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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조선의 대표 배신자 친중파 김자점의 최후
    토박이가 부르는 서울야곡 2025. 4. 11. 21:39

     
    앞서 말한 노량진 유원강변아파트와 래미안 트윈파크아파트 단지 앞으로는 바로 한강이다. 그리고 뒤로는 사육신묘 공원이 있는 바, 뷰(VIEW)로서만 따져본 주거환경으로는 가히 서울의 으뜸이 아닐까 싶다. 그리고 이곳에는 사육신묘 외에 절의(節義)의 또 다른 표상 박태보의 위패를 모신 노강서원이 있었던 바, (유원강변아파트 103동 자리) 곱으로 의미가 깊은 장소라 하겠다.  
     
     

    좁은 길에 설치돼 잘 보이지 않는 노강서원 터 표지
    아파트 주변으로 벚꽃이 만개했다.
    부근의 보호수 느티나무
    강쪽에서 본 유원강변아파트와 래미안 트윈파크아파트
    반대 쪽 풍경

     
    이렇게 놓고 보니 갑자기 부동산 영업소의 블로그처럼 되어버렸다. 하지만 부동산 쪽은 평소에도 그리 관심이 없고, 앞서의 소개도 사육신묘를 강조하고 싶음이다. 물론 사육신묘 자체보다는 그 충절을 강조하고자 함인데, 더불어 가슴 아픈 배신의 역사 또한 더듬어 보고 싶었다. 우선 사육신의 단종 복위 운동을 좌절시키고 그들 모두를 형장으로 보낸 김질(金礩, 1422~1478)의 이야기부터 하려 한다. 
     
     

    사육신묘
    사육신묘 의절사 / 누군가 정중히 절을 하고 있다.
    정조 6년(1782)에 세워진 사육신 신도비

     
    당시 성균관사예(성균관 유생들에게 음악을 지도하는 관직)였던 김질은 성삼문의 제안으로 단종 복위 거사에 동참하였으나 갑자기 겁을 먹게 된다. 그리하여 결국 세조에게 사육신의 계획을 밀고하여 좌절시키고 사육신과 그의 가족들을 모두 죽게 만들었다. 역사적으로는 역적임에 분명하지만 세조에게는 충신이었을 터, 크게 신임을 받아 공조판서·병조판서·우참찬·경상감사를 거쳐 삼정승의 자리까지 올랐다. 그는 좌의정이 된 뒤 한명회·신숙주 등과 함께 원로원을 꾸려 일인지하 만인지상의 권력을 누리다 편안히 죽었다.  

     

     

    포천시 내촌면의 김질 묘
    묘표
    무덤 뒤에서 본 조산 풍경
    문인석
    김질 묘 위의 주인 모를 무덤
    후손인 안동 김씨 문중에서 근자에 세운 김질 사적비


    그런데 배신 DNA의 유전이라할까? 그의 후손 중에서도 만고의 배신자가 출현했던 바, 인조 때의 김자점(金自點, 1588~1652)이 그놈이다. 김자점은 특이하게도 과거를 보지 않고 음서를 통해 관직에 진출했는데, 그것이 바로 세조 때의 공신 김질의 후손이라는 이유에서였다. 조선시대의 음서는 고려시대와 달리 한계가 있었음에도 김자점은 정6품 병조좌랑까지 무난히 진출했다.
     
    하지만 더 오르기는 사실상 힘든 지경이 되었는데 마침 인조반정이 일어났다. 앞서도 말했지만 인조반정은 김류, 이귀, 이괄 등이 광해군을 몰아낼 역모를 진행하면서부터 시작됐다. 그리고 마침내 거병했으나 김류는 겁을 먹고 집 밖을 나서지 않았다. 대신 함경도 병마절도사로 부임할 예정의 이괄이 자신의 군사들로 북소문인 창의문을 격파하고 궁궐로 돌진, 광해군을 몰아냄으로써 반정을 성사시킬 수 있었다. 
     
