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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서울 시흥 탑동의 탑과 보문동 탑골승방의 탑
    토박이가 부르는 서울야곡 2025. 4. 24. 23:51

     
    돌아다니다 보면 탑동, 탑말, 혹은 탑리(塔里)라는 지명을 만날 때가 있는데, 의외로 그곳에 탑이 없을 적이 많다. 대표적인 예가 경주시 탑동으로, 경주가 탑이 흔한 도시임에도 불구하고 근방에는 탑이 없다. 궁금한 마음에 좀 더 알아보니 이곳에 신라 때의 담암사(曇巖寺)라는 절이 있었고 폐사 후에도 탑이 남아 탑리라 불렸다고 한다. 그것을 보면 담암사 탑은 근자에까지 존재했던 듯하나 지금은 찾을 길이 없다. 
     
    반면 탑이 흔하지 않은 서울 속 탑동에는 탑이 존재한다. 그래서 첫 번째로 서울탑동초등학교 부근 금천구 시흥동 탑골로에 있다는 려말선초(고려시대 말~ 조선시대 초) 삼층석탑을 찾아 나섰는데, 조금 어려웠다. 사실 시흥동 탑골로(路) 탑은 잘 알려져 있지 않은 데다 GPS에도 표시되지 않는다. 그래서  시흥동 230-4의 주소를 갖고 찾아 나섰지만 탑 대신 '물결마트'라는 예쁜 상호를 가진 가게가 나왔다. 아마도 주소가 틀렸던 것 같다.
     
    그렇지만 필시 근방일 터, 석탑 앞에 함께 자리한다는 서울시 지정 보호수(서18-4)인 향나무부터 찾기로 했다. 하지만 그 역시 쉽지 않았다. 수령 500년이 넘은 오래된 보호수 향나무라고 하니 주민들은 알 것이라 생각했지만 대부분이 몰랐고, 의외로 거의 청력을 상실한 듯 여겨지는 할머니 한 분이 알아듣고 나를 안내해 주었다. 예전 인천 문학동 고인돌을 찾아 나섰을 때의 데자뷔 같다. 당시 미추홀구 학익동 미추홀 근린공원에 모여 있던 할머니 중에서 유일하게 '고인돌'이라는 단어를 인지하고 가르쳐 준 분이 있었다.  
     
    탑은 보호수 향나루 그늘에서 쉬 듯 서 있었다. 남아 있는 탑의 크기는 약 172cm 정도로서, 580년 됐다는 나무의 수령과 탑의 역사가 함께 할 듯하다. 즉 탑을 조성했거나 중수한 기념으로 향나무를 심었을 개연성이 농후하지만 탑의 역사에 대해서는 전혀 알려진 것이 없다. 역사적 기록을 떠나 근방에 폐사지의 흔적 같은 것도 없다.
     
    다만 여기서 옛 시가지로 10여 분 정도 걸어가면 만날 수 있는 3그루의 오래된 은행나무와 동헌 자리, 정조대왕이 화성 능행길에 이용한 시흥행궁 등의 자리가, 과거 이곳을 지나갔을 옛 사람들을 위한 이정표와 같은 탑이었지 않았을까 하는 유추를 가능케 해 준다. 


     

