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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청풍계에 남은 바위 하나
    토박이가 부르는 서울야곡 2026. 3. 29. 16:27

     

     

    서울 종로구 청운동에 있던 옛 청풍계(淸風溪)에 대한 네 번째 포스팅이다. 뭔 할 말이 그리 많은가도 싶겠지만 겸제 정선이 청풍계에 반해 무려 14점의 그림을 그린 것에 비하면 약과가 아닌가 싶다. 그중의 3점을 앞서 소개한 바 있는데 오늘은 14점 중 가장 빼어나다는 아래의 '청풍계'를 싣는다. 

     

     

    겸제 정선이 비단에 그린 '청풍계' / 96.2x36.0cm, 고려대학교박물관

     

    물론 여기 보이는 계곡의 집들과 바위는 남아 있는 것이 거의 없다. 일제강점기 일본의 미쓰이물산(三井物産株式会社)이 이곳을 차지해 직원 숙소와 인부 숙소 등을 지으며 청풍계의 기암괴석을 비롯한 대부분의 바위에 TNT를 묻어 깨뜨렸기 때문이었다. 그렇다고 일본을 욕할 것은 없다. 해방 후에는 우리나라 사람들이 청풍계에 다투어 집을 지으며 나머지 바위들을 모두 깨 없애버렸기에. 

     

     

    우리에게는 미문화원점거 사건으로 익숙한 을지로 입구의 미쓰이물산 경성 지점 건물은 이제 역사 속으로 사라진다. / 이 자리에는 2031년 지하 6층·지상 22층 규모의 서울시의회 신청사가 들어설 예정이다.

     

    그런데 천만다행히도 그중의 바위 하나가 남아 옛 일을 회상케 한다. 앞서도 언급한 바 있는 종로구 자하문로 33길 청운현대아파트 맞은편에 자리한 백세청풍(百世淸風) 바위로, 위 그림에서는 대문이 있는 기와집 바로 위쪽에 있는 바위다. 그곳에 '百世淸風'이라는 글씨를 각자한 사람은 저 유명한 장동김문(서울 장의동에 자리한 안동김씨 가문)의 중(中)시조쯤 되는 김상용이고, 바위 아래 집은 김상용의 후손들이 세운 '선원영당'(仙源影堂)이라는 집이다. 선원영당은 김상용의 초상화를 모신 사당으로 선원(仙源)은 그의 호이다.

     

     

    청운동 백세청풍 바위 부근
    어느 댁 담벼락 자투리 땅에 살아남은 백세청풍 바위
    백세청풍 바위
    가까이 찍은 글씨

     

    전하는 기록에 따르자면 김상용은 집 부근 바위에 송시열이 쓴 '대명일월'(大明日月)과 주자의 글씨라 전해지는 '백세청풍'(百世淸風)을 새겼다고 하는데 다행히 '대명일월'은 지금 사라지고 없다. "대명일월'의 원문은 아마도 송시열이 괴산 화양서원 계곡에 쓴 졸필 '대명천지 숭정일월'(大明天地 崇明日月)일 듯싶다. 이미 망한 '명나라의 마지막 의종 황제(숭정제)를 해와 달처럼 떠받들자'는 지독한 모화사상이 낳은 문구이다.  

     

     

    송시열이 화양서원 계곡에 쓴 '대명천지 숭정일월'

     

    뜻도 한심하고 필체도 형편없는 그 글씨가 서울 한복판에 남아 있었다면 얼마나 창피한 노릇이었겠는가? 중국에 기대고픈 일부 정치가들은 좋아했을지 모르겠지만 말이다. 다만 ' 백세청풍'을 새긴 바위는 남았는데 다행히도 그것은 뜻도 좋고 글씨도 명필이다. 그러나 그것도 알고 보면 모화사상에서 비롯된 글씨이며, 전국에 그와 똑같은 글씨가 산재한다. 예천군 풍양면 삼강리 삼강강당(三江講堂)에 걸려 있던 '백세청풍' 편액이 그 대표적 예이다.

     

     

    예천군 삼강강당에 걸려 있던 '백세' '청풍' 편액. 이 원본은 한국국학진흥원에 보관돼 있다. / 영남일보 사진
    '백세' '청풍' 편액이 걸린 함안 채미정(採薇亭) / 생육신 중 한 사람인 어계(漁溪) 조려(趙旅)를 기려 세운 정자. 영남일보 사진

     

    예천 삼강마을은 임진왜란 때의 명신(名臣)인 지낸 약포(藥圃) 정탁(1526~1605)의 셋째 아들 정윤목(1571∼1629)이 터전을 잡아 살던 곳으로, 정윤목은 나이 19세 때 중국 사신으로 가는 아버지를 따라갔다가 백이숙제 사당인 수양산 이제묘(夷齊廟) 앞 비석에 쓰인 '백세청풍'이란 글자에 반해 그것을 탁본해 온 것으로 알려져 있다. 백이숙제는 주나라 문왕의 은나라 정복에 항의해 수양산에 들어가 채미하며(고사리를 캐 연명하며) 살다가 죽은 절의(節義) 형제이다. 

     

    사후 백이숙제는 충절의 표상이 되었고, '영원토록 맑은 기풍'이라는 의미의 '백세청풍'이 훗날 그들의 사당에 새겨졌다. 글귀와 글씨는 송나라 주희(주자, 1130~1200)의 작품으로 알려져 있다. 전설에 따르면 정윤목이 배를 타고 조선으로 올 때 풍랑이 너무 심했다. 그러자 뱃사공이 강한 바람이 다른 바람을 부르는 듯하니 '백세청풍'의 '풍'(風) 자를 버리라고 했고, 그 후 정말로 풍랑이 잦아들었다고 한다. 조선으로 돌아온 정윤목이 어느 명필에게 부탁해 잃어버린 글자를 채우도록 했는데 '풍' 자 완성 후 기진해 죽었다는 말도 전한다. 

     

    이후 '백세청풍'은 조선의 선비들이 선호하는 글씨로서 팔도 여기저기에 새겨졌고, 우리나라 황해도 해주에도 수양산이 있어 황해도 유생들이 지명이 같은 수양산 기슭에 1687년(숙종 13) 백이숙제의 사당 청성묘(淸聖廟)를 세우고 '백세청풍' 비석을 세웠다. 그리고 그것을 일본 도예(陶藝) 명가 13대 심수관 심정언(沈正彦, 일본명 오사코 게이키치)이 젊은 시절인 1950년 조선 황해도를 여행하다 직접 탁본해 가져가기도 했다.

     

     

    백세청풍 탁본 병풍 앞에서 손님을 맞는 14대 심수관 심정언 / 프레시안 사진

     

    심정언은 그것을 표구해 자신의 사랑채에 걸었는데, 이후 일본 텔레비전 방송국의 심수관가(家)에 관한 프로그램에서 백세청풍의 탁본이 걸린 사랑채가 배경으로 나오며 일본에서도 유명해졌다는 일화가 전한다. 이 탁본 병풍은 심수관가의 가보로 전해진다고 한다. 이래저래 유명한 글씨가 서울 종로구 자하문로 33길 어느 댁 담벼락 자투리 땅에 남아 있는 것으로, 일부 정치가들이 불러온 신(新) 청풍(淸風, 중국 바람)이 부는 봄날, 중국의 공해(公害) 황사 속에 '백세청풍' 바위를 바라보는 마음과 폐부(肺腑)가 실제로 답답해온다.  

     

     

    자하문로 33길에서 바라본 백악산
    자하문로 33길의 백세청풍 바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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