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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천체망원경의 원리와 역사(I)
    거꾸로 읽는 천문학개론 2018. 5. 12. 06:12


    고조선 시대부터 시작된 우리나라의 천문학이 세계 최고 수준이었음은 이미 여러 장에 걸쳐 설명한 바 있다. 하지만 그와 같은 선진 기술을 가지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세계를 선도하지는 못했는데, 그 이유 중의 가장 큰 요인은 아마도 망원경의 부재일 것 같다. 우리나라에서는 유리의 제조 기술이 없었던 반면 서방 세계에서는 시리아에서 시작된 소다석회유리 계열의 대롱불기 유리제조법이 들어와 기원후 1세기경의 로마제국부터는 그릇 등에 널리 사용되기 시작하였다. 이름하여 '로만 글라스'로, 앞서 말한 황남대총 등에서 출토된 유리병과 유리잔도 귀한 수입품인 까닭에 사용자와 함께 묻힌 케이스였다. 



    경주 황남대총 출토 유리잔(사진출처: 문화재청)



    하지만 유럽에서도 그 시절부터 유리 렌즈가 달린 망원경이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대물렌즈 및 접안렌즈가 접합된 망원경이 만들어진 것은 그로부터 1500년이 지난 후로, 최초의 제작자는 1600년대 초 네덜란드의 어느 안경 제조공이었다. 1609년 이탈리아의 갈릴레오(1564-1642)는 이것을 참고해 하늘의 별을 관찰할 수 있는 망원경을 만들었는데, 이것이 오늘날의 천체망원경의 시초였다. 다만 그것은 배율의 한계가 있었던 바, 먼 천체의 별을 보는 데는 별로 유용하지 않았다.(요즘 시중에서 파는 비싼 천체망원경으로도 태양계 외의 모든 별은 모두 깨알 한 점에 불과한데 당시는 오죽했으랴)


    이에 갈릴레이는 먼 천체는 포기하고 태양계를 살피기 시작했다. 그가 집중적으로 들이댄 건 가장 먼 토성이었다. 사실 그 테를 확인할 수 없을 뿐이지 태양계의 토성까지는 우리의 육안으로도 관측이 가능하므로 화(火)·수(水)·목(木)·금(金)·토(土)성의 운행, 즉 오행(五行, Five Elements)의 원리는 동양에서도 오래 전부터 정립된 천문체계였다. 갈릴레이는 자신의 망원경으로써 토성의 테(고리)를 확인했지만 말한 바대로 배율의 한계가 있었기에 이것을 토성의 한 부분으로 생각한 스케치를 남겼다. 


    그는 이 망원경으로 목성의 4개 위성도 발견했는데, 이로부터 코페르니쿠스(1473-1543)의 지동설(地動說)은 더욱 힘을 얻게 되었고, 갈릴레이는 이 목성의 위성들을 교황청 사람들에게 보여주기 위해 망원경을 들고 직접 로마를 방문하기도 했다. 하지만 우주의 지구중심설, 이른바 천동설(天動說)에 젖어 있는 교황청을 설득시키지는 못했던 바, 결국은 무력에 굴복해 지동설을 접을 수밖에 없었는데, 그가 종교재판장을 나오며 '그래도 지구는 돈다'고 중얼거렸다는 일화는 너무도 유명하다. 



    이탈리아 '갈릴레오 박물관'에 전시된 갈릴레오 망원경


    갈릴레오 망원경의 대물렌즈. 최초의 망원경은 구경이 겨우 1.5cm였다. 



    갈릴레오의 망원경 및 토성의 스케치. 1612년 구경 2.6cm의 보다 향상된 망원경으로 본 것이나 역시 한계가 있었다. 

     

    갈릴레오의 망원경 원리는 비교적 간단하니, 두 개의 렌즈를 적당한 간격을 떨어뜨려 사물을 보면 크게 볼 수 있다는 것이다.



    갈릴레오가 알아차리지 못한 토성의 고리를 확인한 사람은 같은 이탈리아의 천문학자 도미니크 카시니(1625-1727)였다. 그는 1671년 파리 천문대의 관측대장이 되었는데, 그는 여기서 보다 발전된 망원경으로써 토성의 4개 위성을 발견하고 토성의 고리가 수많은 입자로 이루어져 있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이때부터 토성 고리의 간극을 카시니 간극이라 부르게 되는데, 파리 천문대의 경통은 지금까지의 것보다 한참 길었으므로 망원경 안에서 흔히 일어나는 색수차(色收差)*의 보정이 어느 정도 가능했기 때문이다. 


    * 광학계에서 렌즈에 물체의 상이 맺어질 때 광학재료의 굴절률이 파장(빛깔)에 따라 다르기 때문에 일어나는 현상으로, 굴절율에 따라 상이 생기는 위치와 배율이 달라지는 차이를 말한다.   


