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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규하 대통령과 부인 홍기 여사잘 알려지지 않은 흥미로운 역사 이야기 2022. 6. 29. 18:35
최규하(崔圭夏, 1919~2006)는 대한민국 헌정 사상 대통령 직위를 가장 짧게 누렸던 비운의 대통령으로 회자된다. 강원도 원주 태생의 그는 본래 학자를 지향했다. 그리고 그 뜻대로 해방되던 해인 1945년 서울대 교수로 부임하였으나 이후 행정부에 차출되어 관료로서 일했고, 특히 외교관의 길을 걸었다. 이후 1967년 외무부 장관이 되었고 1975년 국무총리에 올랐다가 1979년 박정희 대통령의 서거로 대통령 권한대행이 되었다.
그리고 같은 해 12월 6일 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 간선으로 제10대 대통령에 피선되었다. 이후 12.12사태 등의 격랑의 시절을 보내다 이듬해 5.18로 집권한 전두환의 신군부 세력에 의해 7개월여 만에 대통령 자리에서 끌어내려지듯 내려왔다. 그리고 그 자리에 전두환이 올랐다. 역시 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 간선으로 당선된 전두환은 헌법을 바꿔 대통령 5년 단임의 5공화국을 열었으나 기간 내내 매서운 칼바람이 불어대던 겨울 공화국이었다.
갑자기 최규하 씨 이야기를 꺼낸 것은 얼마 전 중고서점에서 <내일을 위한 증언>이라는 한 정치인의 회고록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주인공은 허정(許政, 1896~1988)이라는 비교적 덜 알려진 정치가이다. 비슷한 역정을 걸었기에 간혹 최규하와 비견되기도 하는 그는 제1공화국 때 국무총리 서리와 외무부 장관을 역임했고, 1960년 4.19의거로 이승만 정권이 무너지자 대통령 권한대행으로 과도정부의 수반을 지냈다. 그리고 제2공화국 때도 대통령 권한대행 겸 국무총리를 지내다가 장면 정부에게 정권을 이양했다.
* 장면의 제2공화국은 1년 후인 1961년 박정희가 일으킨 5.16 군사반란에 무너지게 되는데, 쿠데타가 발생했던 5월 16일 새벽의 비화를 '낭만의 거리 혜화동에 숨은 어두운 역사(I)-5.16 혁명'에서 다룬 적 있다.
그래서 그의 회고록을 발견했을 때 무척 반가웠다. 비상한 시기에 막중한 자리에 있었던 만큼 당연히 숨막히는 비화가 실려 있으리라는 기대에서였다. 하지만 막상 읽어보니 대단히 실망스러웠다. 책의 내용은 대부분 이미 다 알려진 것이었고, 비화라고 할만한 것이라곤 당시의 새로운 집권 세력인 민주당 신·구파 간 싸움(장면 총리 : 윤보선 대통령)의 상세뿐이었다.(그 또한 나름 비화겠지만 지금에서 그것이 흥미로울 수 없다)
그가 회고록을 쓰던 시절이 아직 하수상했던 까닭인지 5.16과 박정희에 대해서도 증언은 했으되 기존에 알려진 것 외에 별다른 내용이 없었다. 그저 5.16 후 박정희와 독대를 했고, 그때 박정희한테 앞으로 나라를 잘 이끌라는 충고를 했다는 자기 자랑 정도가 비화라면 비화였다.
그래서 읽고 난 후 그저 허탈했다. '이럴 거면 회고록은 왜 썼는가?' 하는 생각과, 괜히 샀다는 후회감이 들 뿐이었다. 그러면서 '최규하 전 대통령의 회고록도 이 정도였지 않았을까?'하는 생각도 들었다. 최규하 대통령의 회고록 유무에 대해서는 숨겨진 회고록이 있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지만 (집필 중인 것을 신군부가 뺏어갔다고) 아무런 기록도 남기지 않은 채 영면했다는 것이 일반적인 시각이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그 점을 아쉽게 여기지만 그의 성격으로 보자면 회고록을 썼다 해도 신통한 내용이 있을 것 같지는 않다.
그가 강단을 보인 것은 12.12사태 당시 전두환이 정승화 계엄사령관을 피체하려 할 때 이를 재가하지 않은 것이 전부일 듯하다. 그때 신군부 반란군의 총소리를 들은 노재현 국방장관은 겁에 질려 정신없이 도망쳐 증발해 버렸고, 최규하 대통령은 그의 부재를 핑계로 정승화의 체포를 허락하지 않은 채 버텼다. 물론 이틀 후 신군부 세력에 노재현이 붙잡힘으로써 아무 일도 없었던 것이 되었지만. (그 무책임한 겁쟁이 국방장관은 12월 14일 곧바로 장관직을 사퇴해야 했다)
* 노재현은 훗날 5공청문회에 섰다. 국회의원들이 그에게 반란군을 막지 않은 이유를 묻자 "북한의 남침 우려로 어쩔 수 없었다"는 핑계를 대며 횡설수설했다. 그는 신군부 정권 아래서 한국종합화학공업 사장 등을 지내다 2019년 93세로 영면해 국립현충원에 안장됐다.
최규하는 대통령이었지만 실권을 행사하지 못했다. 당시의 실권자는 당연히 국보위 상임의장과 중앙정보부장 서리를 겸했던 전두환이었으니 국가 운영에 관한 중요 명령은 그의 입으로부터 하달되었다. 당시 최규하가 국무회의를 진행한 건 서울 개최 예정이었던 미스 유니버스 선발대회를 위한 대책회의 등 몇 개에 지나지 않았다고 한다.
