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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박제가의 북학의와 그가 구상한 가난구제책
    잘 알려지지 않은 흥미로운 역사 이야기 2025. 9. 22. 20:36

     

    조선 후기 학자가 저술한 책 가운데 당대와 후대에 두루 영향을 끼친 책으로 박지원의 <열하일기(熱河日記)> 박제가의 <북학의(北學議)>를 들 수 있다. <열하일기>는 1780년(정조 5) 연암(燕岩) 박지원이 8촌형 박명원을 따라 청나라 건륭제의 칠순 잔치 축하사절로 중국에 갔을 때 이것저것 보고 들은 것을 기록한 기행문이며, <북학의>는 초정(楚亭) 박제가가 1778~1798년에 저술한 책으로 청나라의 실용학문을 적극 받아들여 배우자는 취지를 담았다. 

     

     

    <열하일기>에 실린 박지원의 여행코스
    <열하일기>

     

    박지원은 1780년 10월 27일, 약 5개월의 긴 여행을 마치고 돌아온 후 <열하일기>를 펴냈는데, 판본이 나오기도 전 필사본이 퍼질 정도로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오죽하면 임금인 정조도 그 책을 구해 읽었다. 워낙에 독서광인 정조였으니 그냥 지나 칠 리 만무했다. 그런데 정조가 보여준 반응은 전혀 뜻밖이었으니, 어느 날 아침 어전회의에서 다음과 같은 불호령을 내렸다. 

     
    "요즘 북학(北學)이다 뭐다 하더니 학문하는 분위기가 말이 아니다. 문풍(文風)이 이와 같이 된 것은 따져 보면 모두 박 아무개의 탓이다. <열하일기>를 내가 익히 읽었으니 속일 수 없을 것이다. 이 자는 교묘히 법망에서 빠져나간 거물이로다.(是漏網之大者)  <열하일기>가 세상에 유행하자 세인들이 이를 흉내 내 문체가 개판이 되었으나 당연히 결자해지하도록 해야 한다."
     
    박지원은 평소에도 자유로운 글쓰기를 강조해 왔던 바, "아프게 하지도 않고 가렵게 하지도 않고 구절마다 데면데면하고 우유부단하다면 그런 글을 어디에 쓰겠는가"(不痛不癢 句節汗漫 優游不斷 將焉用)라고 주장했다. 그러한즉 그의 문체가 성리학을 전달하던 기존의 고문(古文)에 비하면 개판으로 보일 수도 있었다. 그런데 주자 성리학에 쩌든 정조는 이에 그치지 않았으니, 저속한 문체로 일관돼 있는 (물론 정조의 시각으로) 패관잡기의 읽고 쓰기를 엄금했다. 이른바 '문체반정'(文體反政)이었다. 
     
    즈음하여 정조는 홍문관 수찬 윤광보가 아첨하여 "정학(正學)을 밝혀 사설(邪說)을 물리치시라" 상소하자 책고(서고)에 있는 서양서적들을 모두 끌어내 홍문관에 뜰 앞에서 태워버렸고, 더불어 "성리학을 제외한 모든 학문은 이단!"이라고 선언하였던 바, 앞서 1786년에 내린 성리학을 제외한 모든 외래 서적의 수입금지령이 더욱 강화되고 처벌 강도 또한 높아졌다. 당시 안의현감이던 박지원은 다행히도 <과농초서>라는 실용적 농서(農書)를 지어 올린 것이 임금의 마음에 들어 처벌을 면할 수 있었다. 

     

     

    홍문관 책고와 은행나무

     

    <북학의>도 비슷한 신세가 되었다. <북학의>는 초정 친필본, 삼한총서본 등 20여 종 이상의 사본이 전해지는데 그만큼 여러 사람이 보고 베낄 정도로 인기를 끌었다는 뜻이다. 박지원도 <북학의>에 홀딱 빠졌던 바, 자청해 서문을 써주면서 "나의 책(열하일기)에서 말하고자 했던 것과 조금도 어긋나는 것이 없어 마치 한 사람의 손에서 나온 듯하다"고 상찬하였다.

