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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태종의 처가와 이재명의 변호사들
    잘 알려지지 않은 흥미로운 역사 이야기 2025. 9. 15. 23:04

     

    원경왕후 민씨(元敬王后 閔氏, 1365~1420)는 조선 2대 왕 태종의 왕비이며, 세종의 어머니다. 본관은 여흥(驪興)이고 아버지는 민제(閔霽)인데, 고려시대 태어난 까닭인지(1365년/공민왕 14) 민다경이라는 예쁜 이름을 가지고 있다. 1382년(우왕 8) 무신 이성계의 다섯째 아들인 이방원과 혼인하였다. 당시 이방원은 16세였고 민씨는 18세였다. 이듬해 이방원은 과거에 합격하였다. (역대 최연소 합격자라는 말도 있다)

     

    이에 이방원은 조선시대 임금 가운데 유일한 과거 합격자라는 기록을 남기게 되는데, 아내 민씨의 적잖은 조력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지금은 표석 외에 아무런 흔적이 없지만 강원도 횡성군 강림면에 이방원이 처박혀 과거 시험공부를 했다는 각림사의 터가 있다. 그가 산에서 시험 공부하는 동안 가정은 민씨가 책임졌다는 얘기다. 이방원의 과거 합격은 그저 기록으로서의 의미를 너머 실직(實職)을 지닌 관료로써 이성계의 창업을 돕는 지대한 역할을 했다는 데 의미가 깊다. 

     

     

    태종과 원경왕후의 묘인 내곡동 헌릉
    원경왕후의 묘 (오른쪽)

     

    두 사람의 결혼생활이 헌릉 태종의 신도비문에 간략하게 설명되어 있다. 젊은 시절 이방원은 '세상을 구제하려는 뜻이 있어서' 집안일을 돌보지 않았던 반면, 민씨는 '집안의 경제생활과 육아'를 책임졌다고 한다. 이는 내외관념에 충실한 전형적인 부부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데, 민씨는 이와 같은 현모양처의 역할에만 머물지 않고 왕자의 난이 일어났을 때에 자신이 감춰 놓았던 무기와 갑옷을 내어서 태종을 돕는 여걸의 모습을 보였다.  

     

    이방원 부부가 살았고 세종대왕이 태어난 준수방이 어디인지는 확실치 않다. 현재 종로구 통인동 우리은행 효자동 건물 부근에 '세종대왕이 태어나신 곳'이라는 표지석이 있지만, 예전에는 이 앞으로 백석동천이 흐르고 바로 뒤로는 옥류동천이 흐르던 곳이라 재저택이 들어서기에 적당치 않다. 옛 기록 대로  타구(폴로) 경기도 하고 사병(私兵)도 키울 정도면 그 위쪽, 지금의 '통인시장'이 있는 통의동 평지 쪽이 더 어울려 보인다.   

     

     

    헌인릉 태종 이방원의 신도비
    위 신도비의 마모로 숙종 때 새로 세운 신도비다.
    이방원 부부가 살던 곳? / 세종대왕이 태어나신 곳이라 '한글로'로 불리지만, 왼쪽 골목길이 옥류동천이 흐르던 곳이고, 우측 찻길이 백운동천이 흐르던 곳이다. 대저택의 입지로는 적당치 않아 보인다.
    '세종대왕 나신 곳' 표석
    표석 부근
    통인시장 입구

     

    이후로도 민씨는 이방원을 도와 마침내 왕위에 등극하게 만들었는데, 민씨뿐 아니라 민씨의 네 남동생인 민무구, 민무질, 민무휼, 민무회도 견마지로로 매형을 도왔던 바, 태종 등극 후 막강한 왕실의 외척 가문이 되었다. 그러나 이방원은 왕위에 오르자 화장실 갈 때 올 때의 마음이 작용되었는지, 막강 외척 권력을 쓸어내기 위한 두 차례의 옥사를 일으켰다. 먼저 타깃이 된 자는 민무구, 민무질 형제였다.

