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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기를.....
    그리 멀지 않은 옛날의 우화 2022. 5. 3. 05:00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다'라는 법어와 돈오돈수(頓悟頓修, 단박에 깨쳐서 더 이상 수행할 것이 없는 경지)의 인물로서 잘 알려진 성철 스님은 조계종 종정 시절, "전국 경내의 산신각과 칠성각 등의 제당(祭堂)을 철폐하라"는 명을 내린 바 있다. 불교 교리에 어긋난다는 이유에서였다. 이때 정통불교를 신봉하는 대다수의 불자들은 크게 환영했다. 약 40년 전의 일이다. 

     

    앞서 '무속, 도교, 도사 & 삼청동 소격서'에서도 말했거니와 우리나라에서는 불교가 정착하는 과정에서 산신신앙의 샤머니즘도 포용하여 산신각 등의 제당도 불교 전각 중에 하나로 자리 잡게 되었다. 이는 불교 교리에 맞지 않으며 상반되기까지 하나 대한민국의 사찰에는 아직까지 신신각, 삼성각, 칠성각, 중악단 등 무속의 제당들이 버젓하다. 그 전각들을 하루아침에 없애기가 어려웠던 것인데, 성철 스님 역시 강요는 하지 않는 한국식 톨레랑스를 보였던 바, 사찰 안의 무속이 지금껏 존속하게 된 것이다. 

     

     

    해인사 성철스님 승탑 / 1993년 다비식 때 나온 110과의 사리를 모셨다. 설치미술가 최재은이 1998년 조성했다.
    성철스님(1912-1993) / 스님은 평생 나무지팡이 하나에 누더기 장삼을 걸쳤다. 그러나 사후를 묘사한 것들은 모두 금의 장삼에 화려한 육환장을 들었다. 스님이 환생하신다면 크게 경을 칠 일이다.
    성철스님이 입적한 해인사 백련암 / 우리가 아직도 그를 소환함은 이후 그 같은 대덕이 출현하지 않은 까닭이라 여겨진다. (경북매일신문 사진)
    산청 겁외사 성철스님 동상 / 본인은 원하지 않았을 동상이다. (경남도민일보 사진)

     

    이는 어찌 보면 한국의 무속이 그만큼 면면하다는 얘기다. 지금 순례 삼아 돌고 있는 인왕산은 무속의 성지라고도 할 수 있는 곳으로서, 지금도 많은 무당집들이 즐비하다. 하지만 그 메카인 선바위의 전설은 사뭇 다르다. 거기 얽힌 유명한 이야기는 다음과 같다.  

     

    한양 도성을 쌓을 때 무학대사는 선바위를 도성 안에 둘 수 있도록 설계하려 하였고, 정도전은 성밖에 두도록 설계하려 하였다고 한다. 정도전이 선바위를 도성 안에 들이면 불교가 성하고, 도성 밖에 두면 유교가 흥할 것이라고 태조를 설득하여 결국 도성 밖에 두었다는 것이다. 이에 무학대사가 탄식하며 "이제부터 승도들은 선비들의 책보따리나 지고 따라다닐 것이다"라고 탄식하였다는 설화가 전해진다. - 선바위 앞 안내문에서-

     

    덧붙이자면, 태조 이성계는 선바위를 둘러싼 무학대사와 정도전의 다툼에 선뜻 어느 쪽 손을 들어주지 못했다. 그러던 어느 날 꿈을 꾸었는데 폭설에 한양이 잠기는 꿈이었다. 깨어나 보니 정말로 눈이 쌓여 있었다. 이상하다고 생각한 그가 한양 도성 자리를 둘러보는데, 그동안 눈이 녹았다. 그런데 아직 선바위는 눈이 녹지 않았던 바, 눈이 녹은 곳을 기준으로 성을 쌓게 되었다. 서울 도성의 안과 밖은 이렇게 생겨났다고 전해지며, '서울'이라는 지명도 이때 나왔다고도 한다. 즉 설(雪) 울타리라는 뜻의 '설울'로 불리다가 서울이 되었다는 것이다.

