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산에만 머물다 이윽고 눈앞에 보이는 한강대교를 건넜다. 그리고 취지에 맞게 옛 흔적들을 더듬어보았다. 가장 먼저 찾아간 곳은 용양봉저정(龍驤鳳翥亭)이라는 정자로 조선 22대 왕 정조 임금의 화성 행차 흔적이 남아 있는 곳이다. 잘 알려진 대로 정조의 아버지 사도세자는 영조에 의해 뒤주에 갇혔고 여드레째 되는 날 죽었다. (8일간 버틴 것은 아니고 여드레째 되는 날 확인해 보니 죽어 있었다) 정조는 그렇게 원통히 죽은 아비를 연모해 재위기간 동안(1776~1800) 총 12회에 걸쳐 노량진 쪽의 한강을 건너 사도세자의 묘(현륭원)가 있는 수원 화산(華山)에 능행했다.
용산에서 바라본 노량진
아래 사진은 서울역사아카이브 '서울생활문화자료조사'에서 발췌한 근세 노량진의 모습으로 '1910년 전후 노량진 일대'라는 제목이 붙어 있다. 지금보다도 조밀해 보이는 주택이 인상적인 사진이다. 이 사진에서 주목해야 할 부분은 한강철교로, 경성역(京城驛)과 제물포역을 잇는 최초의 한강 다리로써 큰 의미를 지닌다. 1897년 3월 22일 미국인 모스에 의해 착공된 경인선은 1899년 9월 18일 노량진~제물포 구간 33.2km가 개통되었으며, 이후 일본인에 의해 한강철교가 건설되며 1900년 7월 8일 드디어 전구간이 개통되었다.
1910년 전후 노량진 일대 / 오른쪽 박스 안이 용양봉저정이다.
이로써 경인선이 완전 개통되었는데, 이때의 경인선 종착역인 경성역은 남대문역(서울역)이 아닌 서대문역으로, 지금의 이화여고와 이화여자외국어고 일대에 위치했다. 지금으로서는 상상조차 하기 어렵지만 당시는 그곳에 역이 있었고 스테이션호텔(후일 에스터 하우스로 신장개업)이 있었다. 문자 그대로의 정거장 호텔이었던 셈인데, 호텔 뒤편에 있던 회화나무가 지금도 남아 있다.
서대문역 터 표석표석 맞은편의 이화여고 교문이화여자외국어고 부근의 수령 500년 된 회화나무 / 이 나무는 원래 농업박물관 뒤쪽에 있었으나 2010년 농협중앙회 신관을 지으며 지금의 자리로 옮겨졌다.에스터 하우스의 사진 / 옆으로 회화나무가 보인다.
그렇다면 다리가 없던 시절, 정조 임금은 어떻게 한강을 건넜을까? 쉽게 배를 탔을까? 정조는 그때그때 주교(舟橋, 배다리)를 가설해 건너는 방법을 선택했다. 이것이 유명한 노량진 배다리로 정조가 직접 설계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그리고 주교 부근에 노량행궁을 지어 오가며 이용했는데, 지금의 용양봉저정은 그 일부가 남아 있는 것이다. 정자의 이름은 일대를 살펴본 정조 임금이 '북쪽의 우뚝한 산과 흘러드는 한강의 모습이 용이 꿈틀대고 봉황이 나는 것 같다'하여 붙였다고 한다.
용양봉저정정면 6칸 측면 2칸의 건물로, 가운데는 임금이 머물 수 있도록 온돌방으로 꾸몄고 좌우 툇간을 두었다.정자 안에 걸린 정조대왕 화성능행도안내문화성 능행도 중 '한강주교환어도(漢江舟橋還御圖)' / 노량진에서 한양 쪽으로 건너오는 모습을 그렸다. 노량진 쪽에 용양봉저정을 비롯한 건물들이 보인다.주교를 건설하는 임시 기관 주교사 터 표석양수리 세미원에 재현된 배다리
위 배다리 그림인 '한강주교환어도(漢江舟橋還御圖)' 속의 주교 길이는 330여 m로 추정되는데, 현재 노들섬∼노량진 간 강폭이 340여 m인 점을 미루어보면 주교가 놓인 곳은 노량행궁 앞에서 노들섬 사이로 여겨진다. 그 건너편에서 용산까지도 마찬가지로 주교가 놓였을 것이다. 이곳에 인마(人馬)가 다닐 수 있는 다리가 다시 놓인 것은 그로부터 140년이 지난 1917년의 일이다. 일제는 1917년 10월 7일 이촌동과 노량진을 연결하는 철제 인도교를 완공해 사람들을 건너 다니게 했는데, 노량진 쪽의 모래톱에 석축을 쌓아 올려 인공섬을 만들고 다리 교각을 세웠다. 그리고 그 인공섬을 '한강 가운데 섬'이라는 의미의 중지도(中之島, 나카노시마)라고 불렀다. 일제가 가설한 인도교는 중지도~노량진 간의 7경간 440m의 대교와, 중지도~한강로간의 3경간 188m의 소교로 나누어져 있었으며 차도는 4.5m, 좌우 보도는 각각 1.6m였다. 이후 다리는 1925년 을축대홍수와 1950년 6.25전쟁 등을 겪으며 파괴되고 증축되는 과정을 몇 차례 겪다가 현재의 8차선 교량이 되었다. 우리가 보고 있는 지금 모습은 1958년 새로 건설될 때의 것이지만, 이중 1917년에 준공된 노량진 방면의 구교(舊橋)는 2020년 9월 서울특별시 등록문화재 1호로 지정되었다.