     

    1407년(태종 7)에 일어난 민무구, 민무질 옥사는 그들 형제가 세자인 조카 양녕대군을 허수아비 왕으로 세우고 국권을 장악하려 든다는 태종의 의심에서 비롯됐다. 태종은 1406년 왕위를 세자 양녕대군에게 넘기겠다는 거짓 양위를 선언했는데, 이때 민무구, 민무질 형제는 표정 관리에 실패하여, 처음에는 기뻐하다가 태종이 주변의 만류로 양위 선언을 철회하자 실망한 얼굴로 바뀌었다.

     

    주위로부터 이 말을 들은 태종은 '너 잘 걸렸다'는 식으로서 권력 남용과 불충의 죄를 씌워 그들 형제를 제주도로 유배 보내고 3년 후인 1410년 자결을 명했다. 그런데 그것이 좀 지나쳤다 여겼을까, 아니면 원경왕후의 원망 때문이었을까. 태종은 남은 두 형제에게는 벼슬을 내리니 민무회는 한성판윤(서울시장)에, 민무휼은 장관급인 지돈령부사(왕실 친척 관리부서의 장)에 임명했다.

     

     

    드라마 속 귀양 가는 민무구, 민무질  형제

     

    그러나 이것도 사실은 남은 두 형제마저 죽이기 위한 복안이었던 듯, 권력이 생긴 그들은 본의든 아니든 이권에 개입하게 되었고 태종은 이를 빌미로 1415년(태종 15) 민무휼, 민무회에게도 자결을 명하였다. 이렇듯 외척 세력을 비정상적인 방법으로 척결한 탓에 태종은 비정한 국왕의 이미지를 벗어날 수 없게 되었지만, 다음 왕인 세종에게는 외척의 세력에 휘둘리지 않는 탄탄한 입지를 마련해 주어 운신의 폭을 광장(廣張)시켰다는 긍정적인 평가도 받는다.    

     

     

    학문에 너무 열중해 비만이 되신 세종대왕
    낮은 헌릉 정자각 계단 / 비만한 세종의 참배를 쉽게 하기 위해 낮게 만들었다.

     

    아래는 경기도 양주시 은현면 요암리 산 52-1에 있는 민무질 묘로, 태종의 처남 4형제 중 유일하게 묘가 전한다. 민무구·민무휼·민무회의 묘는 실전(失傳)되었다. 민무질은 자진한 후 제주도에 묻혔다가 문종 때 이곳으로 이장하였다. 민씨 4형제는 태종을 왕위에 올리게 위해 열심히 싸웠고, 그중 무질이 가장 공이 컸던 바, 1398년(태조 7) 제1차 왕자의 난을 처음 기획한 사람도 바로 무질이며 싸움에서도 앞장서서 칼을 휘둘렀다.

     

    그리하여 제1차 왕자의 난 때 공을 세워 정사공신 2등으로 책록되었고, 1400년(정종 2) 제2차 왕자의 난 때는 좌명공신 1등으로 여성군에 봉해졌으며, 좌군총제·우군도총제 등을 역임하였다. 하지만 결국은 토사구팽 당했던 바, 처음에는 경기도 장단에 송치하였다가 대구로 유배되었으며, 다시 삼척진으로 이배됐다. 이후 다시 죄가 덧씌워져 제주도로 옮겨지고, 결국은 죽임을 당했다.

     

     

    목은저수지외 민무질 묘역
    민무질 묘역 여흥민씨 묘표 / 합장묘를 마련한 뒤 한곳에 모았다.
    주인 없는 묘표와 민무질 무역
    여흥민씨 합장묘
    힙장묘 부근의 문석인 / 위 묘표 중에 주인이 있을 듯싶다.
    민무질 신도비
    여성군 민무질 신도비 / 뒤로 구 신도비가 보인다.
    민무질의 묘
    민무질 묘 문석인
    민무질의 부인 청주한씨 묘
    청주한씨 묘의 마모된 문석인
    민무질과 청주한씨 묘
    산신석
    배위에서 바라본 풍경 / 전면 왼쪽 흰 건물은 국군 양주병원이고 오른쪽에 목은저수지가 보인다.