     

    어느 쪽이 됐든 조선초 당시 선바위는 불교와 관계 깊었고 무속과는 연관성이 없었다는 말이다. 아울러 선바위는 스님이 참선을 하는 모양새라는 의미에서 한자로는 선(禪)바위라고 쓰며, 관리도 그 앞에 위치한 인왕사에서 한다. 지금 선바위에 앞에 가득 매달린 연등도 인왕사에서 매단 듯하다. 하지만 무속인들 또한 적잖으니 선바위에 오를 때면 어김없이 그로테스크한 화장의 무당들과 대면하게 된다. 바로 옆에는 무속행위를 위해 촛불이나 향을 피우지 말라는 현수막이 걸려 있었지만 (필시 산불 예방을 위한) 아랑곳 않는 분위기이다.

     

    서울시민속자료 4호 선바위
    인왕산 선바위의 앞과 뒤 / 본래 앞뒤가 따로 있지는 않았겠지만.....
    선바위에서 바라본 한양성벽 인왕산 구간 / 선바위는 성벽 바깥쪽에 위치한다.
    인왕산에서 본 한양도성 울타리
    복원된 한양도성 인왕산 구간

     

    선바위 쪽만 아니라 어느 쪽을 올라도 인왕산은 온통 무속이다. 이를테면 서촌 수성동 계곡 쪽으로 오르면 2020년 군부대가 떠난 자리에서 발견된 산신령과 부부 산신령의 암각화를 만나게 되고, 그 외도 부처인지 산신인지 알 수 없는 암각화들이 눈에 띈다. 아래의 암각화는 김신조 사건 이후 설치된 수방사 제1경비단 백호대대가 주둔하고 있던 곳에서 서울 서촌지역 주민 모임인 서촌주거공간연구회(서주연)가 2020년 초 발견해 신고한 것으로, 19세말~20세기초 민간에서 조성한 것으로 여겨진다. 

     

     

    산신 동자 호랑이가 돋을새김된 가로 180㎝ 세로 140㎝의 전형적인 산신암각화 (호랑이 귀여움^^)
    부부 산신과 호랑이가 선새김된 가로 130㎝ 세로 180㎝의 암각화 / 한겨레신문 사진

     

    수성동 계곡 새로 마련된 테크 계단을 한참 올라가 만날 수 있는 석굴암과 천향암도 무속의 냄새가 짙다. 석굴암은 엄연한 불교도량이나 그 위의 산신각은 그저 바위 덩어리임에도 산신각의 명칭이 붙었다. 원래는 산신각이라는 이름의 전각이 있었다고 하는데, 2018년 그 안에 켜놓은 촛불이 발화되어 소실된 후 새로 지어지지 않았다. (산신각 등의 촛불은 관리가 잘 되지 않아 산불의 위험이 상존한다)

     

    그래서 그런지 주변이 깔끔해져 상쾌하며, 그 아래로 보이는 풍광 또한 상쾌하다. 아울러 그 경치가 사시사철 다를 수밖에 없으니 간헐적이나마 탐승을 멈출 수 없다. 석굴암에서 만난 분들은 모두 심성이 도탑고 따뜻한데, 지난주에도 올랐지만 보살님은 보지 못하고 주지스님은 석굴암 앞 의자에 앉아 졸고 있었다. 

