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종의 비(妃)에 대한 명칭이 민비냐 명성황후냐에 대한 논란이 여전히 진행 중이다. 학교 다닐 때는 분명 민비라고 불렸는데 뮤지컬 '명성황후'가 공전의 성공을 거둔 후로는 민비라고 호칭을 하는 것이 어느덧 불경한 일이 되었다. 조선의 국모를 감히 그 따위로 부르다니, 하는 시선 같은 게 느껴짐이다. 하지만 명성황후의 호칭은 아무래도 어색하다. 고종의 비는 분명 민비로서 죽었으며(1895년 을미사변 때) 명성황후라는 호칭은 대한제국 시기에 등장했기 때문이다. 즉 명성황후는 1897년 11월 6일 고종황제의 시호 책봉으로부터 탄생한 것이다.
뮤지컬 '명성황후' 30주년 기념 포스터뮤지컬 '명성황후'는 이제는 대한민국의 대표 창작 뮤지컬로 자리잡았다./ 1995년 이문열 <여우 사냥>을 대본으로 초연될 때는 사실 그저 그랬는데 어느새 누적 관객 200만 명을 돌파하고 세계 무대로 진출하는 성공을 거두었다.
사실 대한민국 문교부에서는 1983년부터 교과서의 민비 호칭을 명성황후로 표기하도록 했고, 국검정 교과서를 필두로 현행 교과서에서는 전부 명성황후로 표기된다. 근거는 고종실록이나 순종실록, 승정원일기 등에서 민비라는 호칭이 사용되지 않았다는 점이다. (그렇다고 줄곧 명성황후의 호칭을 쓴 것도 아니다)
나는 처음부터 줄곧 민왕후라는 표기를 사용해왔다. 안중근 의사께서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한 이유에서 '민왕후를 시해한 죄'를 꼽은 까닭이다. (그것이 이토의 죄상 15개 가운데의 첫 번째이다) 고종실록에서도 호칭은 대부분 왕후나 중궁이다. 따라서 당시에는 그에 대한 일반적 호칭이 민왕후였음을 알 수 있는 것인데, 더불어 말하고 싶은 것은 민왕후의 이름이 민자영이라는 것도 팩트가 아니라는 점이다.
민자영은 사료에는 없는 이름으로 정비석 이 쓴 <소설 민비>에 처음 등장하며 이후 여러 작가들이 제 소설에 갖다 쓰며 마치 실명인 양 굳어졌다. 민왕후의 죽음을 주제로 한 영화 '불꽃처럼 나비처럼'에서도 민왕후의 이름이 민자영이다.
'불꽃처럼 나비처럼'의 포스터
오늘 다루려는 내용은 임오군란 때 도망간 민왕후에 대한 스토리다. 알다시피 임오군란은 1882년 임오년 6월에 발발한 구식 군대 군인들의 반란으로, 원인은 신식군대인 별기대(別技隊=별기군)에 밀린 훈련도감 등의 구식군대에 대한 장기간의 급료체불이었다. 이 변란으로 정권은 다시 흥선대원군에게 넘어가고 만왕후는 겨우 도망가 충주 민응식(閔應植)의 집 등에 숨어 있다 그해 8월 1일 환궁하게 된다. 문제가 된 별기대는 조선정부가 근대화의 일환으로 창설한 신식군대로서 일본인 교관을 고빙해 교관을 삼았다. 조선의 첫 근대 수교국인 일본은 처음에는 별 야욕을 드러내지 않았으니 오히려 선진국방을 표방한 조선 신식군대의 양성을 도왔다. 1881년 봄에 창설된 별기대는 일본군 소위 호리모토 레이조(堀本禮造)가 교관을 맡아 그간 일본이 습득한 프로이센 식 훈련을 시켰다. 별기대는 신식 군대답게 양반가 자제들이 주축을 이루었으며 영국제 리-엔필드 소총이 지급되었다.
별기대의 군인들 / 외양상으로는 후져 보이나 서유럽의 소총이 지급된 신식군대였다.서울 종로구 평창동 273 평창파출소 옆 별기군훈련소 터 표석 / 황현은 <매천야록>에서 '총을 메고 뛰느라 먼지가 날려 공중을 덮으니 장안 사람들이 처음 보는 일이라 놀라지 않는 이가 없었다'고 적었다.
별기대에 속한 별기군은 전원이 직업군인으로서 높은 급료와 양질의 비품을 보급을 받았고 처우 또한 좋았다. 반면 훈련도감으로 대표되는 구식군대에 대한 대우는 갈수록 형편 없어졌으니 우선은 녹봉미가 반으로 줄었다. 아울러 과거의 5군영(훈련도감·어영청·금위영·총융청·수어청)을 무위영과 장어영의 2영(營)으로 축소·통폐합시켰다. 할 일이 없으니 알아서 나가라는 소리였는데, 한꺼번에 팍 자르지 못한 것은 그래도 무기를 들고 있는 군인들인 바, 혹시라도 변란을 일으킬까 두려워한 때문이었다.