6.25전쟁 때 폭파되는 한강인도교6.25전쟁 때의 탄흔이 남아 있는 교각 / 서울시 자료노들섬 쪽의 한강대교 / 한강인도교는 1984년 한강종합개발사업에 즈음하여 한강대교로 개칭됐다.서울시 문화재 1호로 지정된 노량진 방면 구교중지도에 세운 한강대교 교각노들섬에서 용양봉저정 방향으로 찍은 사진평화로운 노들섬 풍경노들섬 한강 결빙 관측지점 / 1906년부터 한강 결빙의 기준점이 된 곳이다. 이곳이 완전 결빙하면 한강이 얼었다는 일기예보를 내보낸다. 어릴 적 이곳에서 스케이트를 타기도 하고 낚시를 한 기억도 있으니 지금은 어림도 없다.
중지도라는 이름은 근래까지 쓰이다가 1995년 전국의 일본식 지명을 바로잡을 당시 노들섬으로 바뀌었다. 노들의 의미는 '백로(鷺)가 노니는 징검돌(梁)'이란 뜻으로 과거 모래톱에 백로들이 모여 먹이사냥을 하던 풍경에서 비롯됐다. 노량나루(노량진) 역시 그로부터 유래되었다. 과거 이곳에 있었던 노강서원(鷺江書院)의 이름도 마찬가지 경우로서, 노강은 '백로가 노니는 강'이라는 뜻이다.
오늘 말하려는 것이 노강서원으로, 이미 언급한 바 있는 숙종 때의 충직한 선비 박태보(朴泰輔, 1654~1689)가 죽은 곳에 세워진 서원이다. 당시 숙종은 후궁 희빈 장씨(장희빈)에 미쳐 있었는데, 급기야 숙종은 부인인 인현왕후를 폐서인하고 희빈 장씨가 낳은 아들을 세자로 세웠다. 이에 송시열을 비롯한 서인이 쌍수를 들어 반대했다. 하지만 이미 희빈 장씨에게 마음을 빼앗겨 이성 상실상태였던 숙종은 희빈 장씨의 뒷배였던 남인과 함께 송시열을 위시한 노론 서인들을 모두 쓸어버렸던 바, 이것이 바로 기사환국이다.
이때 박태보는 소론이었으므로 굿이나 보고 떡이나 먹으면 그만이었다. 하지만 원래 올곧은 성정이었던 박태보는 당파와 무관하게 오직 대의(大義)로써 숙종의 행위를 비난하는 상소를 올렸다. "인심과 하늘의 뜻은 억지로 어길 수 없습니다. 아녀자들끼리 서로 모함하고 알력이 생긴 것을 정치에 반영시킴은 옳지 않습니다...."
박태보는 박세당의 둘째 아들로서 올곧음이 부전자전이었다. (☜ '이경석의 신도비를 지은 박세당과 석천동 수락폭포') 박태보는 24세인 숙종 3년(1677) 알성 문과에 장원급제한 후 홍문관 부수찬과 수찬·사헌부지평·사간원정언을 거치며 올바른 언관(言官)으로서의 입지를 굳힌 후 소론의 핵심 인물이 되어 아버지 박세당에 이어 소수파인 소론 당파를 이끌었다. 그는 아버지와 마찬가지로 강직해서 그릇된 일에 대해서는 왕과 대비에게도 직언을 서슴지 않았다. 그는 병조좌랑 시절, 대왕대비의 과한 잔치상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봄과 여름에 건조하고 가물어서 호남과 영남이 모두 적지(赤地, 초목이 나지 않는 땅)가 되었는데 진연(進宴, 궁중 잔치)을 행함은 사리에 맞지 않는 일입니다. 도랑이나 골짜기에서 죽어가는 백성을 생각하지 않고 잔치하여 즐기며 하루를 즐겁게 해 드려 효도하는 것은 공자께서 말한 효(孝)와는 전혀 다른 것입니다.
임금은 "이 진연은 실로 정례(情醴)로서 그만둘 수 없다. 모든 낭비가 될 만한 물건은 마땅히 줄여서 간략하게 하도록 하라"고 답했다. 미관말직인 박태보의 상소를 받아들인 셈이었다. 그는 또 사간원 정언 시절, 오늘날의 복심(覆審) 제도와 같은 계복(啓覆, 임금에게아뢰어사형선고를받은죄인을다시심사함)이 소홀해지자 소(疏)를 올려 이렇게 말했다
지난해에 계복을 정지하셨는데 지금 또 정지하고 폐(廢)한다면 경신년의 죄수가 그대로 옥중에 지체되어 임술년 섣달그믐까지 기다리게 됩니다. 사형시켜야 마땅한 자를 3년 동안이나 옥중에서 지체하게 함은 실형(失刑)하는 것입니다. 이와 반대로, 살려야 마땅한 사람에 대해 장기간 옥사(獄事)를 지체시키면서 목숨을 위태롭게 하는 것 또한 옳지 않습니다.
