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청운동 계곡에 분 봄바람과 피바람토박이가 부르는 서울야곡 2026. 3. 31. 01:23
자본주의의 영향인지 지금은 서울 사람들의 자존심을 강남에서 찾는 경향이 있지만 조선시대에는 어림없는 일이었다. 당시 지금의 강남은 한명회 대감이 빼어난 정자를 지은 저 압구정리 마저 성저십리(城底十里)에도 끼지 못한 광주군 언주면에 속한 궁벽한 동네였던 바, 지금의 강남이 서울로의 편입이 완전히 끝난 해는 지금으로부터 불과 63년 전인 1963년이다.
그렇다면 조선시대 지금의 강남에 비길 만한 부자 동네는 어디였을까? 단연 경복궁 서쪽의 서촌(西村) 양반가이다. 아울러 그곳 양반네들은 산수(山水)에 대한 프라이드도 높았던 바, 동네 계곡인 청풍계(淸風溪)에서 발원하여 서울 한복판으로 흐르는 개천을 특별히 청계천(淸溪川)이라 이름했다. 청풍계에 발원해 흐르는 물줄기라는 뜻이었는데, 그것이 조선에서 유일하게 동쪽으로 흐르는 강줄기라는 데 의미를 더했다.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한양을 서울로 표기했다는 수원(樹園) 유본예(柳本藝, 유득공의 아들)의 <한경지략/漢京識略)>에서는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은 의미를 부여했다.
우리나라 강물은 모두 서쪽으로 흐르는데, 오직 청계천만이 동쪽으로 흘러 한양 사람들의 바른 길, 다시 말해 정도(正道)를 얻었다.

청풍계가 흐르던 자하문로 33길 33길 / 왼쪽이 청운현대아파트이고 오른쪽에 '백세청풍' 바위가 있다. 지금은 복개됐으나 좌측의 맨홀 뚜껑이 청풍계 계류가 지하로 흐르고 있음을 알려준다. 
청계천의 상전벽해 그래서 오늘은 그 특별한 곳 서촌 양반가 중에서도 같은 동네인 청운동에 살며 부(富)와 명예로서 쌍벽을 이루던 두 사람을 소개하려 하는데, 공교롭게도 두 사람은 철천지 원수였다. 먼저 이름을 밝히자면 한 사람은 송강(松江) 정철(鄭澈)이요, 다른 한 사람은 동암(東菴) 이발(李潑)이다. 그들의 유명세는 <선조수정실록>에서 당대의 세력가로 추대받는 인물로서 서인 중에는 정철, 동인 중에는 이발을 꼽은 사실로도 알 수 있는데, 율곡 이이마저 그들을 화해시키는 데 실패했다고 언급된다.
정철은 1536년(중종 31) 서촌 장의동(지금의 서울 청운동) 청운초등학교 자리에서 태어났다. 아비는 돈녕부 판관을 지낸 정유침(鄭惟沈)이고, 큰누이는 인종의 후궁 귀인정씨였으며 막내 누이는 월산대군(성종의 형)의 손자 계림군 이유(李瑠)에게 출가했다. 가계가 이러했으니 정철은 어려서부터 누이가 있는 궁궐을 자유롭게 드나들었다. 그러면서 2살 위인 경원대군과 함께 놀고 지내며 우정을 쌓았던 바, 훗날 경원대군이 왕(명종)이 되고 정철이 과거에 합격했을 때 합격자 명단을 본 명종이 동명이인이 아닌가를 확인한 후, "드디어 내 어릴 적 친구가 출사하게 되었구나" 하며 기뻐했다는 이야기는 유명하다.

서울 종로구 청운동 청운초등학교 앞 정철 탄생지 표석 
청운초등학교 운동장에서 본 백악산 반면 이발은 전라도 광주목 대촌면 유등곡(現 광주광역시 남구 원산동)에서 출생했다. 호남 명문 광산이씨 집안 출신으로 이발의 8대조부터 이발에 이르기까지 9대가 꾸준히 과거 급제자를 낸 전국에서 알아주던 명문가였다. 그의 아비는 (대)제학을 지낸 이중호(李仲虎)이며, 장인은 윤의중으로 고산 윤선도의 고모부였다. 말한 대로 이발도 대과(大科)를 패스했는데, 그것도 장원 급제여서 예조좌랑를 시작으로 벼슬이 부제학에 이르렀고, 동생 이길(李洁)도 별시 을과에 아원(2등)으로 급제하여 응교에 이르렀다.
이러니 이발 역시 집안이나 뭐나 꿀리게 없었으니, 선대(先代)들이 자리를 잡은 서촌 청운동에 큰집을 구해 살며 정철과 이웃하게 되었다. 말하자면 이발은 요즘 대세인 호남 강남좌파의 비조(鼻祖) 격인 셈이다. 하지만 선조 8년인 1575년 동서분당이 일어나며 이웃사촌이던 두 사람은 원수지간이 되었다. 알려진 대로 동서분당은 관리를 추천할 수 있는 권한을 지닌 이조전랑의 자리를 두고 사람파의 김효원과 심의겸이 다투다 동·서로 갈라선 것이 시발이었다.