    이와 같은 색수차 현상은 렌즈의 굴곡을 작게 하면 줄일 수 있지만 그렇게 하면 상의 촛점거리가 대물렌즈에서 더욱 멀어지게 된다. 이에 망원경은 더욱 긴 경통을 필요로 하게 되는데, 그와 같은 망원경은 만드는 데 한계도 있었거니와 다루기도 쉽지 않았다. 이를 극복하기 위한 방법은 볼록렌즈와 오목렌즈를 경합해 해결할 수는 있으나 관측하는 빛의 량이 크게 줄어든다는 단점이 발생하였다. 

     

     

    1889년의 파리 천문대 망원경

    이때는 경통의 길이를 반사경으로 늘리는 반사망원경이 도입됐다. 왼쪽 높은 곳에서 접안렌즈를 들여다보는 사람이 관찰자이다. 


    파리 천문대는 대물렌즈와 관측자와의 거리를 더 멀게 하려는 의도에서 경통이 없는 망원경을 실험하기도 했다. 아래 그림에서 대물렌즈는 오른쪽 화살표 지점에 설치돼 있었고, 대안렌즈는 관측자가 있는 아래의 왼쪽 화살표 지점에 설치돼 관측자가 접안렌즈를 조정하면서 상의 확대를 시도했다. 대물렌즈와 대안렌즈는 명주실로 연결돼 있었던 바, 관측자는 실을 당겨 두 렌즈를 일치시켰다. 



    1705년 파리 천문대에 설치된 말리 타워(오른쪽) 

    가운데 카시니가 만든 최초의 망원경이 서 있고, 왼쪽 그림은 소형 망원경으로 별을 관측하는 모습이다. 




    영국의 아이작 뉴턴(1642-1727)은 이상의 불편을 보다 획기적으로 개선했다. 뉴턴은 망원경이 경통 안에서 이같은 수고를 거치는 방법을 고안해 내었으니, 경통의 반사경에 모인 빛이 두 번째 거울로 반사된 다음 접안렌즈로 가게끔 하였다. 이때 접안렌즈는 반사경이 보낸 빛의 상을 당연히 크게 확대시킬 수 있었으므로 이른바 반사 망원경의 원리가 뉴턴에 의해 확립되어진 것이다.(아울러 거울에 반사된 빛에서는 색수차가 발생하지 않으므로 문제거리인 색수차도 해결될 수 있었다) 


    뉴턴의 망원경(오른쪽)은 대물렌즈 대신 오목거울을 사용하였다. 빛은 오목거울을 통과하지 않고 반사되어 접안렌즈를 통해 눈에 전달되므로 왼쪽 갈릴레오식 망원경에서처럼 상이 짧은 거리에 맺혀지는 것을 보완할 수 있었다. 



    뉴턴의 망원경은 경통이 짧아졌고 경통 밑에 회전이 자유로운 구체가 설치됐다. 



    하지만 이와 같은 뉴턴식 망원경은 만들기가 어려워 크게 발전하지 못했는데, 1975년 런던의 광학자 존 돌런드(1706-1761)가 재질이 다른 유리로 만든 렌즈들을 결합하면 색수차 현상을 피할 수 있다는 사실을 발견해냈다. 기타 색수차 극복과 상의 확대를 위한 아래와 같은 식의 갖가지 실험이 있었으나 결국은 돌런드의 이론을 바탕으로 한 갈릴레오식 굴절 망원경으로 회귀하게 되었다. 한마디로 렌즈의 크기를 키우는 싸움에 들어간 것이었다.(현대에 들어서는 주변과학의 발달과 함께 반사 망원경이 주류를 이루게 되는 바, 세계 유명 천문대 망원경은 거의가 반사 망원경이다)



    1667년 요하네스 헤벨리우스가 그린 '공중망원경(aerial telescope)' 목판화



    그 싸움에서의 최고 수혜자는 독일계 영국인 윌리엄 허셜(1738-1822)이었다. 허셜은 먼 거리까지 관찰이 가능한 배율이 6,450배나 되는 접안 렌즈를 하루 16시간을 갈아대며 직접 개발했다. 함께 영국으로 이주해온 그의 누이동생 캐롤라인 역시 가난 속에 배고픔과 싸워가며 렌즈를 만들었고, 1781년 3월 13일 마침내 자신들이 만든 망원경으로 천왕성을 발견해냈다.(그밖에도 2400개의 성운을 발견했다/천왕성에 대해서는 '지구의 또 다른 형제들' 참조)


    이로 인해 윌리엄 허셜은 그해 영국 왕립학회의 회원이 되었으며, 캐롤라인은 정식 조수로 임명되어 연금을 받게 되었던 바, 이후 안정된 생활 속에 천문학을 더욱 연구해 그녀의 나이 77세 되던 해인 1828년 천문학회로부터 공로 훈장을 받았다


                      

    허셜이 만든 48인치 구경 천체망원경은 이후 50년간 세계에서 가장 큰 망원경으로 군림하였다. 촛점거리가 40 피트이기에 Great-Foot telescope로 불리기도 했다.  



    재현된 허셜 망원경



     * 사진 및 그림의 출처: Google. j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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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하스페르츠의 단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