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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조선 망국의 역사가 응축된 돈암동 흥천사
    토박이가 부르는 서울야곡 2025. 12. 30. 23:51

     
    서울 돈암동 흥천사는 정조 18년(1794년) 신흥사라는 이름으로 건립됐다. 이후 철종 때 법당을 중수하고 명부전을 지으며 불도량의 면모를 갖추었으며 고종 초의 중창불사로 가람이 일신했다. 흥선군 이하응이 아들 명복을 왕으로 만들어준 조대비(신정왕후 조씨)에 대한 보답으로써 불자(佛者) 조대비가 왕림하던 신흥사를 대가람으로 만들어 준 듯하다. 흥선대원군은 이때 절 이름도 흥천사로 고쳐 내려줬고, 대방 당우에 자신의 명필 글씨를 내걸었다.

     

     

    1930년경의 흥천사
    1960년대 말의 흥천사
    흥천사 대방 / 대방은 염불·수행공간과 누각, 승방, 주방 등의 부속공간을 한 자리에 구성한 H자형의 조선말 건축양식이다.
    흥천사 대방 계단
    대방에 입구에 걸린 흥선대원군 글씨 현판
    대방
    대방 전면에 걸린 현판은 모두 흥선대원군의 글씨다.
    대방 왼쪽 누각에 걸린 흥선대원군의 서선실 현판
    대방 오른쪽 누각에 걸린 흥선대원군의 옥정루 현판

     
    기까지가 이하응의 대원군(임금의 아버지)으로서의 화려했던 나날인 1863년 12월부터 1873년 11월까지의 족적이다. 그는 이 기간 동안 절대권력을 휘두르며 장동김 씨(장동에 사는 안동김씨)의 60년 세도를 거꾸러뜨렸다. 이후 대원군은 왕권을 강화하고 인재를 고루 등용해 쇠락해 가던 국가의 기반을 다졌으며, 그 일환으로 임진왜란 때 불탄 경복궁을 다시 지었다. 더불어 그간 세도 정치의 중심 기구였던 비변사를 폐지하고, 국초(國初)의 의정부와 삼군부를 부활시켰다. 


     

    흥선대원군이 재건한 경복궁과 의정부 / 오른쪽 빈 터가 의정부 자리다.

     
    그러나 흥선대원군의 화려한 나날은 1868년(고종 5년) 10월 10일 면암(勉菴) 최익현이 상소를 올리며 끝을 맺는다. 사헌부 장령을 지낸 꼬장꼬장한 관리 최익현은 대원군이 경복궁 중건을 위해 발행한 당백전(當百錢)으로 인한 인플레이션의 폐해 등을 지적하며 흥선대원군을 공박하였던 바, 결국 10년 권좌에서 물러나 운현궁에 칩거하게 된다. 30년 후 흥선대원군은 그곳 운현궁에서 쓸쓸히 생을 마감한다.
     
     

    흥선대원군이 살던 운현궁
    밖에서 문을 잠그게끔 되어 있는 운현궁 사랑채 솟을대문 / 사실상 유폐시킨 것이다.
    운현궁 노안당 / 흥선대원군은 사랑채인 이곳 노안당에서 숨을 거뒀다.

     
    아버지 흥선군의 서슬에 차마 말을 하지 못했을 뿐 친정(親政)을 오매불망하던 고종은 좋아 입이 찢어졌다. 하지만 뭔가 슬픈 시늉은 해야 했을 터, 최익현에 대해 부자간에 갈등을 조장했다는 죄를 물어 제주도에 유배시켰다. 최익현은 위리안치의 형을 받고 1873년부터 1875년까지 1년 4개월 동안 제주에 유배되었다. 물론 형식적인 것이었으니 위리안치를 벗어나 제멋대로 돌아다녔고, 유배가 풀린 1875년 3월에는 한라산에 올라 백록담에서 목욕까지 했다.  
     
     

    이 옷가게는 어디일까? / 최익현이 유배 생활을 한 제주시 중앙로의 적거지(謫居址)라는데, 지금은 흔적도 없다.
    백록담 북쪽 바위의 최익현 각자 / 옆의 이름 이기온은 면암이 유배 때 교류한 제주 유생으로 한라산 유람의 가이드를 맡았다.

     
    고종은 1863년부터 1907년까지 무려 44년간을 왕위에 있었다. 52년을 집권한 영조, 46년을 집권한 숙종에 이어 길게 군림했던 자이다. 흥선대원군의 섭정기간 10년을 제외해도 34년간을 집권한 임금인데, 기간에 비해 한 것이 너무 없다. 아니 오히려 뺄셈 정치를 했으니 아버지 흥선대원군이 10년간 다져놓은 국가의 기반을 무너뜨렸다.

