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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민족의 자존심 경춘선
    그리 멀지 않은 옛날의 우화 2021. 10. 23. 18:46

     

    앞서 1904년 경의선 공사 당시 '철도방해죄'로 붙잡혀 처형당한 3인의 의병을 이야기를 다뤘으나 우리나라의 철도는 그보다 7년 앞선 1897년 착공된 경인선이 최초였다. 처음에는 조선정부도 생각이 없지 않았으니 철도와 광산만큼은 국책사업으로 하려 했다. 그리하여 최초 철도인 경인선은 일본의 협궤식(狹軌式)이 아닌 1889년 주미공사였던 이하영이 귀국하며 소개한 미국의 대륙횡단철도를 모델로 삼아 민족자본으로 착공하였다. 

     

    공사는 1897년 설립된 대한철도회사가 맡았다. 하지만 그것이 한두 푼이 들어가는 일이 아니었던 바, 곧 자금난에 봉착하였고 이에 일본은 1894년 체결된 '조일 잠정합동 조관'을 근거로 부설권을 요구하였다. 하지만 1895년 삼국간섭으로 일본의 지위가 추락하고 1896년 고종의 아관파천이 결행되며 경인철도부설권은 미국인 모스(James R. Morse)에게 넘어갔다. 모스는 1897년 3월 22일 오전 9시 인천 우각현(牛角峴, 지금의 도원역)에서 기공식을 갖고 공사에 들어갔다.

     

     

    도원역 앞 '한국철도 최초기공지' 표석/인천일보 
     우각현 철도 기공식 사진

     

    하지만 대한제국을 합병하려는 보다 큰 목적의 일본은 집요하게 경인철도를 노렸고, 그리하여 착공 이후로도 대한제국이 정치적으로 불안해 나라가 곧 망할지 모른다는 거짓 소문을 미국 자본시장에 끊임없이 퍼뜨렸다. 이에 미국 투자가들이 자금을 회수하며 모스는 경영난에 봉착했고 때맞춰 1백만 불을 디민 일본의 '경인철도합자회사'에 부설권이 양도되고 말았다. 결국 부설권을 획득한 일본은 1899년 4월 23일 인천역에서 2차 기공식을 갖고 빠른 속도로 공사를 밀어붙였다. 

     

     

    인천역 앞 경인철도 시발지 표석/1899년 4월 23일 이곳 북성동에서 재기공식이 열렸고 같은 해 9월 18일 인천-노량진간 열차가 개통됐다고 써 있다.
    한국 최초 증기관차인 미국 브룩스사의 '모갈'형 증기기관차/인천-노량진을 1일2회 왕복했다 

     

    공사는 이미 착공되었던 바, 일본의 협궤식이 아닌 4피트 8인치의 미국 표준식 철도로 진행되었다. 공사비 부담에 처음에 갈등하던 일본도 대륙진출까지를 염두에 두고 광궤를 채택했고, 결국 광궤의 노량진~제물포 구간 총 33.2km가 개통되었으며,(1899년 9월 18일) 노량진~서울역 구간 공사를 서둘러 1900년 7월 8일 드디어 전구간이 개통되었다. 이때 노량진과 용산을 잇는 한강 제1철교인 노량철도가 개통되는데, 터널이 없어 무난히 건설된 경인선 건설 구간 중의 가장 난코스였다. 

     

     

     1900년 6월 완공된 노량대교를 모델로 한 일제의 엽서. 조선 유일의 복선 철교라는 설명이 붙어 있다. 
    지금의 한강철교는 1, 2, 3의 숫자로 불린다. 

