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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서소문역 일대에 살던 중국인들과 반중정서
    토박이가 부르는 서울야곡 2026. 4. 3. 15:20

     

    현재는 기억하는 사람조차 없겠지만 우리나라 최초의 철도인 경인선이 개통되었을 때 서울의 시발역과 종착역인 '경성역'(京城驛)은 지금의 서울역이 아닌 서대문역으로, 이화여고에 정문 앞에 그 표석이 있다. 참고로 서울~인천간 철도였던 경인선은 1897년 3월 22일 미국인 모스에 의해 착공되어 1899년 9월 18일 노량진~제물포 구간 33.2km가 개통됐으며, 이후 일본인에 의해 한강철교 건설되며 1900년 7월 8일 전구간이 개통되었다.
     
     

    인천 우각리 경인철도 기공식 사진 / 인천세관장 라포르트, 미국공사 알렌, 한성판윤(서울시장) 이채연, 인천부윤(인천시장) 이재정 등이 참석했다.
    인천 도원역 부근의 한국철도 최초기공지 표석
    이화여고 정문 앞의 서대문정거장 터 표석
    표석 정면에서 찍은 사진

     

    이곳에 스테이션을 만든 이유는 부근에 경운궁(덕수궁)과 정동 공사관 거리(Legation Street)가 있던 당대의 정치 1번지였기 때문이었다. 당시 세워졌던 영국공사관은 지금도 그 자리를 지키고 있다. 영국인 엠벌리의 스테이션호텔도 그와 같은 배경으로 세워진 것이니 이름도 '정거장호텔'이었다. 1901년 조선을 방문해 스테이션호텔에 투숙한 미국인 여행가 버튼 홈즈(Elias Burton Holmes)는 <버튼 홈즈의 여행 강의>에서 '정거장호텔'에 대해 이렇게 적었다.
     
    (서울)역을 나와 스테이션호텔로 따라갔는데, 여러 채의 소규모 조선식 가옥이 이어진 곳에 위치한 조용하고 아담한 여관으로서 정거장에서 몇 걸음 떨어지지 않은 거리에 있었다. 이곳 주인 엠벌리 씨와 그의 부인은 영국 사람으로 예전에 중국에서 선교사로 활동한 적이 있다고 했다. 
     
     

    1883년 최초의 영국공관 / 한·영수교조약을 체결했던 신헌의 집을 매입해 사용하다가 1889년 지금의 서양식 건물을 지었다.
    완공된 영국공사관
    버튼 홈즈의 여행기 속의 스테이션호텔
    여행기 사진 속 회화나무를 지금도 볼 수 있다.
    1900년대 초 서양식건물로 신축한 스테이션호텔
    스테이션호텔은 1905년 프랑스인 마르텡에게 팔리며 애스터하우스(Astor House)로 개명됐다. 애스터하우스는 이후 마전여관(馬田旅館)이라 불리기도 했는데 마르텡의 한자 이름을 따서 부른 것이다.
    당시의 서대문역
    서대문역 대합실로 들어가는 여행객들

     

    이곳 서대문역은 1905년 경부선이 개통되고 경부선 열차의 시·종착역이 되며 더욱 은성해졌다. 하지만 그리 오래 가지 못했으니 러일전쟁이 심화되며 용산역이 경부선 열차의 시·종착역으로 바뀌었고, 1906년 경의선의 완공과 함께 그 역시 용산역이 기점이 되었다. 본토의 일본군과 용산 주둔일본군들을 북으로 실어나르기 위해서는 그것이 훨씬 유리했기 때문이었다. 이후 서대문 정거장은 한적한 보통 역으로 전락하였고 1919년 3월 31일 폐역되었다. 
     
     

    1920년대 초의 용산역(왼쪽) / 현재의 지하철 4호선 신용산역 주변으로, 오른쪽 건물은 용산우체국이다.
    1925년 을축대홍수 때의 용산역 앞 / 엄청난 홍수를 실감할 수 있는 사진이다.
    1930년대의 용산역 / 한국전쟁 때 소실됐다.

     

    역시 기억하는 사람이 드물겠지만 1930년대 경의선에 서소문역이 있었다. 이 역 역시 시대적 상황이 바뀌며 오래가지 못했고(1930~1944년 운영)  지금은 표석조차 없다. 위치는 서소문역사공원 근방이다. 이곳이 오늘 말하고자 하는 장소로서, 1930년대 이 일대에는 중국인 노동자들이 많이 살았다. 경성에는 1920년대 후반부터 화공(華工)이라 불린 중국인 노동자들이 대거 유입되기 시작했는데, 앞서 화상(華商) 자본가들이 자리 잡은 황금정(지금의 을지로 입구)이나 장곡천정(하세가와쵸, 지금의 소공동)에는 들어가지 못하고 이곳에 자리를 잡고 모여 살았다.
     