     

     

    9번 마을버스에서 내리면 바로 만날 수 있는 수성동 계곡 / 석굴암은 이곳에서 멀지 않다.
    인왕산 석굴암 / 안에 석불이 조성돼 있다.
    인왕산 석굴암 산신각 / 왼쪽에 산신과 호랑이, 그리고 부처인 듯 보이는 돋을새김 돌이 붙어 있다.
    산신각에서 그림 삼매경에 빠진 화가
    석굴암 산신각에서 보이는 청와대
    석굴암 산신각 부근의 인왕산 치마바위

     

    사직동 사직단 옆길로 오르는 길도 예사롭지 않다. 우선은 출발점인 사직단 자체가 조선시대 토지의 신인 사(社)와 곡식의 신인 직(稷)에게 제사를 지내던 곳이다. 이성계는 한양 도성을 설계하며 1395년 궁궐 동쪽에 종묘를, 서쪽에 사직단을 두었으니, 우리가 드라마에서 귀에 익은 "종묘사직이 어쩌고....." 하는 말은 이 사직단과 종묘의 전통을 이른다.

     

     

    사직단 / 왼쪽 위로 단군성전이 보인다.

     

    사직단에서 조금 오르면 1990년 쌍룡그룹의 김석원 회장이 사재를 출연해 조성한 단군성전이 나오고, 거기서 종로문화체육센터방향으로 틀어 한양성벽 쪽으로 가다 보면 북두칠성 등의 별자리가 새겨진 성혈(星穴)바위를 만나게 된다. 그리고 거기서 조우한 사람들도 인간미가 담뿍 느껴지니, 내가 그 별자리 바위의 사진을 찍으며 심취해 바라보자 자신들도 덩달아 신기해하며 묻는다. 

     

    "와~ 여기 이런 게 있었어요? 저는 이 동네 오래 살았어도 이걸 몰랐네요. 왜 못 봤지.....?"

    "저도 남이 가르쳐줘서 알았어요. 저도 본 건 오늘이 처음이에요."

     

     

    사직동 성혈바위의 성혈
    말하자면 이 바위는 노천 칠성각인 셈이다.
    성혈바위를 쉽게 만날 수 있는 사직동 구간 한양성벽 암문 / 암문을 들어서면 성혈바위가 있는 숲이 눈에 들어온다.
    사직동 구간 한양도성 성벽

     

    이렇게 시작된 대화가 성벽길을 따라 걸으며 오래 이어지다 훗날을 기약하며 헤어진다. 그런데 이와 같은 좋은 기분이 지난주 인왕산 국사당 앞에서 깨졌다. 사정을 말하기 전 우선 국사당 앞 안내문을 보자. (국사당은 그 안에서 나온 사람이 못 찍게 해 안내문 사진만을 올린다) 

     

     

    인왕산 국사당 안내문

     

    안내문 내용을 요약하면, 이곳은 남산 팔각정 자리에 있던 국사당이 일본강점기인 1925년 일본이 조선신궁(남산신사)을 세우면서 철거하여 이전하게 된 곳이다. 그리고 경대부는 물론 일반 백성도 이곳에서 제사 지낼 수 없었으나 나중에는 굿당으로 변했다고 되어 있는데, 중요민속자료 제28호라는 설명도 있다. 아울러 <오주연문장전산고>에 기록된 무신도에 대한 설명이 이곳에 있는 중요민속자료 제17호 무신도와 연관되어 이어진다. 그리고 이 건물 뒤에 위치한 서울특별시 민속자료 제4호 선바위에 대한 부언으로써 끝이 난다.

     

    안내문에 따르자면 이곳은 국가유산(문화재)으로 착각할 수 있는 곳이다. 그래서 위 사진을 찍은 후 건물 전체를 담으려 했으나 곧 그 안에서 나온 청년에게 제지당했다. 소리는 지르되 설명은 부적절한, 하지만 방문이 열려 있으니 찍지 말라는 의미만큼은 전달되는 신경질적인 반응이었다. 아닌 게 아니라 굿판이 벌어졌었는지 문 앞에 큰 청주 술병과 음식들이 보였다. 나는 내부만 찍지 않으면 되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에 핸드폰의 방향을 비스듬히 했으나 역시 제지당했다. 청년은 찍지 말라는데 왜 자꾸 찍냐며 크게 화를 냈다.