     

    이어 마찬가지로 광궤를 채택한 경부선의 기공식이 1901년 8월 20일 영등포에서 열렸고 러일전쟁이 발발하며 공사가 급진행되어 1904년 12월 27일 완공식을 가졌다.(전구간 개통은 1905년 1월 1일) 경의선은 본래 프랑스 휘브릴(Fives Lile)사가 권리를 갖고 있었으나 이 역시 최종적으로는 일본에 돌아가 1904년 3월 용산~개성 구간이 착수되었고, 1905년 평양~신의주 구간이, 1906년 용산~신의주의 전구간이 개통되었다. (철마의 운행에 당시 전국 각지에서 벌어진 소동과 놀람은 필설로 다할 수 없다)

     

    경원선은 1911년 10월 15일 용산~의정부 구간 개통을 시작으로 1912년 10월 철원역까지 개통하였으며, 1914년 용산~원산 구간이 완전개통되었다. 경원선은 지형상의 난구간이 많아 완공이 늦었는데, 완공 이후 주로 일본으로 농산물과 목재 등의 물자를 반출시키는 역할 및 일본 공산품의 유입 통로로 이용되었다. 그러면서 뜻하지 않게 도청 이전이 공론화되었던 바, 도청소재지를 춘천에서 경원선이 지나가는 철원으로 옮기려는 일본의 계획이 실행되었다.

     

    그러자 이를 막으려는 춘천 사람들의 움직임이 있었다. 그리하여 춘천 6개 지역 유지들이 사재를 출연해 경춘철도주식회사를 설립하였고, 1939년 7월 25일 서울의 성동역을 기점으로 청평-가평-강촌을 지나 춘천까지 이어지는 총 93.5㎞의 경춘선이 완공되었다. 이 경춘선은 춘천의 소도시화를 막았을 뿐 아니라(같은 처지의 공주시는 철도 유치에 실패해 대전시에 도청을 빼앗기고 인구 10만의 소도시로 전락한다)  광복 이후 지역 개발을 위해 건설된 영동선·충북선·경전선 등 횡단철도의 중간지점으로 국토개발의 균형을 이루었다는 평을 받았다. 

     

    경춘선 건설 이후 경춘철도주식회사는 동대문부터 서울역까지 지하철 부설 계획을 입안했으나 일제의 불허로 현실화되지 못했고, 해방 후 회사와 철도는 미군청에 의해 국유화되었다. 이후 운영은 국가철도공단이 맡았고 구간별 노선 변경을 겪으며 지금의 전철 시대와 'ITX 청춘' 시대를 맞게 되었다. 춘천 가는 열차 'ITX 청춘'은 필시 7, 80년대 대학생들을 비롯한 청춘남녀들을 대성리 청평 가평 강촌 춘천으로 실어 나르던 낭만열차에 기인했을 터이다.

     

    과거의 경춘선 역사(驛舍)들은 은 2010년 새로운 경춘선의 개통과 전철화 등으로써 거의 사라졌다. 아울러 지난날의 낭만도 함께 사라졌는데, 수도권에서는 화랑대역만이 유일하게 남아 과거를 추억하게 해 준다. 금곡역은 얼마 전까지도 옛 자취 그대로를 간직하고 있었는데, 어느 날 갑자기 교회가 들어서며 그로테스크해졌고, 신남역으로 불리던 김유정역은 2004년에 춘천 신남면 출신의 소설가 김유정의 이름을 따 안팎을 새장단했으나 수줍게 분칠힌 다소곳하던 촌색시는 사라지고 성형한 도시 미인이 서 있어 오히려 역변(逆變)이다.  

     

     

    노원구 화랑대역 가는 길. 예전에는 태릉역으로 불렸는데 1958년 근처에 육군사관학교가 들어서며 역 이름이 바뀌었다. 
    비대칭 박공 형태를 지닌 특색 있는 지붕의 화랑대역 
    화랑대역 상량문 안내판. 1939년 준공 때의 것은 아니고 해방 후 1946년 5월 지붕을 중수할 때의 것이다, 
    경춘선 철길
    공원화 후 예쁘게 단장된 화랑대역 주변
    화랑대역 앞을 지나는 옛 전차. 이 전차는 구간 내에서 실제 운행된다.  
    춘천 가는 기차. 물론 움직이지는 않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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