     

    이를 테면 흥선대원군이 키워놓은 인재들을 몰아내고 민씨 척족들을 데려다 앉혔으며, 애써 채워놓은 곳간의 재화를 3년 만에 탕진했다. 하지만 이후로도 걱정 없이 살았으니 고종은 제 마누라 민왕후와 더불어 탐관오리들이 바치는 뇌물과 매관매직으로 배불리 지냈다. 고종은 가끔 흥천사에도 왕림한 듯, 그가 쓴 현판 글씨가 명부전에 걸려 있다.  

     

     

    고종의 현판 글씨가 걸린 흥천사 명부전
    명부전 현판


    왕이 이렇게 썩었는데 나라가 기울지 않을 리 없었다. 이에 결국은 나라가 망했고 친일파 매국노의 세상이 됐다. 그리고 그들 매국노의 위세가 흥천사에도 미쳤는지 대방 왼쪽 누각 전면에 송종헌(1876~1949)의 현판이 걸려 있다. 송종헌은 조선제일의 매국노로서 이완용과 1, 2위를 다퉜던 송병준의 아들로 1925년에 송병준이 사망하자 백작 작위를 승계했다. 아비의 명성에 밀려 현대인들에게는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그는 일일이 열거하기 힘들 정도로 많은  일제강점기 직함을 갖고 있으며, 그가 저지른 악행 또한 일일이 열거하기 힘들다. 일본 이름은 노다 쇼겐(野田鍾憲)이다.

     

    전해지는 얘기로는 자신이 행차할 때 빨래하던 아낙이 무시했다 하여 (아마도 일어나 허리를 굽히지 않은 모양이다) 총으로 쏘아 죽였다 하는데, 그래도 아무런 처벌을 받지 않았다. 당시 그는 자작으로서, 귀족의 작위를 받은 자는 천황의 일가로 간주해 천황의 명령 없이는 어떠한 처벌도 받지 않기 때문이었다고 한다. 흥천사 대방에 걸린 그의 글씨는 분명 졸필임에도 자신을 명필로 착각하며 살았던 듯 생전 꽤 많은 글씨를 남겼다. 가치가 없는 까닭에 대부분 사라졌지만, 지난 2008년 용인시 처인구 양지면 양지초등학교 운동장에서 그가 쓴 팔굉일우(八紘一宇)비가 발견됐다.

     

     

    흥천사 대방 왼쪽 누각에 걸린 송종헌의 만세루 현판

     

    '팔굉일우'는 일본천황가의 시조로 받드는 진무(神武)천황의 즉위조서에 나오는 용어로 "온 세상이 하나의 집을 이뤄 천황의 치세에 든다"는 의미이다. 당시 일본이 외치던 내선일체, 나아가 '아시아는 하나'라는 의미의 대동아공영권과 궤를 같이 한다. 송종헌은 자신이 이사장으로 있던 용인 양지초등학교의 1941년 개교 30주년을 기념해 글을 쓴 팔굉일우비석을 학교 운동장에 세웠던 것으로 추정한다. 그의 위세는 1945년 해방 때까지 지속됐다.

     

     

    송병준이 양지현감 시절을 추억하며 1920년대 용인 내사면 추계리에 조성한 별서 앞 영화지(映華池) 모습
    송종헌이 태어난 용인 내사면 집 / 지금은 남양주 궁집 내로 옮겨졌다.
    팔굉일우비 / 왼쪽으로 '삼위 백작 노다쇼겐 근서'(三位 伯爵 野田鍾憲 謹書)라는 글자가 보인다. 뒤에 보이는 비석은 양지현감을 지낸 송병준의 선정비와 그의 아들 송종헌의 영세기념비다. 팔굉일우비와 함께 발견됐다.
    송종헌
    일본 미야자키현 평화의 탑 공원의 팔굉일우탑
    쇼와 19년 발행된 화폐의 도안이 되기도 했다. / 중국은 이를 비판했지만 작금의 '중국몽'과 다름 없는 것이다.

     

    흥천사 종루에는 위창(葦滄) 오세창(1864~1953)의 글씨 현판이 걸려 있다. 오세창은 근대 한국의 대표적인 서예가, 서화사 연구자이자 독립운동가로서 3.1 운동 민족대표 33인 중 한 명으로 추앙받고 있지만, 송종헌의 글씨와 이웃하고 있기 때문인지, 아니면 작년 간송박물관에서 본 '축수서화12폭병풍' 때문인지 긍정적으로 보이지 않는다.