     

     

    <북학의 내편>


    정약용도 <북학의>를 읽고 감명을 받은 듯 보이니 자신의 저서 <경세유표(經世遺表)>에서 "그의 이용후생론(利用厚生論)은 보통 사람은 추측하지 못할 탁견"이라고 평가했고, 서유구 역시 박제가의 사상에 큰 영향을 받은 듯 자신의 저서 <임원경제지(林園經濟志)>에서 <북학의>의 내용을 빈번히 인용했다. <임원경제지>는 일반적으로 농서(農書)로 알려져 있으나 농업뿐만 아니라 당시 생활 전반에 영향을 끼치는 의학, 상업, 의식주, 예술과 인문사회지리학 등 다양한 분야를 포괄하는 백과사전으로 그의 필생의 대작이다.

     

     

    <임원경제지>

     

    박제가는 <북학의>에서 조선의 근본문제를 가난이라고 보았다. 그는 백성을 가난으로부터 구제하고 부유하게 하는 법, 나아가 국가를 부강하게 하는 방법으로 국제무역을 통한 산업증진 및 소비의 확대를 들었다. 그는 사치품을 배격하지 않고 오히려 생산과 소비를 장려해야 된다고 했으니, 이를 테면 고급비단을 사치품이라고 외면했기에 양잠술과 방직술이 쇠퇴해버렸다고 했다. 

     

    그는 이렇듯 국내 산업의 발전을 통한 국부의 축적을 주장했는데, 그 방법론으로 든 것이 상업의 장려와 외국 선진기술의 도입이었다. 박제가는 자신의 생각을 그저 책에만 담지 않고 백성들의 가난구제책과 부국강병책을 실천하고자 국왕 정조에게 자신의 생각을 직접 개진했다. 요즘말로 비정규직이던 규장각 검서관이라는 미관말직에 있을 때였다. 

     

     

    규장각 검서청과 금천 / 오른쪽이 홍문관이다.
    박제가가 근무했던 규장각 검서청
    규장각 검서관(檢書官)은 정조가 서얼들을 위해 새로 마련한 관직이었으나 정직(正職)이 아닌 잡직(雜職)으로서 문신을 뜻하는 동반이 아닌 서반 체아직으로 분류됐다. 체아직은 요즘 말로 비정규직이며 품계는 가장 낮은 9품으로서, 주로 문신들이 국왕에게 보고할 서류를 찾아주고 정리해주는 역할을 했다.

     

    그는 자신의 나이 37세 되던 1786년(정조 10) 상소를 올려 국가의 가난을 구제하기 위해서는 중국과 통상하고 부당한 신분제도를 타파함과 아울러 상공업을 장려해 부국을 이루자는 내용의 경세론을 피력했다. 이른바 '병오년 정월에 올린 소회'라는 그 상소문의 내용을 보면,

     

    ㅡ 중국의 선박 기술자를 고빙해 큰 배를 만들어 중국과 해로(海路)로 무역하고,

    ㅡ 중국에서 흔히 이용되는 수레와 같은 편리한 기구를 들여와 이용할 것이며,

    ㅡ 중국에서는 쉽게 구할 수 있는 천하의 서적도 들여와 두루 읽게 함으로써 습속에 얽매인 선비들의 편벽되고 고루한 소견을 스스로 타파시키고,

    ㅡ 유의유식하는 사족(양반)들을 장사하고 무역하는 일에 종사시키고, 서얼차별과 같은 부당한 신분제도를 타파하여 그들도 상업에 종사케 하고,

    ㅡ 우수한 인재들을 중국으로 유학 보내어 선진 기술 등을 배워오게 하고, 중국 흠천감(천문 과학기술원)에 근무하는 역서를 만드는 서양사람들을 초빙하여 관상감에 근무하게 하여 우리의 과학기술을 진작시키자. 