    일본어 지명으로 세이쇼몽쵸(小西門町)이던 이곳은 어느덧  조선인이나 일본인보다 중국인이 압도적으로 많은 지역이 되었던 바, 현지인들은 그곳을 '중국인 마을'이라 불렀고, 식자(識者)들은 '화공(華工) 게토'라 불렀다. 그리고 그곳에 살던 중국인들은 '되놈'이나 '아편쟁이'라 불렀다. 당시에도 중국인들이 아편을 즐겼다는 증거인데 대개 연초처럼 흡입하는 형태였다. 이들의 유입은 점점 늘어 (워낙에 쪽수가 많은 족속이라 '조금'이라도 엄청나다) 북미창정(북창동)과 태평통 2정목으로 주거지가 확대되었다.
     
    그리하여 일대는 마치 중국 산동성(山東省)이나 복건성(福建省)의 어느 곳에 온 듯한 느낌을 가질 정도였다. 특히 뒷골목 주택가에 숨어 있는 아편굴과 매음굴은 일찍이 조선에서는 볼 수 없는 살풍경이었던 바, 흔히 마굴(魔窟)로 불리었고, '마굴에 빠지면 헤어날 수 없다'는 말도 유행했다. 당시 최저생계비 이하의 임금을 받던 화공들은 조선인들에게도 멸시의 대상이었고 추방해야 할 대상으로 간주되었는데, 알력은 서로의 생존권이 걸린 조선인 하층민과의 일자리 다툼에서 더욱 노골화되었다.
     
     

    중국인 마을 흔적이 남은 '브라운스톤 서울' 맞은편 골목
    아래 철길 부근에 중국인 마을이 있었다.
    서소문역사공원 현양탑
    서소문역 터 / 좌측 선로 쪽에 서소문역이 있었으며, 승강장 연석(열차가 정차하는 곳의 경계석)으로 추정되는 돌이 남아있다.
    지금도 경의선 열차가 지난다.

     

    1934년 경성 거류 지나인(支那人, 일본이 중국인을 낮춰 부른 말)을 조사한 자료 <조선에 있어서의 지나인>(1924년)에 따르면 "지나인은 여러 계층의 사람이 건너오고 있는데, 굴지의 상인들이 있는가 하면 계절성 노동자도 매우 많다"고 되어 있다. 즉 중국인들은 상인들 뿐 아니라 중국의 계절 상황에 따라 막노동을 목적으로 건너오는 사람들도 상당수였다는 얘기다.
     
    1930년 국세조사에 따르면 경성에는 총인구 39만4240명 중 약 2%인 8275명의 중국인이 살고 있었다. 기타 외국인 수가 총 461명인 점을 감안하면 조선인과 일본인을 제외한 경성의 외국인은 거의 모두 중국인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는 2024년 3월 기준 서울 거주 전체 외국인 약 39만 6천여 명 중 중국 국적자가 24만 명 내외로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했던 상황과도 비견된다.
     
    그런데 이들은 1930대의 중국인들과 달리 참정권도 가진다. 2025년 1월 기준 국내 지방선거 투표권을 가진 외국인은 약 14만 명이다. 이 중 중국인은 11만3500명으로 전체 외국인 선거권자의 81%에 달한다. 이번 6월 선거에는 12만 명 이상이 선거권자라 한다. 정작 우리 국민은 중국에서 참정권을 얻지 못함에도 한국에 사는 중국인들은 버젓이 투표권을 행사하고 있는 것이다.
     
    또한 이들에게는 의무 거주 기간과 관련한 요건도 없어 우리나라에 거주하지 않더라도 투표만 하러 대한민국에 입국해 참정권을 행사하는 것이 가능하다. 이에 상호주의의 원칙에서 중국인들을 포함한 외국인의 참정권을 제한해야 한다는 지적이 나오지만 민주당에서는 자신에게 게 유리하다는 판단에서인지 꿈적도 하지 않는다.
     
    게다가 이재명 정부가 들어서며 중국인들에 대한 한시적 무비자(비자 면제) 조치 등의 개방 정책이 시행되고, 반대로 그동안 시행됐던 한국 거주 외국인들에 대한 직업 제한 조치 등은 사실상 해제되었다. 이에 중국인들의 취업이 자유로워져 한국인의 경제 영역이 침탈되고 있는데, 일용노동직 같은 하층민의 영역을 침탈하여 생계를 위협한다는 면에서 과거의 상황과 흡사하다.  
     
    일제강점기 천도교 계통의 조선인 지식인들이 발행하던  <별건곤(別乾坤)>이라는 잡지가 있었다. 1926년 창간호를 시작으로 1934년까지 발간된 이 잡지는 1929년 조선박람회를 보러 서울로 올라오는 사람들을 위해 경성 안내서와 같은 '대(大)경성 특집호'를 발행했는데, 거기에는 '대경성의 특수촌'이라는 제목 하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실려 있다. 
     