하지만 나가도 갈 곳이 마땅치 않았던 구식군인들은 그저 버티기로 일관했다. 그러자 녹봉이 아예 지급되지 않았고, 길게는 13개월이나 밀린 부대도 있었다.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던 군인들이 1882년 음력 6월 5일 숭례문 앞 선혜청과 선혜청 당상 민겸호의 집 앞에 모여 아우성을 쳤다. 그러자 그제서야 밀린 녹봉미 1개월 분이 지급되었다. 그런데 그마나 그 속에 겨와 모래가 반이었고, 물에 불려 무게와 양을 늘린 쌀이 지급된 곳도 있었다. 참다못한 군인들이 다시 돌아와 민겸호의 집 대문을 두드리며 고래고래 소리를 질러댔다.
남대문시장 입구 선혜청 터 표석
그러자 선혜청 당상 민겸호는 그 생계형 시위의 주모자들을 색출해 죽이려 들었다. 하급군인 주제에 싸가지 없이 상관인 자신에게 항의하고 소리를 질렀다는 것이 죄였다. 때마침 한강 경창(京倉, 마포 광흥창)에 도착했던 호남 세곡선(세금으로 받은 양곡을 실어 나르는 배) 수 척이 도착했는데, 그것을 탈취하려 했다는 있지도 않은 죄까지 추가되었다. 이에 여러 군인들이 원통함과 분함을 참지 못해 발을 굴렀고, 그러는 동안 훈련도감의 김춘영, 유복만, 정의길, 강명준 등이 붙잡혀가 뭇매질을 당하고 옥에 갇혔다.
발만 구르던 군인들이 봉기를 하게 된 결정적인 이유는 투옥된 군인들이 모두 사형에 처해질 것이라는 소문 때문이었다. 결국 그들은 임오년 6월 10일의금부로 몰려가 투옥된 군인들을 구해냈고, 김장손과 유춘만(유복만의 동생) 등은 그 길로 흥선대원군에게 달려가 도움을 요청했다. 고종과 민왕후에게 밀려 운현궁에 찌그러져 있던 흥선대원군은 '이게 웬 떡이냐, 살다보니 이런 날도 오는구나' 하며 마치 준비하고 있던 사람처럼 처지할 놈들을 지목하며 신속하게 반란을 지휘했다.
의금부가 있던 종각 SC제일은행운현궁 노안당운현궁 이노당 / 의금부와 흥선대원군의 집 운현궁은 멀지 않다.
이후 장안은 난리통이 되었고 흥선대원군이 지목한 영돈녕부사 이최응은 이웃집 담을 넘어 도망가려다 떨어져 불알이 터져 죽었다. 민왕후의 척족으로 최고 부정축재자였던 민겸호는 민왕후의 치마 속에 숨으려 창덕궁으로 도망쳤으나 얼굴을 알아본 군인들에게 붙잡혀 창덕궁 중희당 계단 위에 좌정한 흥선대원군 앞에 무릎이 꿇리었다. 흥선대원군이 지목한 전 선혜청 당상 김보현 역시 붙잡혀 와 중희당 계단 아래 무릎이 꿇리었고, 곧 민겸호와 함께 처참한 시신이 되었다.
별기군과 민겸호로 추정되는 인물
부정의 수괴로 지목된 민왕후는 재빨리 궁녀 옷으로 변복을 하고 궁으로도 몰려온 폭도들을 피해 도주했으나 사인교를 타고 창덕궁 단봉문을 빠져나오려 순간 수상히 여긴 훈련도감 군인들에 의해 가마에서 끌어내려져 내동댕이쳐졌다. 바로 그때, 마침 그 장면을 목격한 무예별감 홍계훈이 달려와 외쳤다.
"이 여인은 상궁인 내 누이이니 오인하지 마시오." 하고는 "아이고, 누님. 이게 무슨 봉변이오. 어서 업히시오." 말하며 민왕후를 업고 냅다 뛰었다.
민왕후는 일단 북촌 윤태준의 집(現 정독도서관 부근)에 숨었다가 경기도 광주 적취리에 살고 있는 친척 민응식의 집으로 갔고, 다시 충청도 충주 민응식의 시골집으로 가 은거했는데, 이때 민왕후를 피신시킨 홍계훈은 8월 1일 민왕후 환궁 후 출세 가도를 달리다 을미사변 때 일본군에 의해 죽임을 당했다. 5년 후인 1900년(광무 4) 9월 고종은 일본군과 맞서 싸우다 순국한 홍계훈과 장병들을 기리기 위해 남소영 자리(現 신라호텔)에 장충단(奬忠壇)을 세웠다.
민왕후가 빠져나온 창덕궁 단봉문도피 중인 민왕후 / '불꽃처럼 나비처럼'에서홍계훈 최후의 분전 / '불꽃처럼 나비처럼'에서서울 장충단공원의 장충단비 / '장충단' 글씨는 순종이 황태자일 때 썼다. 장충(奬忠)은 충의를 장려한다는 뜻이다.
