게 보자면 운동장까지만 따지더라도 높이가 족히 10여 미터는 된다.

     

     

    경기고등학교 오르는 길 사면. 이 위가 운동장이다.

     

    경기고등학교 가장 높은 곳에는 화동관(花洞館)이라는 교사가 자리한다. 이곳이 수미산 꼭대기로서 한국전쟁 때 깎여 미군 헬기착륙장이 만들어진  곳이다.  백제 시대 성이 축조될 때는 장대(將臺)나 망대(望臺)가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곳에서 토축(土築)의 흔적은 찾기 힘들다. 필시 헬기착륙장이 건설될 때, 혹은 경기고등학교 교사(校舍)가 세워질 때 망실되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1919년 조선총독부가 작도한 '둑도(뚝섬) 부근 백제유적도'에 삼성리토성의 형태가 명확히 나타나 있는 것을 보면 그때까지만 해도 토축 성벽이 온전히 남아 있었던 것으로 보이나 1970~80년대의 강남 개발 때 인위적인 토축 구간은 사라지고 구릉지대의 자연성벽 구간만 남게 된 것 같다.(유적도에 나타난 삼성리토성의 규모는 몽촌토성보다 조금 작다) 

     

    이것은 위에서 말한 영동대교에서 경기고등학교 운동장까지 이어지는 사면 역시 토축 성벽이 아니라 자연 사면임을 말해주는 것으로서, 2016년 한성백제박물관이 시굴조사를 했을 때도 대부분 표토 아래 바로 기반암이 드러났고, 일부구간에서만 두꺼운 퇴적층 아래 토축의 성벽이 잔존하는 것으로 확인되었다. 하지만 화동관 밑에서부터 봉은사까지 이어지는 지역은 다르니 앞서 말한 수미산 성벽 잔존 구간은 판축으로 쌓아 올린 토성 구간이다. 여기서는 일찌기 판축을 위한 목재 기둥을 세운 구멍도 발견되었던 바, 우리가 한성백제박물관을 들어서면 볼 수 있는 거대한 판축 시공이 이 구간에서도 행해졌다 보면 될 것이다. 

     

     

    화동관 오르는 길. 길 왼쪽 급사면이 판축구간이다. 

     

    화동관

    화동관 아래 능선부 판축성벽 잔존구간

     

     

    한성백제박물관 로비에 재현된 성벽 판축 광경

     

     

    그렇다면  같은 해 한성백제박물관이 조사한 봉은사 동북쪽의 삼성(청담)배수지, 봉은중학교, 봉은초등학교 쪽의 현황은 어떨까? 한강과 탄천이 갈라지는 이 일대에도 토성의 흔적이 존재한다. 우선 눈에 띄는 곳은 삼성배수지 근린공원이 위치한 구릉지대인데, 그 구릉의 높이가 무려 83m에 이른다. 까닭에 이곳을 찾아가기 위해서는 봉은사 사거리의 횡단보도를 건너 아셈빌딩과 아이파크 타워 사잇길로 들어가 구 주택가 도로에서 봉은중학교를 향해 계속 올라가야 한다. 그 꼭대기 부근에서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은 힐탑빌라 단지로서 그 이름 자체가 일대에서 가장 높은 곳임을 의미한다. 그 맞은 편이 봉은중학교인데 입구에서 보면 힐탑빌라보다 더욱 높은 곳이 눈에 띈다. 현재 삼성(청담)배수지 근린공원의 꼭대기로서 백제시대에는 망루가 있었음직한 곳이다.   