     

    이재명은 반대의 인사를 했다. 흔히 보은(報恩) 인사라고 불려지는 내용의 면면을 보면, 지난 총선에 즈음해서는 이재명과 김혜경의 법률 대응을 도운 변호사들이 대거 공천을 받아 주목을 받았다. 그중 가장 눈길을 끈 사람은 서울 서대문갑에 출마해 당선된 김동아 변호사였다.

     

    그는 고등학교 시절의 학폭으로 문제가 된 인물로서 "앞이 안 보일 정도로 맞았다"는 1차 폭로에 이어 여러 가지 가해 내용의 2차 폭로가 언론보도된 뒤에도 "MBN 보도에 무거운 책임을 묻겠다"며 오리발을 내밀었던 비양심의 소유자이다. 그는 이재명 대표의 최측근인 정진상 전 당대표 정무조정실장의 변호를 맡아 '대장동 변호사'로 일컬어진다. (상세한 내용과 그밖의 인물에 대해서는 생략하겠다)

     

     

    이 사람들에 대해서는 앞으로도 계속 주목할 필요가 있다. 과연 국가가 필요로 하는 재목인가를.

     

    더 들여다 봐야 될 대상은 이재명이 대통령이 된 후 직을 맡은 연수원 18기 동기 변호사들로, 지금까지 최소 8명이 청문회조차 거치지 않는 정부·대통령실 요직에 줄줄이 진출했다. 취임 전 '측근 인사 없다'던 약속과 달리 불과 100일 만에 연수원 동기만 7명을 고위직에 앉힌 것이다.

     

    면면을 보자면 정성호 법무장관, 조원철 법제처장,(대장동 사건과 위증교사 사건을 변호), 오광수 전 민정수석,(도덕성 논란으로 낙마) 이찬진 금감원장,(대북송금 사건 변호), 차정인 국가교육위원장, 위철환 중앙선관위원 후보자 등인데, 이어 외교경험이 전무한 민변 출신의 차지훈 변호사(공직선거법 위반사건 변호)가 주(駐)유엔대사로 내정됐다.

     

    이처럼 이재명 대통령의 송사를 도운 인물들이 전문성 검증 없는 '청문회 패싱 요직'을 차지하는 모습은 이해충돌 논란은 물론 보은 인사라는 비판을 피하기 힘들다. 물론 대통령실은 아랑곳하지 않고 언론도 적극적으로 따지지 않는다. 하지만 국민 세금으로 운영되는 공직이 대통령 개인 변호사비 대신 지급되는 '대납 보상'으로 전락했다는 국민적 의구심은 날로 커지고 있다. 그래서 국민은 묻는다. "이게 변호사비 대납 아닙니까?'"라고.

     

    이중 가장 주목을 받고 있는 자가 이찬진 신임 금융감독원장이다. 그는 과거 변호사 시절 구로농지 강탈 사건을 맡아 승소하면서 상당한 보수를 올린 것으로 전해진다. 해당 사건은 1960년대 구로공단 조성 과정에서 국가가 강제 확보한 토지를 주인들에게 되돌려준 대형 소송으로, 그는 여기서 승소하며 392억원의 수익을 올렸는데, 이중 상당액을 민변에 쾌척하고 5억원을 2019년 이재명 경기도 지사에게 빌려주었다.

     

    당시이재명은 28억원의 재산을 신고했다. 돈이 없어 빌린 것도 아니다. 그래서 국민은 묻는다. "이게 매관매직 아닙니까?'"라고. 이듬해 이찬진은 꿔준 돈의 전부를 이자 붙여 돌려받았다고 말하나 거액의 돈거래가 있던 자를 금융감독원장에 앉힌 자체가 공명정대하지 못한 일이라는 소리를 듣고 있다. 기타 조직개편 등 여러 가지 이유로 금융감독원 직원의 반발이 만만치 않은데, 거기에 충정로 대통령 김어준이  "불만 있으면 퇴사해!"라며 불 난 금감원에 기름을 끼얹었다. 귀추가 주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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