이후 민왕후는 줄곧 충주에 숨었다가 청군(淸軍)에 의해 임오군란이 진압된 다음 궁으로 돌아오게 된다는 것이 우리가 알고 있는 일반적인 스토리이나 사실은 많이 다르다. 이는 2006년 대전광역시 향토사료관에 기탁된 유물 가운데의 하나인 <임오유월일기(壬午六月日記)>가 번역되며 밝혀졌다.
<임오유월일기>는 숙종 때 동지중추부사를 지낸 제월당 송규렴(宋奎濂)의 7대손 송헌경의 부인인 여흥민씨가 친정에서 가지고 왔다고 전하는 작자 미상의 붓글씨 일기로서, 1882년 6월 13일부터 8월 1일 환궁하기까지의 민왕후의 행적이 기록되어 있다. 이 일기에 따르면 6월10일 창덕궁을 빠져나온 민왕후의 도피경로는 아래와 같이 복잡하다.
6월 10일: 창덕궁→ 10~11일: 서울 종로구 관훈동 윤태준의 집 12일: 두뭇개 나루(현 옥수동)에서 한강을 건넜을 것으로 추정 13일: 성남시 수정구 상적동(적취리) 민응식의 집 (민응식은 <임오유월일기>를 가져온 여흥민씨의 부친이다) 14일: 광주시 목현동 새오개 주막 15일: 여주군 단현리 남한강 옆 권삼대의 집 16~17일: 같은 동네 한점대의 집 19~20일: 충북 충주시 노은면 가신3리 민응식의 시골집 21~27일: 같은 동네 이시형의 집 28일 7월 1일: 다시 민응식의 시골집 2~11일: 경기도 양평군 양동면 섬실 양평현감 안정옥의 집 12일: 다시 충주로 와 매산리 오봉학의 집 13~27일: 충주 여흥민씨 민영위의 집 28일: 서울로 출발 8월 1일: 창덕궁 도착
<임오유월일기> 양평 관련 부분/ 기록자는 한약에 정통한 듯 여러 병환에 시달리는 민황후에게 그때 그때 약을 조제해 주었다. (양평시민의 소리 DB)양평군 양동면의 '현감 안정옥 가옥' / 작은 사진처럼 내부구조는 옛모습 그대로에 가깝다. 밑의 사진은 마당에 놓인 용도 모를 큰 돌들이다. 큰집을 짓기 위한 석재인 듯하다. (오마이뉴스 DB)
이 같은 이동 경로는 어떠한 목적을 가지고 움직인 것이 아니라 좌불안석에 이리저리 옮겨다니는 불안한 심경을 보여주는데, 개인적 생각으로는 차라리 이때 죽었으면 나라가 좀 편안해지지 않았을까 여겨진다. 뮤지컬 '명성황후'에서는 어떻게 미화되었는지 모르겠으나 그가 조선이라는 나라에 끼친 해악이 너무도 지대한 까닭이다. 무엇보다 나랏돈을 너무 방만하게 써 국가재정을 파탄낸 것이 죄악의 으뜸이라 여겨진다.
하지만 대통령 특활비를 증액하고 약속과 달리 북한 김정은과의 만남 운운하며 사용내역도 공개 안하는 얼치기 좌파 이재명을 떠받들듯, 당시에도 민왕후를 떠받드는 벼슬아치들도 적지 않았던 듯하니 위에서 말한 현감 안정옥이 대표적이다. 겸사겸사 경기도 양평군 양동면 설매실에 있는 안정옥의 묘와 민왕후가 피신했을 집을 찾아나섰으나 결국 찾지 못했고 돌아왔다. 날이 궂어 일찍 어두워진 탓도 있는바, 차후 다시 방문하려 한다 .
순흥안씨 좌윤공(左尹公) 정옥의 묘 (양평시민의 소리 DB)
직접 확인은 못했으나 여러 경로로 얻은 설매실 안정옥 묘표에 쓰여 있는 내용은 아래와 같은바, <임오유월일기>의 내용과 거의 동일함을 알 수 있다.
임오년 여름에 난리가 대궐에 범하니 명성황후께서 몰래 겨우 빠져나갔으나 궁에서는 간 곳을 몰랐다.... 이때 내가 목숨을 걸고 신하의 본분을 다하였으니 작은 가마를 보내 집에 모셨다. 이후 방구석을 깨끗하게 하고 방비를 엄격히 한 후 조석으로 손수 반찬을 장만하여 맛을 본 뒤에 아내로 하여금 시중들게 하였으나 왕후인줄은 알지 못하게 하였다. 13일 후 (왕후께서는) 다시 장호원으로 힘들게 다시 옮기셨다.... (壬午夏亂兵犯 闕明成皇后潛幸 于外宮中不知處.... 吾可以盡臣分死非恤也 舁小轎奉至家 淨房奧嚴防護 朝夕躬調膳嘗而後御家人幷 不知爲后也 歷十三日復幸長湖....)