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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조가 올랐던 세심대를 찾아서토박이가 부르는 서울야곡 2026. 3. 26. 22:59
용인 경기도박물관에 가면 정조 임금이 1795년 숙빈최씨, 창빈이씨, 영빈이씨의 사당을 참배한 후 사도세자의 사당 옛터 근처에 있던 세심대(洗心臺)에 올라 감회를 읊은 친필 서첩을 볼 수 있다. 사도세자의 사당인 사도묘(思悼廟)는 처음에는 서울 종로구 신교동 지금의 서울농학교 자리에 건립되었다가 창경궁 옆 함춘원(종로구 연건동 서울대병원 내)으로 이전하였지만, 그럼에도 정조는 즉위 후 1791년 봄부터 1795년 봄까지 지속적으로 세심대를 찾았다. 아마도 어릴 시절을 추억함인 듯하다.


세심대에서 쓴 정조 어필
<정조실록>에는 정조가 아버지를 여읜 애통한 마음을 달래기 위해 세심대에 올랐다고 쓰여 있지만, 한편으로는 사도세자의 명예회복을 위한 일련의 조치에 혹시라도 방해자가 나타날까, 이를 미연에 찍어 누르려는 마음에 정례 행사로써 못 박지 않았는가 싶다. 정조는 매년 봄 세심대에서 꽃구경도 하고 활도 쏘고 시도 짓고, 또 신하들에게 연회도 베풀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지금은 세심대의 흔적은 물론 위치조차 찾을 길 없다.
세심대는 이곳에 있던 건축물인 세심정(洗心亭)에서 비롯됐다는 게 정설이다. 조선 중기 문신 심수경이 쓴 <견한잡록/遣閑雜錄>을 보면 세심정의 주인은 무신 이향성( 李享成, 1524~1592)이다. 이향성은 서울의 북악산, 인왕산, 남산, 낙산의 성첩(城堞)과 송림(松林)을 지키던 종9품 벼슬인 사산감역( 四山監役) 및 노비의 호적과 송사에 관한 일을 맡아보던 장예원 사평(司評)을 지냈다.
높아 봤자 6품 관직이었던 이향성이 어떻게 그렇듯 좋은 자리를 차지할 수 있었나 하는 게 의문일 수 있지만, 그가 사산감역을 역임한 것을 상기하면 이해가 가지 않는 것은 아니다.

세종문화회관 앞 장예원 터 표석
즉 그는 사산감역 재직시절 보았던 명당자리를 점찍어 두었다가 마지막 관직인 홍산현감을 마친 후 서울로 돌아와 세심정을 지었던 같다. 61세쯤인 1584년 경이다. 앞서 말한 심수경은 이 집에 단단히 반한 듯, <견한잡록>에 다음과 같이 적었다.
"서울에 이름난 정원이 한둘이 아니지만, 특히 이향성의 세심정은 경치가 빼어나다. 세심정 정원 안에는 누대(樓臺)가 있고 그 누대 아래로는 맑은 샘이 철철 솟으며 그 곁에는 산이 있다. 그리고 산에는 살구나무가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아서 봄이 되면 만발해 눈처럼 찬란하며, 다른 꽃들도 수없이 많다."
그리고, "내가 임진년 초봄 어느 친구의 집에 갔을 때 한 여자가 거문고를 타고 있었다. (정체를 물었더니) 세심대의 여종이라 하기에 시 한 수를 지어 이향성에서 전하라고 한 일이 있었다. 이후로는 병란(兵亂, 임진왜란)으로 가지 못했다"고 적었는데, 심수경은 여기서 '세심정'과 '세심대'를 병기(倂記)하였던 바, 같은 장소임을 알 수 있다.
세심정의 주인 이향성은 임진왜란이 일어난 해인 1592년 죽었다. 그리고 세심정은 그의 셋째 아들 이정민(李貞敏, 1556~1638)이 물려받았으나 광해군이 관직을 주고 빼앗아갔다고 한다.(이정민 묘표의 음기) 이후로는 세심정이 왕실 소유로 편입되었던 듯하니, 세심정은 세심궁(洗心宮)으로도 불렸다.

시대, 작자 미상의 '세심궁도형(洗心宮圖形)' / 조선 시대 영조가 사도세자의 묘(수은묘)를 더 크게 짓거나 옮기기 위한 계획도(이건 계획도)를 그릴 당시에 함께 제작된 것으로 보인다. 114.8cm×97.3cm, 국립고궁박물관. 
'세심궁도형' 속의 세심대 / 산봉우리는 인왕산을 표현한 듯하다. 제 아들을 죽인 비정한 아버지 영조는 사도세자가 죽은 지 약 한 달 후인 1762년(영조 38) 6월 15일 세심궁에 들러 이곳에 사도세자의 사당인 사도묘를 짓게 하였으나, 영조의 명으로 이건 돼 창경궁 홍화문의 동쪽, 지금의 서울대학병원 자리에 수은묘(垂恩廟, 정조가 경모궁으로 개칭)라는 이름으로 다시 지어졌다. 그리고 옛 사도묘 자리에는 사도세자의 친어머니 영빈이씨 사당인 의열궁(義烈宮)이 새롭게 건립됐다. 의열궁은 훗날 선희궁(宣禧宮)으로 개칭되었고 지금은 청와대 옆 칠궁에 있다.

서울농학교 내 옛 영빈이씨 사당 자리에 복원된 선희궁 
일제강점기의 선희궁 사진 / 조선총독부에서 그 자리에 조선 고아의 양육과 시각장애인의 교육 등을 목적으로 하는 제생원 양육부를 설치했다. 서울 농학교의 전신인 셈이다. 
종로구 청운동 서울농학교 / 담장 아래로 옛 선희궁의 축대가 보인다. 이렇게 볼 때 현 서울농학교 내의 선희궁은 세심대를 추적할 수 있는 근거가 되는 바, 아마도 농학교 옆 서울맹학교 뒤로 보이는 인왕산 쪽에 세심대가 있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주변에서 인왕산에 오를 수 있는 길은 서울맹학교 뒤 경복교회 뒷길 밖에 없는데, 입구에 길이 없다는 안내문과 달리 소로(小路)가 있고, 그 좁은 길을 위아래로 해메다보면 최종적으로 세심대 자리로 추정되는 청운현대아파트를 만날 수 있다. 선원(仙源) 김상용(1561~1637)이 집 주변에 새겼다는 '百世淸風'(백세청풍) 각자 바위 맞은편으로, 조선 후기에는 청풍계(淸風溪)로 불렸던 곳이다.

국립서울맹학교 왼쪽으로 오르는 길이 보인다. 
골목 언덕에서 본 백악산 
더 위쪽에서 본 풍경 
인왕산 오르는 길 
드디어 암벽이 출현하고 
서울에서 가장 높은 농지일 것 같은 밭도 만난다. 
하지만 길 끝에는 인왕산 등산로만 나타날 뿐.... 
다시 가파른 길을 내려오면 현대 정주영 가(家)라는 곳을 지나 
(그 안을 살짝 들여다보면 이렇다 / 2021년 연합뉴스 사진이다) 
주택가 담벼락에서 '백세청풍' 바위가 출연하고 
그곳에서 청운초등학교 쪽으로 내려오면 청운현대아파트 입구가 나온다. 옛 세심대로 짐작되는 장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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