     

    물어봐서 될 것 같지 않은 분위기라 바로 내려왔다. 그리고 관할 관청을 수소문해 국사당의 성격에 관해 물어보았다. 국가유산에서 사사로이 굿판을 벌여도 되는 것인지, 그리고 사진 촬영을 금하는 행위는 타당한 것인지 등..... 하지만 시원한 대답을 듣기는 어려웠으니 종로구청 민원실, 인왕산 공원녹지과, 문화재청 무형문화재 담당자를 거쳐, 그다음 날 문화재청 근대문화재과로부터 원하는 답변을 들을 수 있었다. 문화재는 아니고 민속자료에 속하며, 개인 건물이라 굿판도 가능하다는 것이었다.

     

    결론은 클리어했다. 뭔가 역사성이 있어 뵈는 국사당 건물이었으나 문화재의 성격을 띤 그저 개인 소유의 건물이었다. 그렇다니 더는 얘기할 것이 없었다. 누가 내 집을 찍으면 나 역시 기분 나쁘고, 왜 찍냐고 항의했을 것이기에. 다만 내 집 앞에는 문화재로 착각할 만한 안내문은 없다. 문화재청에서 제작한 '공공누리' 사진첩에도 역시 중요민속문화재 제28호라고 소개된 국가지정 문화재 같은 모호한 설명이 있었는데, 거기 실린 국사당도 문이 열려 있었다. 그리고 문이 열려있건 닫혀있건 간에 그 무당 청년이 보여준 고압적 태도는 온당치 않은 일이었다.

     

     

    선바위 가는 길 / 앞서 소개한 대로 인왕산 선바위 오르는 길에는 종교 건축물과 무속 관련 시설물이 어지러운데, 관심 끄는 장소이기는 하나 앞으로 오를 일은 없을 것 같다. 맨 위 건물이 국사당이다.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다'는 임제종을 개창한 임제의현(臨濟義玄, ?∼867)의 문하인 유신선사(惟信禪師)의 말로, 성철스님은 이 유신선사의 말을 빌려 대중을 깨치려 했다. 유신선사가 이 말을 한 것은 선종의 불문(佛門)을 나온 후 도교의 영향을 받고 돌아와 나대던 화광동진(和光同塵)을 교시(敎示)하기 위함이었다고 알려져 있다. 

     

    "내가 삼십 년 전 참선 공부에 들기 전에는 산은 산이요 물은 물로 보였으나, 나중에 여러 선지식(善知識)을 친히 뵙고 깨침에 들어서는 산은 산이 아니고 물은 물이 아니게 보였다. 지금 진정으로 깨달아 편안한 휴식처를 얻고 나니 옛날과 마찬가지로 산은 다만 산이요 물은 다만 물로 보인다. 그대들이여. 이 세 가지 견해가 같으냐, 다르냐? 이것을 가려내는 사람이 있다면 나와 같은 경지에 들었노라 인정하겠다."

     

    老僧三十年前 未參禪時 見山是山 見水是水 乃至後來 親見知識 有入處 見山不是山 見水不是水 而今得箇休歇處 依前 見山祗是山 見水祗是水 大衆 這三般見解 是同是別 有人緇素得出 許親見老僧

     

    이 법어의 출전은 각양각색으로, 8세기 중엽 당나라 청원(靑原)선사의 말이라고도 하고, 직체심체요절의 저자 백운화상의 말씀이라고도 하고(이건 아닐 듯),  중국 송나라 때의 선종사를 정리한 책인 <오등회원>에 나와 있는 말이라고도 하고, 송나라 고승 도천(道川)선사가 지은 <금강경야보송>에 실려 있는 말이라고도 한다. 출전이야 어쨌든 깨달음을 주기 위해 쓰였던 말은 분명한데, 지금 내가 보는 산은, 그리고 지금 그대가 보는 산은 이 세 가지 중의 어느 것일지 문득 궁금해진다. 

     

     

    아, 날은 저물고 갈 길은 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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