     

    <별건곤> 9월 대(大)경성 특집호 / 1926년 11월 1일부터 1934년 7월 1일까지 통권 74호가 발행됐다. '별건곤'은 '별천지'와 같은 말로, 보통과 다른 특별한 세계를 뜻한다. (천지일보 사진)

     

    서소문정 거리를 지내면 하릴없이 그들의 번국(藩國) 어느 하층 사회를 걸어가는 감이 있다. 그곳에 들어가면 나올 길을 못 찾아 나올 것도 같은 생각도 든다. 서소문정은 아편굴이 많기로 서울에서 독특한 곳이니만치 석양 때나 밤늦게 혹은 새벽녘에 헌털뱅이 입은 걸인이나 아래위 말쑥하게 휘감은 사람, 특별히 얼굴이 누렇고 목허리 굽은 사람들이 왕래를 흘끔흘끔 살펴보며 우중충한 옆 골목으로 들어서는 것을 보면 그들이 모두 아편쟁이임에 틀림없다.
     
    지나인의 밀매음녀도 있는 듯하다. 아무리 지나인의 원풍속을 모른다 해도 핏기운 없는 얼굴에 어디로 보든지 음탕한 자세를 하고 희미한 전등빛에 우울한 표정, 유혹적 표정을 하고 있는 것을 보면 별 수 없는 매음녀다. 거리에 나서서 오입쟁이 낚시질(호객행위)을 하는 것도 같다. 무엇에서 무엇까지 그들의 거리는 음침하고 우중충하고 마굴과도 같은 기분이 돌고 그들의 말소리나 음흉한 음성은 어디로 보든지 음모적 민족이다.
     
    당시 우리 한국인들이 중국인을 어떻게 인식했는지가 잘 드러나는 글이다. 1923년 <동아일보>에 연재된 '날신귀(剌身鬼, 마약 중독자)가 모여드는 마굴(魔窟) 탐방기'라는 서소문정과 태평통 2정목 등 중국인 밀집 지역에 대한 탐사 기사는 더욱 리얼하다. 이 기사는 당시 중국인이 어린 조선 여성을 납치, 감금하고 팔아넘긴다는 소문으로부터 취재가 시작됐고, 이에 대한 보고서 형식으로 보도된 내용이다. 
     
    "요사이 음흉한 중국 사람들의 마수에 걸려, 멀리 산 설고 물 설은 중국땅으로 우리 조선 여자들이 많이 팔려간다 함은 이미 보도한 바  있거니와 (중략) 서소문안과 태평통 일대에는 중국인들이 많이 거주할뿐더러 그 자들은 거의 모루히네(모르핀)나 아편을 먹는 자들로 여러 가지로 행동이 불미한 점이 많은 까닭에 서대문서(서대문경찰서)에서는 특히 주목을 하는 모양이라더라.”(동아일보, 1924년 9월 28일)
     
     

    1938년 <매일신보>가 '마굴'에서 탈출한 소녀의 사연을 다룬 기사

     

    이상의 사건은 <동아일보>의 기사를 정리한 것인데, <동아일보>에는 조선인이 중국인에 대한 검정이 쌓여 충돌한 다음과 같은 기사가 실리기도 했다. 어쩌면 이것이 과거에 그치지 않을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전문을 옮겨본다. 
     
    중국인, 그중에서도 하층민 사회의 '악마화'는 큰 사건으로 비화되기도 했다. 1931년 7월 중국 지린성에서 조선인과 중국인 농민이 충돌한 ‘만보산(萬寶山) 사건’이 발생했다. 실제 이 사건으로 희생된 조선인은 없었지만, 200여 명이 살해당했다는 오보가 났다. 이를 계기로 경성, 평양, 인천 등지에서 격렬한 반중국인 폭동이 일어났다. 경성에서는 7월 3, 4일 폭동으로 중국인 146명이 부상을 당하고 65만여 원의 재산 피해가 발생했다.

    이 사건으로 검거된 이들의 직업을 보면 잡화상, 점원, 일용 노동자, 각종 직공 등이 많았다. 이들은 평소 노동시장에서 화공과 경쟁 관계에 놓여 있었다. 당시 중국인 노동자는 조선인에 비해 평균 임금이 훨씬 낮았다. 따라서 중국인은 조선인의 일자리를 빼앗는 존재로 여겨졌다. 그리하여 “중국인을 배척하는 것은 민족 감정이 아니라 생존권의 자위를 위하는 일면”으로 합리화되었다(조선일보, 1925년 4월 3일).

    중국인 동네가 곧 마굴이라는 이미지의 지속적인 재생산에는 이런 배경이 있었으며, 1931년 반중국인 폭동은 예견된 비극이었다고 할 수 있다. 경성에서 도시 하층민 사회의 형성과 노동시장을 둘러싼 경쟁이 조중 민족 간 갈등으로 폭발했던 것이다.

     
     

    가리봉동 중국인 거리
    광화문 집회에서 중국인들과 충돌한 한국인 시위대
    지난 대선 때 중국인의 투표를 규탄하는 현수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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