이발의 집터로 전해지는 곳 / 지붕 너머로 백악산이 보인다. 이발과 정철의 집이 매우 가까웠음을 알 수 있다. 이조(吏曹)의 전랑(銓郞)은 요즘으로 치면 내무부 5급 사무관 정도로, 당대에도 정5품 품계에 지나지 않았으나 삼사(三司, 사간원 사헌부 홍문관)의 관리와 자신의 후임을 추천할 권한이 주어졌다. 따지자면 지금의 대통령실 인사비서관급에 해당하는 끗발 있는 자리였으므로 양보할 수 없는 싸움이 벌어지게 된 것이었다.
김효원과 심의겸은 과거에도 이조전랑의 자리를 두고 다투었으니, 1572년 김효원이 이조전랑에 추천됐을 때 과거 소윤(小尹) 윤원형의 문객이었다는 이유로 이조참의 심의겸에게 까인 적이 있었는데, 공교롭게도 1575년에는 심의겸의 동생 심충겸이 이조전랑으로 추천됐다. 김효원은 기다렸다는 듯 퇴짜를 놓고 자기 쪽 사람인 이발을 밀어넣었다. 이후 반목이 심해지며 두 파로 갈라지게 되었는데, 심의겸이 서촌에 살았던 관계로 심의겸을 따르는 사람은 서인으로 불리게 되었고, 김효원은 동촌(연지동・이화동・효제동・원남동・인의동・연건동・종로5・6가)에 살았으므로 그들 일파는 동인으로 불려졌다.분당 초기는 서인이 우세했다. 임금 선조도 서인 편을 들어 재위 16년인 1583년, 율곡 이이를 공격한 동인의 허봉·송응개·박근원을 모두 귀양 보내는 이른바 계미삼찬(癸未三竄, 계미년에 세 권신을 귀양 보냄)의 성과를 거두었다. 물론 동인도 당하고만 있지 않았으니 이발이 분전하며 결국 심의겸을 파직시켰다. 심의겸은 명종의 부인 인순왕후의 동생으로, 자식이 없던 인순왕후는 뿌리가 약한 하성군(선조)을 거두어 임금으로 만들어 주었던 바, 심의겸의 파워가 남다를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선조 8년(1575) 인순왕후가 사망하자 힘을 잃었다.
심의겸의 파직 사유는 '국정농단'이었다. 임금의 배경을 믿고 제멋대로 국정을 처리했다는 것이었는데, 여기에 동인인 이발이 앞장을 섰다. 이발은 요즘 말로 이빨과 전투력이 뛰어난 사람이어서 과격한 발언으로 서인들을 깠는데, 이를 테면 정철에 대해서는 "누나는 인종의 후궁이고, 누이는 계림군의 처이며, 조카는 선조의 후궁인 것을 만인이 다 알고 있다. 실력은 개뿔도 없으면서 미인계로 출세를 한 간신 중의 간신이 아니겠는가" 하며 공격했다.이러면서 이발은 차츰 동인의 거두로 올라섰던 바, 마침내 정철의 탄핵에도 성공하게 되는데, 이발의 정철에 대한 우위를 증명하는 흥미로운 야사(野史)가 전한다. 어느 날 이발과 정철이 동네 골목길에 마주치게 됐다. 이발이 숱이 적은 정철의 수염에 대해 비아냥거리며 "간신에 수염은 어울리지 않으니 차라리 내시가 되라"며 정철의 수염을 몇 개 잡아 뽑아 버렸다. 아프고 분노한 정철이 화를 내는 것은 당연지사였을 터, 하지만 의외로 "몇 가닥 남은 수염을 그대가 뽑으니, 노부(老父)의 꼬락서니 더욱 초라하도다"라는 시 한수를 남기고 사라져 버렸다.
이것을 이발이 자랑삼아 조모(祖母) 신씨에게 떠들었다. 그런데 신씨의 반응 역시 의외였던 바, "정철이 그 자리에서 노발대발했다면 차라리 후환이 없겠건만 웃으며 지나갔다니 원한 첩첩(疊疊)이겠구나. 나중에 반드시 화를 부를 것이니 특별히 조심하도록 하라"고 일렀다고 한다. 조모 신씨도 서울 사람이었을까, 그는 대놓고 말은 안 하지만 원한을 가슴에 새겨 잊지 않는 서울 사람들이 습성을 알고 있는 듯도 했다. 그렇다고 보복이 반드시 따르는 것은 아니니, 기회가 왔다고 해서 반드시 응징하지는 않는다. (그래서 서울 사람을 옛부터 '물'이라 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정철은 응징을 택했다. 기회는 앞서 여러번 다룬 홍문관 수찬(修撰) 정여립의 난이었다. 정여립은 서인의 영수 율곡 이이가 아낀 인재였으나 이이가 사망하고 동인이 정권을 잡자 동인으로 돌아섰다가 선조 임금이 이를 못마땅히 여기자 하직하고 고향인 전라북도 완주로 내려갔다. 이런 와중에 선조 22년인 1589년 10월 2일, 조정에 날아든 황해감사 한준의 장계 한 통이 정국을 격랑으로 몰고 들어갔다.
장계의 내용인즉, 정여립이 고향인 완주를 비롯해 김제·금구·태인 등의 무사(武士)와 공사(公私) 천인(賤人)들을 모아 대동계(大同契)를 조직하고 그것을 바탕으로 전라도와 황해도에서 역란을 준비 중이라는 것이었다. 정여립이 실제로 한 말인지는 알 수 없으나, "천하는 공물(公物)이니 어찌 일정한 주인(定主)이 있겠는가…."라고 떠들었다는 말도 사실인 양 떠돌았다. (만일 이것이 사실이라면 정여립은 조선 최초의 코뮤니스트이여, 대동계는 1871년 파리코뮌에 300년 앞서는 공산주의 단체이다)
선조는 선전관과 금부도사를 황해도와 전라도에 파견해 사실을 확인토록 하였는데, 그러한 가운데 한양으로 붙잡혀 온 정여립의 아들 옥남은 극심한 문초 끝에 길삼봉 등과의 공모를 자백했다. 하지만 함께 모의했다는 길삼봉은 끝내 정체가 밝혀지지 않았던 바, 실존 인물인지 어쩐지도 알 수 없었다, 이렇듯 정여립 역모사건은 그 실체조차 불분명한 일이었고 신원 미상의 역모자 길삼봉은 끝내 정체가 드러나지 않았다. 주모자로 지목된 정여립은 고향으로 관군이 들이닥치자 진안 죽도로 도망갔다가 자살했다.