따뜻한 방의 고운 방석 위에 편안히 앉아 수작(酬酢, 주거니 받거니 술을 마심)하는 것보다는 어가(御駕, 임금의 가마)를 타고 옥중을 드나들면서 수고롭게 추위를 무릅쓰며 죄인의 진실을 따지는 것이 당연히 힘듭니다. 그러나 이로 인해 민심의 화기가 손상되는 일은 없습니다. 따뜻한 방에 앉아 술만 마시지 말고 형을 받은 죄인이 소청을 하면 감방에 나아가 그가 진실로 죄가 있는지를 한번 더 살피라는 충고였다. 하지만 숙종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아울러 박태보의 불경스러운 상소를 처벌하라는 주위 아첨배들의 진언 또한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러나 1689년 기사환국 때는 사정이 완전히 달랐다.
기사년 박태보의 상소에 숙종은 크게 분노했다. 결국 박태보는 음력 5월의 무더운 밤, 창덕궁 인정문 앞에서 혹독한 장형(杖刑)을 당하고, 벌겋게 달군 인두로 온몸을 지지는 낙형(烙刑)을 당했으며, 꿇은 무릎 아래 사금파리를 놓고 내리밟는 압슬형을 당했다. 얼마나 심했던지 정강이가 뼈가 부러져 살을 뚫고 나왔으나 박태보는 비명 한 번 지르지 않았고, 당황하는 나장(羅將)에게 오히려 자신의 도포를 찢어 묶으라고 담담히 말했다.
국문이 행해진 창덕궁 인정문 앞
박태보는 끝까지 죄를 시인하지 않고 소명함으로써 죽을죄는 면했으나 대신 초주검이 되어 전라도 진도 유배길에 올랐다. 하지만 얼마 못 가 노량나루 부근에서 숨을 거두고 말았다. 당시 나이 36세였다. 그를 아끼던 주변 사람들이 박태보가 순절한 곳에 사당을 세웠는데, 곧 서원으로 발전했고 1697년 조윤벽 등의 청액소(請額疏)로 '노강(鷺江)'이라 사액되었다. 망자의 퍼런 기개가 후대까지 미쳤음인지 노강서원은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 때도 살아남았다. 그리고 1925년 을축대홍수 때 쓸려나간 후에도 재건되었으나 1950년 한국전쟁 때 완전 소실되고 말았다. 북한군의 도하를 막으려는 노량진 전투가 워낙에 치열했던 까닭에 살아남을 재간이 없었던 것이다. 노강서원의 터를 알리는 표석이 과거 한강변 유원아파트 103동 앞에 서 있었으나 워낙에 궁벽한 곳에 처박혀서인지 (물론 아파트는 한강뷰의 고급아파트이지만) 건너편 래미안 트윈파크아파트 길 앞으로 옮겨졌다. 하지만 이곳도 보이지 않기는 매한가지다.
노강서원 터 표석노강서원이 있던 유원강변아파트 103동노들섬에서 바라본 유원강변아파트와 래미안 트윈파크아파트
60년대 반남 박씨 후손들에 의한 노강서원 복원 움직임이 있었다. 하지만 그 비싼 땅에서의 복원은 어려웠으니 1969년 의정부시 장암동, 박세당 고택 뒤 수락산 자락에 노강서원을 세웠다. 노강서원에서는 이제 물 대신 산을 볼 수 있게 된 셈이다.예전에 찾아가 보니 의외로 초석이 옛것이라 놀랐는데, 알고 보니 김시습의 사당 청절사(淸節祠)가 있었던 곳이라고 한다. 그 계곡이 무척 수려하다.
장암동 노강서원에서 보이는 도봉산박태보의 묘가 있는 장암동 박세당 고택 뒷산 / 박세당과 그 아들 태유, 태보의 묘가 있는 곳이나 들어가볼 수 없어 멀리서 찍었다.의정부시 장암동의 노강서원사당 양 옆으로 동재와 서재를 두었다.노강서원 바로 앞쪽으로 물소리 시원한 계류가 흐른다.계곡의 청풍정 터 / 박세당이 제자들에게 강학하던 곳이다.
의인(義人)이 그리운 시절이다. 악인들이 설쳐대며 곧 절대권력까지 거머쥐려는 절체절명의 위기 순간이지만, 그래서 이대로 나라가 끝장나는 것을 아닐까, 노심초사하는 즈음이지만, 그래도 이렇게 생각하는 많은 사람들이 있어 절망스럽지는 않다. 보편타당의 사고를 가진 자유 시민들이 견지해 온 민주주의가 존속하느냐, 얼치기 좌파가 불러들인 공산주의가 도래하느냐를 이번 대선이 결정짓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