    벽산아파트 쪽에 '향나무와 삼층석탑'이라는 표지판이 있으나 잘 보이지 않는다.
    시흥동 탑골로 삼층석탑
    조금 멀리서 찍은 사진
    반대쪽에서 찍은 사진
    삼층석탑 안내문
    보호수 향나무 안내문 / 1969년 지정 당시 525년이므로 지금은 수령 581년이다.
    은행나무사거리로 가다 만난 서울탑동초등학교
    시흥5동 은행나무사거리의 비석과 보호수 은행나무
    말로는 '시흥현령선정비'인데 공교롭게도 탐관오리 4명의 비석만 남았다. 과거에는 모두 18개가 있었다고 한다.
    그 탐관오리들의 이름은 이와 같다. / 안내문에서
    옛 금천현 동헌관아 자리의 은행나무
    금천현(시흥현) 동헌관아 자리 표석
    3곳 은행나무의 위치가 동헌관아 은행나무 아래 표시돼 있다. / 3곳 은행나무 모두 800여 년의 수령을 자랑한다.
    예향교회 앞 은행나무
    시흥행궁이 자리했던 은행나무시장
    시흥5동 주민센터 앞의 시흥행궁길 표지판
    정조의 시흥행궁 방문을 그린 <시흥행궁도> / 정조는 노량진 배다리를 건너 앞서 말한 용양봉저정에서 점심을 먹은 뒤 시흥행궁에 도착해 하룻밤을 잤다. 그리고 다음날 사도세자의 묘인 화성 현륭원에 이르렀다.
    <시흥행궁도>에 의하면 시흥행궁의 정문은 은행나무 시장 입구 옆 형제약국 자리에 있었다.
    옛 시흥행궁 자리 / 시흥행궁은 철종 때 불탔고 필요성을 느끼지 않아 복원되지 않았다. 까닭에 시흥행궁의 유적은 기왓장 하나 전하는게 없다.

     

    서울 성북구 보문동 탑골에도 탑이 있다. 1047년(고려 문종 원년)에 건립된 6층 석탑이다. (탑의 이름은 특별히 없는 듯하다) 석탑의 층수가 짝수로 조성되는 경우는 거의 없으므로 본래 7층이었을 것으로 여겨지는데, 반대로 5층 탑이었을 것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이렇게 생각이 제각각인 것은  5층 이상부터는 망실된 부분을 보완한 흔적이 역력한 까닭이다. 즉 5층 이상의 부분은 상상의 영역인 것이다. 
     
     

    보문동 탑골 석탑

     
    그 부분을 자세히 보면 4, 5층의 탑신과 옥개석(지붕돌)은 땅에 묻혔던 것을 찾아 맞춘 듯 색이 다르지만 그나마 제짝 같다. 하지만 그 위 상륜부는 남의 식구임이 분명하다. 아마도 이와 같은 재조성의 과정에서 교란된 듯한데, 까닭에 7층을 넘어 9층탑이었을 것이라는 상상도 가능하다. 9층으로 세장(細長)하게 조성한 금강사 유점사 능인보전 앞의 석탑과 같은 탑도 존재하기 때문이다. 
     
     

    유점사 능인보전 앞 고려 구층석탑

     
    정확지는 않지만 이 탑은 과거 미타사에 딸렸던 탑으로 여겨진다. 탑 아래 존재하는 미타사의 연혁에 따르면 이 사찰은 950년(고려 광종 원년)에 혜거국사가 처음 창건하고 미타사라는 이름을 지었다고 전해진다. (혜거국사의 승탑은 본래 도봉산 영국사에 있었으나 폐사된 후 옮겨진 듯 지금은 망월사에서 볼 수 있다) 이후로 이곳은  탑골, 미타사는 탑골승방으로 불렸다 하는데, 탑이 꽤 높은 곳에 위치해 있어 부근 건물이 없던 과거에는 사방에서 잘 보였을 것이라 여겨진다.
     
    그런데 사실 미타사의 연혁은 사적기 등이 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서 전해지는 말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이기는 힘들다. 그리고 탑이 950년에 혜거국사 창건 때의 것인지, 연혁기에 전하는 1314년 충숙왕 원년의 혜감국사 중건 때의 것인지도 알 수 없다. 어쩌면 훨씬 후대의 것일 수도 있다. 아무튼 이 탑으로 인해 일대가 탑골로 불렸음은 분명한데, 다만 지금은 비구니 사찰 미타사 속 깊은 곳에 자리하고 있어 일부러 찾아가지 않고는 볼 수가 없다. 
     
     

    신라 석탑 양식을 충실히 계승한 듯 보인다.
    미타사 대웅전
    미타사 대웅전 삼존불과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358호인 미타사 아미타후불도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359호인 미타사 지장시왕도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360호인 미타사 신중도 / 그외 불화 5점이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로 지정돼 있다.
    삼성각
    단하각 / 석탑은 대웅전 뒤 단하각 왼쪽 언덕 위에 위치해 있다.
    석탑에서 내려 본 미타사
    미타사 안내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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