     

    이괄이 돌파한 창의문

     
    이때 병조좌랑 김자점은 홍제원에 집결했던 군대를 이괄·이귀의 군대와 합류시켜 창의문을 돌파해 입성했고 그 공으로 김류·이귀와 함께 반정 1등 공신에 책봉되었다. 이괄은 2등에 올랐다. 김류는 공이 없었지만 최초에 이귀와 함께 반정을 계획한 사람이었고 또 능양군(훗날의 인조가 되는)을 추대한 킹 메이커였으므로 1등 공신이 되는 것이 그럭저럭 이해는 됐다. 하지만 그저 이괄의 뒤를 따랐던 김자점이 이괄을 제치고 1등 공신이 됐다는 것은 이해가 불가했는데, 필시 이귀와 사돈지간이라는 연줄이 작용했을 터였다. (이와 같은 불합리한 논공행상은 곧 이괄의 난을 불러온다) 
     
     

    실록과는 다른, 하지만 이괄의 난에 관한 세세한 기록이 돋보이는 이긍익의 역사서 <연려실기술>

     
    1627년 정묘호란이 일어났을 때 김자점은 인조를 호종해 강화도로 도피한 공으로 도원수에 임명되었다. 후금의  첫번째 침입인 정묘호란은 흐지부지 끝났으므로 어쩌면 김자점의 출세길을 열어준 전쟁인 셈이 됐는데, 2차 침입인 병자호란에 있어서는 그렇지 못했다. 도원수로서 아무런 역할을 못하고 무력하게 저항하다 결국은 삼전도이 비극을 불러온 김자점이었던 바, 결국은 탄핵되어 강화 교동도로 유배를 갔다. 1624년 광해군의 잔당이었던 북인 인사 40여 명을 처형한 데 대한 반대파의 역공이기도 했다. 

     

    운이 좋게도 그는 1년 만에 풀려나 정계로 복귀하였다. 그 배경에는 소현세자의 귀국이 있었다. 소현세자는 병자호란 후 청나라에 인질로 끌려가 9년간 고초를 겪다 귀국했는데, 그 아비 인조는 그런 아들을 따뜻히 맞기는커녕 구박만을 일삼다 1645년(인조 23) 6월 27일, 결국 아들을 독살해죽였다. 청나라를 뒷배로 한 세자가 자신을 왕위에서 밀어낼지도 모른다는 자격지심 같은 불안감 때문이었는데, 더 나아가 며느리인 강빈(姜賓, 소현세자의 부인)마저 사사(賜死)하고 소현세자의 어린 자식들까지 유배 보냈다.   

     

     

    고양시 덕양구 군부대 내에 있는 소현세자 아들 경선군과 경완군의 묘 / 제주도에서 죽어 여기 묻혔다.
    고양시덕양구 대자동 산65-2의 경안군 묘 / 셋째 아들 경안군은 다행히 유배에서 풀려났으나 그리 오래 살지 못하고 요절했다.

     

    강빈이 죽은 이유는 임금 수라에 독약을 넣었다는 죄였다. 이것은 전혀 사실이 아니었으니 이 모두가 김자점이 인조의 후궁 귀인 조씨와 공모해 벌인 일이었다. 하지만 이 일로 김자점은 인조의 총애를 받게 되었던 바, 단박에 영의정에 올랐다. 그럼에도 김자점의 권력 욕은 끝이 없었으니 다음으로는 좌의정 심기원을 역모 죄로 고변했다. 심기원은 즉시 체포되어 혹독한 국문을 받았고 결국 있지도 않은 죄를 자복해야 했다. 그는 잔혹하게 처형당했고, 임경업 장군도 이와 연루돼 고신(拷訊)을 받고 옥사했다. 