전북 진안 죽도 천변산 전경 정여립의 난을 조사하는 위관(委官, 조사 총책임자)으로서는 송강 정철이 임명됐다. 정철은 사간원 언관들과 동인계 사헌부 관원들의 탄핵을 받아 야인이 된 적도 있으나 정여립 역모사건이 발생하자 복권되어 우의정과 위관이 되었다. 위관 정철은 이 천재일우의 기회를 놓치려들지 않았으니 동인(東人)의 지도급 인물들을 모두 붙잡아 처형 또는 유배시켰다. 관리뿐 아니라 평민, 노비도 수상한 자는 죄다 끌려와 문초를 겪었고, 묘향산과 금강산에서 수도하던 서산대사와 사명당도 끌려와 조사받았다.
이발은 귀양을 가다 정철에 의해 불려올라와 경복궁 사정전 앞에서 다시 문초를 받고 장살(杖殺)되었다. 또한, 노인과 어린아이는 장살하지 않는다는 당시의 불문율을 깨고 82살의 노모와 8세의 아들까지 장살되었으며, 평안북도 희천에 유배됐던 이길은 다시 한양으로 불려올려져 옥에 갇히고 문초을 받다가 죽었다. 이발의 집에서 정여립과의 친교 서한이 다량 발견된 것이 원인이었으니 공범자임을 이실직고하라는 문초가 가해지는 중 죽은 것이었다. 이렇게 죽거나 귀양 간 자가 1000명이 넘었다.
이발과 이길의 시신은 아무도 거두는 사람이 없어 한동안 궐밖 길가에 던져진 채로 있었으나 청백리(淸白吏)로 유명했던 오리(梧里) 이원익(李元翼, 1547~1634)이 거둬 제 고향인 광명시 소하동 야산에 장사 지냈다. 이렇게 해 이발과 이길 형제는 그들과 아무런 연고가 없는 광명시 소하동 구름산에 묻히게 되었는데, 아무런 표지가 없어 찾아가기가 여간 어렵지 않다. (혹시라도 찾아가고픈 분들을 위해 아래 사진을 실었다) 이발과 이길 형제가 떠난 청운동 계곡은 이후 김상용, 김상헌 형제가 주인이 되었다고 한다.
송강 정철 또한 끝이 좋지 못했으니 1593년, 강화도 유배 중 병사했다. 정철은 광해군의 왕세자 책봉을 서두르다 선조의 마움을 산 건저(建儲) 문제로 유배를 갔다 복직하는 등 말년의 부침(浮沈) 심했는데, 이후 다시 정적들의 탄핵을 받아 강화도로 유배되었다가 돌보는 이가 없어 58세를 일기로 사실상 아사(餓死)했다. 그는 배고픔과 도움을 호소하는 편지를 친구들에게 썼지만, 권력의 보복이 두려운 친구들은 그를 도울 수가 없었다. 치열한 공방을 벌이고 있는 요즘의 여야 정치가들이 반면교사 삼을 일이다.

'토박이가 부르는 서울야곡' 카테고리의 다른 글
대은암 · 만리뢰 · 독락정 · 청송당 (2) 2026.04.04 서소문역 일대에 살던 중국인들과 반중정서 (3) 2026.04.03 청풍계에 남은 바위 하나 (2) 2026.03.29 백세청풍과 공직자들의 이중인격 (2) 2026.03.27 정조가 올랐던 세심대를 찾아서 (0) 2026.03.2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