     

    '축수서화12폭병풍'은 아마도 3대 친일파쯤에 끼일 법한 민영휘의 71세 망팔(望八,팔순을 바라봄) 생일잔치 때 당대의 딸랑이 명사들이 앞다퉈 축하의 글과 그림을 보내자 그의 아들 민형식이 자신을 포함한 유명인 12인을 선정해 12폭병풍으로 꾸민 것이다. 그 12인인 김용진, 윤용구, 지운영 등 친일파 일색의 작품에 오세창도 끼어 있는 것인데, 이를 단순한 흑역사로 볼 것인지, 아니면 숨어 있던 위선의 노출로 볼 것인지 쉽게 판단이 서지는 않지만..... 

     

     

    위세창이 쓴 흥천사 종각 현판
    간송미술관 재개관 때 전시된 축수서화12폭병풍

     

    또 흥천사 극락보전 내에는 영친왕 이은(李垠, 1897~1970)이 4살 때인 1901년, 흥천사를 방문해 남겼다는 글씨 편액이 걸려 있다. 내용은 별 것은 없고 당시 자신이 익히던 천자문의 서두를 쓴 '王孝 天地玄黃 ...' 정도지만, 영친왕의 어릴 적 글씨라는 데 의미를 두고 편액을 만들어 건 듯하다. 앞서도 말했지만 2005년 영친왕의 아들 이구(李玖, 1931~2005)의 사망과 함께 영친왕의 후손은 완전히 멸절되었다.

     

     

    영친왕의 무덤인 남양주 영원(英園) 정자각
    영친왕 아들 이구의 묘
    마지막 황세손 이구와 그의 아내 줄리아 리

     

    조선의 마지막 임금 순종은 후사가 없었던 관계로 고종의 후처 격인 엄귀비에게서 난 영친왕이 황태자로서 대를 이었다. 그런데 그다음 대(代)인 이구는 후사를 보지 못하고 죽었으므로 영친왕계는 단절되고 적자(嫡子) 황통(皇統)은 끝난 셈이니, 사도세자의 아들 은신군과 그의 아들 남연군, 그리고 흥선대원군 ㅡ 고종 ㅡ 순종 ㅡ 영친왕으로 이어지는 망국의 역사가 이곳 흥천사에 오롯이 배어 있다 하겠다.   

     

     

    흥천사 극락보전

    극락보전 내 영친왕 글씨 편액
    불단 오른쪽에 있던 금동천수관음보살좌상이 없어졌다. / 보물(제1891호)이라 따로 보관한 듯하다.
    극락보전 내 신중도 / 1885년 상궁김씨와 홍씨가 돈을 내 제작했다는 화기(畵記)가 있어 흥천사가 왕실의 비호를 받았음을 알 수 있다.
    흥천사 극락보전 안내문

     

    마지막으로 덧붙이고 싶은 말은 송종헌의 후손들이 벌인 친일파 재산 반환 소송이다. 앞서도 언급했지만 송병준은 한일합병 후 일제로부터 자작(子爵)의 작위와 은사금을 받았고, 1920년 백작이 됐다. 그의 아들 송종헌도 자작의 작위를 받았고 1925년에 아버지 백작의 작위를 상속했다. 아울러 송병준이 받았던 은사금과 그로부터 창출된 부를 상속받았으며 밝은 이재로써 재산을 더욱 불렸다. 친일파와 그 아들들이 대부분 방탕한 생활로서 재산을 탕진한 것과 비견된다. 

     

    그 재산은 당연히 종헌의 후손에게 상속됐다. 하지만 그 많은 재산은 노무현 정부 때 제정된 친일반민족행위자 재산의 국가귀속에 관한 특별법인 '친일재산환수법'이 시행되며 2007년 대부분 국가로 귀속됐다. 후손은 이에 불복해 서울의 북아현동 땅을 비롯한 경기도의 1천억원대 땅에 대한 환수소송에 나섰고 마침내 승소했다. 그뿐 아니라 민영휘, 이완용의 후손들도 모두 승소했는데, 막대한 자금력을 바탕으로 고용한 변호사들의 힘이었을 게다. 당시 신문에 난 판결문의 요지는,  

     

    "친일 반민족행위를 한 사람들을 역사적으로 단죄해야 할지 모르나, 국가가 법적인 장치도 없이 막연하게 국민감정을 내세우는 것은 법치주의를 저버리는 일"이라는 것이었는데, 며칠 전 '서해 공무원 피격 사건 은폐 의혹'으로 재판에 넘겨진 문재인 정부 당시 안보라인 인사들에 대해 전원 무죄 판결을 내리며 뱉은, "피고인들을 형사처벌 할 수 있을 정도로까지 합리적 의심 없이 증명됐다고 보기 어렵다"는 판결에 못지 않은 괴변이다.  

     

     

    명줄이 긴 자들
    이건 또 뭐여?!
    "서해 공무원 피격 사건, 사실상의 조작기소.... 항소포기해야" / 이건 또 무슨 개소리여? 대한민국도 점점 망국으로 가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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