     

     

    드라마 '꽃들의 전쟁'에서 악역을 열연했던 귀인 조씨 역의 김현주
    드라마 '꽃들의 전쟁'에서 김자점 역을 했던 악역 전담 배우 정성모
    드라마 '꽃들의 전쟁'에서 고신당하는 심기원 역의 김규철

     

    야사집인 <청성잡기>를 보면 이때 김자점이 심기원의 능지형을 강력히 주장하여 결국 산 채로 사지가 찢겨져 죽었다고 했는데, 심기원이 죽으면서 "김자점 네 놈도 나와 똑같이 죽을 것"이라며 저주했고, 훗날 김자점 역시 같은 방법으로 죽었다는 이야기가 실려 있다. 사실인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심기원의 사형 방식에 대해 논의하던 중 비변사 내에서 논쟁이 오갔으며, 이로 인해 사형이 지연되었다는 점은 정설이다. 

     

    공신이자 대신인 심기원의 체통을 지켜주기 위해 비공개로  사약을 내릴 지, 아니면  공개처형 할 지가 조율됐고, 그 중에는 목숨은 살려주어 유배형에 처하자는 소수 의견도 있었지만 대세에 밀려 묵살되었다고도 한다. 그러다 결국 공개처형이 결정되었는데, 일주일 전 헌번재판소에서 이루어진 윤석렬 대통령 탄핵사건의 결말 부분이 오버랩된다. (이에 대해서는 머지않은 시각, 역사의 법정에서 진실이 밝혀질 것이라고 본다. 특히 정형식 재판관의 당시 결정을 주목해 볼 일이다.) 

     

    <연려실기술>에서는 김자점이 따로 집행담당관을 불러 개인적으로 능지형을 지시했다고 기술되어 있지만, 심기원이나  김자점이 능지형에 해당하는 거열형을 받은 적이 없다는 것이 정설이다. 즉 최후에 결정된 심기원의 공개처형이 능지형으로 둔갑되어 세간에 전해졌다는 것이다. 아무튼 심기원은 그렇게 원통하고 억울하게 죽었다.

     

    영원할 것 같았던 김자점의 영화는 인조의 죽음과 함께 사그라졌다. 인조가 죽고 효종이 즉위하자 김자점은 차츰 권력에서 밀려나 왕따가 되었다. 이에 김자점은 중국의 힘을 빌려 역전을 도모하고자 하였던 바, 수하의 역관(譯官)을 은밀히 청나라로 보내 '효종이 북벌을 준비하고 있다'고 밀고했다. 그는 그 증거로써 효종이 궁궐에서 사용한 명나라 연호가 쓰인 문서를 보냈다.

     

    김자점이 병자호란 이후 줄곧 청나라에 아부해온 친청파라는 것은 누구나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까닭에 김자점은 청나라가 효종을 밀어내고 신정부를 세우리라 기대한 것이었다. 그의 희망 대로 청나라에서 조선에 사신단이 파견되었다. 하지만 그 사신단은 당시 추진되던 황족 도르곤과 효종의 양녀 의순공주와의 혼인에 더욱 신경을 썼고 김자점의 밀고에 대해서는 조선쪽의 편의를 봐주는 쪽으로 매듭 지었다.

     

    이제 남은 것은 김자점에 대한 단죄였다. 김자점은 효종의 친국(親鞫) 속에 극형에 처해지고 연좌죄로 3대가 죽었다. 자점의 어미, 아내, 딸 등은 노비로 전락했다. (김자점은 전해지는 무덤도 없다) 그저 다행이라면 3족을 모두 멸하는 중국과 달리 16세 이상 남성만 사형에 처해지는 조선의 형벌이 적용돼 나머지 친족들은 살았고, 그 친족들의 가족들도 노비가 되지 않고 서인으로 강등되는 선에서 종결되었다. 대선이 끝나더라도 당사자 외는 큰 처벌이 없으리라는 현실과 또 다시 오버랩된다. 

     

     

    의정부시 호원동의 의순공주 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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