* 당시 세종문화회관에서 열렸던 1980년 미스 유니버스 대회에서 미국 국적의 참한 이미지의 아가씨 숀 웨덜리가 여왕으로 등극했고 미스코리아 김은정은 공동 12위에 올랐다. 당시의 수상자는 아래와 같다. (본문과는 관계 없지만 국제 미인대회 개최 기념으로)
Miss Universe 1980: USA – Shawn Nichols Weatherl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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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st Runner-up: SCOTLAND – Linda Gallagh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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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nd Runner-up: NEW ZEALAND – Diana Delyse Not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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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rd Runner-up: PHILIPPINES – Maria Rosario “Chat” Rivera Silay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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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th Runner-up: SWEDEN – Eva Brigitta Anderss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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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op 12:
CANADA – Teresa “Terry” Lynn Mackay
COLOMBIA – Maria Patricia Arbeláez Peláez
ICELAND – Gudbjörg Sigurdardóttir
KOREA – Eun-jung Kim
PANAMA – Gloria Karamañites Davis
PUERTO RICO – Lillian Agnes Tañón Correa
TAHITI – Thilda Raina Fuller최규하는 그렇게 신군부의 그늘에 가려 있다 8개월도 채 못 채운 어느 날 대통령직을 사임했다. 제 뜻이 아니라 전두환·노태우의 강압에 의해서였는데, 사임을 종용하기 위해 찾아간 특사(?) 김정열은 뜻밖에도 완강히 버티는 최규하를 5시간이나 설득해야 했다. 그는 결국 8월 16일 오전 10시, 청와대 영빈관에서 "나는 오늘, 대통령의 직에서 물러나 헌법의 규정에 의거한 대통령 권한대행권자에게 정부를 이양하기로 결정했다"는 하야 성명을 발표해야 했다.
나는 그때 그 광경을 TV로 지켜보며, 그가 "국민 여러분. 저는 오늘 전두환 신군부에 의해 대통령 직에서 강제로 물러나게 되었습니다. 저는 비록 대통령으로서의 소임을 다하지 못하고 물러나나 국민 여러분께서는 온 힘을 합쳐 광주 학살의 원흉 살인마 전두환이 대통령에 오르는 것을 막아주십시오. 그리고 국민 직선에 의한 대통령을 뽑아 그로 하여금 이 나라를 올바르게 이끌어나가도록 해주십시오" 라고 절규하기를 빌었지만 그러한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 이와 같은 사태를 막기 위해 하야 방송이 사실은 녹화방송이었다는 말이 있다. 아마도 그게 맞을 것이다.
정확한 날짜는 기억 안 나지만 그의 퇴임식도 중계되었다. 그때 인상적인 장면은 부인 홍기 여사에게 등짝을 세게 얻어 맞은 일이었다. 홍기 여사의 행동에 정치적 의사는 전혀 담겨 있지 않았고, 그저 동작이 굼뜬 남편에 대해 평소 하던 대로 남성 호르몬 분비에 의해 표출되는 행위를 되풀이한 것뿐이었다. 상대적으로 여성 호르몬이 분비돼 (노화로 인해) 유약해진 최규하 전 대통령 역시 평소의 습관에 익숙한 듯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홍기 여사가 큰 일(?)을 낸 건 80년 9월 1일 전두환의 대통령 취임식장에서였다. 그는 식장에 들어서는 전두환 부부를 생까는 것을 시작으로, 취임식 내내 굳은 표정으로 한 점만을 응시했다. 그러다 화동(花童)들이 전두환 부부에게 꽃을 건네는 순간 급기야 안경을 올려 눈물을 훔쳤다. 그는 취임식 직후 이순자가 내민 손을 마지못해 잡았으나 곧 놓았고, 남편 최규하가 가지고 있으라는 듯 건네준 책자 봉투(전두환 홍보물로 보이는)도 내팽개치듯 뿌리쳤다. 정확한 속내는 모르겠지만 전두환의 대통령 취임에 불만울 표출한 것은 틀림없었다. 세인들은 남편보다 난 사람이라고들 했다.
그렇다고 그가 대통령 영부인의 자리에 미련을 가진 것은 아닌 듯했다. 충북 충주 출신의 그는 대통령의 부인으로 있는 동안 한 번도 영부인의 자격으로서 자리를 마련한 적이 없으며, 내내 조용히 외조했다. 또한 부부가 함께 검소했으니 그들 부부의 서교동 집은 연탄보일러였고, 30년 넘은 라디오, 50년 된 선풍기 앞에서 홍기 여사는 손수 바느질을 하였으며, 무엇이든 완전히 고장 나 재사용이 불가능하기 전까지는 버리는 법이 없었다.
홍기 여사는 말년에 알츠하이머를 앓다가 2004년 타계했고, 최규하 전 대통령도 2년 후인 2006년 노환으로 세상을 떠났다. 두 사람은 대전 현충원에 합장됐다. 세상 사람들은 혹시 최규하가 남 몰래 회고록을 남기지 않았을까 기대했다. 시절이 시절이었는지라 만일 회고록이 있다면 틀림없이 엄청난 비화가 쏟아져 역사의 진실을 밝히는 데 일익을 할 것이라 보았기 때문이었다. (이를테면 광주에서의 최초 발포 명령권자 등)
하지만 그런 것은 없었다. 그는 대통령 하야에 얽힌 스토리 등, 일체의 속사정에 관해 죽을 때까지 아무런 말을 하지 않았고 아무런 글도 남기지 않았다. 그는 그저 조용히 떠났다. 대통령 직에 있을 때와 마찬가지로 아무런 존재감 없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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