     

     

     토성의 흔적이 남아 있는 곳

     

    봉은중학교 오르는 길
    힐탑빌라 

     

    봉은중학교 입구에서 보이는 삼성배수지 

     

     

    삼성배수지는 83m 구릉의 꼭대기로 백제유적이 있었을 것이라고 짐작되는 곳이다. 하지만 삼성배수지 근린공원이 조성되며 평탄하게 깎여 옛 흔적을 찾아보는 일이 어렵게 되었는데, 다만 그곳에서 내려보이는 곳에는 <삼국사기> 백제본기 온조왕 14년조(BC 4)의 기사에 언급된 "한강 서북에 성을 축조해 한성의 백성들을 나누었다"는 온조왕 때의 흔적이 보이고, <삼국사기> 백제본기 개로왕 21년조(AD 475)의 "개로왕이 모든 백성을 동원해 흙을 구워 성을 쌓고 곧 그 안에다 굉장하고 화려한 궁전을 지었다. 또 큰 돌을 욱리하(郁里河)에서 가져와 곽을 만들어 부왕을 장사하고, 강을 따라 뚝을 쌓아서 사성(蛇城)의 동쪽에서 숭산(崇山)의 북쪽까지 이르게 했다"는 그 뚝의 흔적을 찾을 수 있다. 

     

     

    2천년 전 과거와 현재가 파노라마처럼 공존하는 곳. 삼성배수지 오르는 길.  

     

    배수지에서 본 한강

     

    탄천과 잠실운동장 쪽 

     

    배수지 북쪽 사면부 전경

     

    봉은초등학교 남동쪽 사면

     

    오른쪽 건물이  봉은초등학교로 이 사면의 계단을 오르면 삼성배수지다. 

     

     

    배수지에서 본 서울. 아래 건물이 봉은중학교다. 

     

     

    흔히 백제 개로왕은 폭군이요, 도림이라는 고구려 간첩에 속아 바둑에 미쳐 있다 고구려 장수왕의 공격을 받아 목숨을 잃은 무능한 왕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 그는 고구려와 건곤일척을 벌였던 야심 많은 군주로 469년 기유 8월에 고구려 땅인 대방(帶方)을 쳤다가 패해 물러났으나 이에 굴지 않고 북위(北魏)에 국서를 보내 북위로 하여금 고구려를 침공하게 했다. 말하자면 그는 신라의 삼국통일 방법을 먼저 써먹은 사람이다. 그는 미구에 닥쳐올 고구려와의 큰 전쟁에 대비해 쌍현성(雙峴城)을 수리하고 청목령(靑木嶺)에 목책을 쌓았고 북한산성에 군사를 보내 지키게 했으며 사성(삼성동토성)과 이곳 숭산을 연결하는 방어선을 구축해 고구려의 침입에 대비했다. 

     

    개로왕이 북위에 보낸 국서는 「백제상 위주청벌 고구려표(百濟上魏主請伐高句麗表)」라는 이름으로 전해진다. 그는 그 글에서 고구려 정벌을 절절히 요청하고 있다. 하지만 고구려와 관계가 좋았던 북위는 이 청을 들어주지 않았고, 오히려 이 사실이 고구려에 알려지게 되는 바, 475년 고구려 장수왕의 대대적인 침공에 직면하게 된다. 그 결과는 이미 수차례 설명한 바와 같다. 그 한성백제의 마지막 날을 경기고등학교의 사성(蛇城)과 이곳 봉은중학교의 숭산도 지켜보았을 것이다. (※ 사성은 <삼국사기> 백제본기1 책계왕 즉위년(286)조에 성을 수리한 기사가 나온다. 즉 성의 초축 시기는 백제 초기로, 온조왕 때 14년 축조하여 한성의 백성을 나누어 거주시킨 삼성동토성으로 봄이 타당하다)

     

     

    내려오는 길은 다른 길을 택해 보았으나  

     

    결국 같은 길에 이르고

     

    길을 나오니 바로 봉은사역 3번 출구다. 그러니까 1번 출구에서 시작해 3번 출구에서 끝난 셈이다. 

     

    삼성동토성의 위치와 한강유역 성곽분포도

     

     

    1948년 삼성리에서 출토된 백제 와당

    1948년 충남대 윤무병 교수가 삼성동토성에서 수습한 연와문 와당이다. 현재 서울대박물관에 소장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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