     

     

    남양주 실학박물관에 전시된 중국의 수레와 벽돌
    수레와 벽돌에 관한 안내문

     

    결과는 어찌되었을까? 정조는 이에 반대하는 신하들의 의견을 받들어 오히려 정반대의 정책을 취했던 바, 대사헌 김이소(金履素)을 말을 들어 서양인의 초빙은 고사하고 국경도시 의주에서의 검문검색을 강화해 연경으로부터 서적이 들어오는 것조차 차단했고, 더 나아가 대사간 심풍지(沈豊之)의 말을 들어 사신들이 연경에서 중국 선비들과 필담을 주고받는 일이나 귀국 후 서신왕래하는 일까지도 금지시켰다. 중국의 실용학문이 들어오는 경로를 원천적으로 차단시켜버린 것이었다.

     

    박제가는 어찌되었을까? 그는 여러 차례 유배를 갔고 마지막에는 조선의 최북단인 함경북도 종성으로 유배를 갔다. 그는 그곳에서 지역의 문물과 풍속 및 백성들의 고통을 다룬 연작시(連作詩) <수주객사(愁洲客詞)>를 지었는데, 아래의 시는 환곡(還穀)을 갚지 못해 어려운 처지가 된 백성들의 고통을 노래하고 있다. 그는 1804년 유배가 풀려 돌아왔으나 이듬해 죽었다. 그는 을지로 5가 청교동에 살며 종로 2가 원각사지 부근에 모여 살던 백탑파 실학자들과 교류했다 하는데, 지금은 양자 모두 흔적을 찾을 수 없다.  

     

    足凍姑撤尿(족동고철뇨) 

    언 발에 오줌 누어 무엇하랴?

    須臾必倍寒(수유필배한) 

    곧 반드시 곱배기로 추워질 것을.

    今䄵糴不了(금년적불료) 

    금년에 환곡을 갚지 못했으니

    明年知大難(명년지대난) 

    내년에 닥칠 더 큰 어려움을 알겠네. 

     

     

    <정유각집> / 박제가의 시문집으로, 중국에서 만난 청나라 문인 반정균과 주고받은 서신을 비롯하여 이조원, 진전 등의 서문이 있어 그의 국제적 명성을 짐작케 한다. 정유(貞蕤)는 세상풍진 속에서도 곧은 지조를 지킨다는 의미이다.
    청나라 화가인 나빙(羅聘)이 그린 박제가(朴齊家, 1750-1805)
    을지로 5가 청교동 부근
    부근의 옛길 표지 / '18세기부터 현재까지 보존된 원형 옛길'이라고 쓰여 있다.
    박지원, 이덕무, 유득공, 서상수 등 18세기 북학파 실학자 백탑파가 살았던 탑동의 개화기 모습

     

    작년 총선에서 이대생 미군 성상납 등의 발언으로 물의를 빚으며 양문석과 더불어 공천이 위태했던 인물이 있다. 하지만 그는 별탈 없이 공천을 받았고 지금은 수원의 국회의원이다. 그는 당시 이재명 당대표를 정조 임금에 비유하기도 했다. 당시는 얼토당토 않다 생각했는데, 지금 보니 비슷한 구석도 있는 듯하다. 주위 사람들의 쓸데없는 의견을 받아들여 노란봉투법 같은 갖은 기업규제 법안으로 나라 경제를 힘들게 하는 꼴이 말이다. 대한민국의 경제는 미국의 관세와 맞물리며 빠른 속도로 역주행 중이다.  

     

     

    양준혁(양문석+김준혁)으로 불리며 시끄러웠던 두 사람은 모두 공천을 받고 금배지도 달았다. 하지만 한 사람은 곧 배지가 날아가게 생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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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하스페르츠의 단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