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백세청풍과 공직자들의 이중인격토박이가 부르는 서울야곡 2026. 3. 27. 21:03
조선 후기부터 근세까지 조선 사회를 찜쪄먹었던 안동김씨 60년 세도에 대해서는 남양주 석실마을의 입향조(入鄕祖) 김번(金璠, 1479∼1544)에서부터 최후의 권세가 김병기(金炳冀)와 김병국(金炳國)까지 누차에 걸쳐 다룬 바 있다. 그리고 선원(仙源) 김상용(金尙容)에 대해서도 말한 바 있다. 병자호란 때 강화도에서 자폭 순절함으로써, 남한산성에서 척화파로써 끝까지 싸운 청음(淸陰) 김상헌(金尙憲)과 함께 명문 장동김씨(서울 장의동의 안동김씨)의 뿌리가 된 사람이다.
김상용은 병자호란 당시 빈궁과 원손을 수행하여 강화성으로 피신했으나 성이 함락되자 문루의 화약을 폭파시켜 순절했다. 강화읍사무소 앞의 순의비(殉義碑)는 그 일을 추모해 세운 것이다. 이후로 장동김씨는 장안의 명문가가 되었으니 문·무과 급제자가 300명이 넘고, 정승·판서 등 고관대작이 150여 명에 이르렀다. 서로 밀어주고 당겨준 결과였다. 뿐만 아니라 왕비도 3명을 배출하며 조정뿐 아니라 왕실까지 주무르는 절대권력을 지닌 가문으로서 60년 세도를 풍미했다.

강화도 김상용 순의비 / 왼쪽 것은 숙종 때, 오른쪽 것은 정조 때 만들어진 것이다. 
김상용이 자폭 순절했다고 알려진 강화도성 남문 문루 
남양주 석실마을 김상용 묘 
석실마을 김상용 신도비 / 비문은 아우인 김상헌이 짓고 유시정이 글을 써 인조 25년에 세웠다. 높이 3.77m로 웅대하다. 
김상용 묘 앞의 충효각 / 김상용 및 그와 함께 폭사한 종손자 김수전의 정려문(旌閭文)이 걸려 있다. 그런데 21세기 들어 반전이 일어났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김상용은 자폭 순절한 것이 아니라 안파루(晏波樓, 강화도성 남문 문루)에 쌓아놓은 화약 옆에서 담배를 피우다 담뱃불씨를 화약에 버리는 바람에 곁에 있던 손자 김수전, 의병장 심율 등과 함께 폭사(爆死)했다는 요지의 논문이 나온 것이었다. 글쓴이는 서울대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이숙인 책임연구원이며, 제목은 「만고충신 김상용, 그는 과연 나라 위해 폭사했나」였다. 글쓴이의 주장 중에는 다음에 같은 내용이 있다.
조선시대의 가문은 혈연을 기반으로 한 일종의 이익집단이다. 가문을 통해 개인의 존재 의미가 결정되던 사회이다 보니 그 위상을 높이기 위해 갖은 노력과 수단이 동원되었다. 이름난 가문일수록 빛의 크기만큼 그늘이 있기 마련이다. 그늘에는 사회적 이익을 독점하거나 국가적 명예를 훔쳐 가문의 번영을 도모하는 따위도 포함된다. 사대부의 자존심과 나라의 명예를 지킨 죽음으로 이름을 얻은 김상용은 바로 이 명가의 조건을 묻기에 적절한 사례가 될 것이다.김상용이 담뱃불 실화로써 안파루에 보관되던 화약 4000근을 터뜨렸고 그로 인해 재앙과 같은 손실을 끼치며 죽은 것은 이제는 '빼박'이 됐다. 화약의 손실과 성문 파괴로 인해 청군의 강도성(江都城) 함락은 매우 손쉬운 일이 되었으니 화약이 터지고 난 불과 몇 시간 후에 강화도는 청군의 손에 들어갔고, 소현세자를 비롯한 많은 사람이 포로가 된 사실을 이제는 대다수의 사람들이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과거에는 김상용의 죽음이 장장 400년간 순절(殉節)의 대명사로 쓰였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당시 인조 임금은 김상용이 순절·폭사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지 않으려 했다는 기록이 실록 곳곳에 남아 있다. 그 이유는 우선 김상용의 평소 행실에 기인되었으니, 결정적으로는 10년 전 정묘호란 때의 해괴한 행동 때문이었다. 즉, 당시 유도대장(留都大將, 임금이 서울을 비웠을 때 도성을 지키던 대장)이던 김상용은 적병이 임진강을 건넜다는 소식을 듣자 도성을 버리고 달아나 버렸던 것이다.
그로 인해 도적이 횡행하며 여러 관청이 불탔고, 노량진 나루에 두었던 양곡 1000여 석도 잃어버렸다. 이에 인조는 "도성을 무너지게 한 김상용을 추고하라!"는 명을 내린 적이 있는데,(1627년 2월 11일) 병자호란 때도 인조는 여러 곳에서 받은 장계를 종합해 김상용의 죽음을 순사(殉死)가 아닌 담뱃불 실화로 인한 폭사로 판단했다. 하지만 장동김씨 친족·측근들의 "의로운 자결"이라는 주장은 수그러들지 않았던 바, 끊임없는 상소가 올라오며 인조를 괴롭혔다.
이에 1년여의 공방이 임금과 권신들 간에 이루어졌으나 결국은 임금이 굴복해 김상용은 충절지사(忠節之死, 절의를 지킨 죽음)로 공인되었다. 이후 후손들의 숭모작업이 이루어졌던 바, 위의 신도비에는 "아아! 공이 품고 있던 충성과 절개여, 만고토록 길이 해와 별이 되리라"고 새겨졌다. 이와 같은 숭모작업은 다방면으로 이루어졌고 더불어 장동김씨 가문의 격(格)이 올랐던 바, 그가 살던 장동은 일약 명문가의 터전이 되었다. 빼어난 풍치로 인해 청풍계(淸風溪)로도 불리던 곳이었다.

겸제 정선이 비단에 그린 '청풍계' 그림 / 리움박물관 
겸제 정선이 종이에 그린 또 다른 '청풍계' / 간송미술관 김상용은 살아생전 지금의 종로구 청운동 청운현대아파트 일대의 깊은 계곡을 제 땅처럼 썼던 것 같다. 그래서 청운현대아파트 위쪽에 그가 새겼다는 백세청풍(百世淸風) 바위가 남아 있는데, 조선후기 화가 권신응이 그린 '청풍계'라는 그림 속에는 백세청풍 바위 아래로 훗날 김상용의 후손들이 세운 '선원영당'(仙源影堂)이라는 집이 보인다. 선원영당은 김상용의 초상화를 모신 사당으로 선원(仙源)은 그의 호이다.

청풍계 담벼락 아래의 '백세청풍' 각자 바위 선원영당에는 '늠연당(凜然堂)이란 당호가 걸려 있었다고 한다. '늠연’이란 위엄이 있고 당당하다는 뜻이다. 병자호란 때 자결한 김상용의 꿋꿋한 정신을 기린 표현이라고 하는데, 말짱 헛소리임이 위 논문으로 밝혀졌다. '백세청풍' 각자는 송시열의 글씨체라는 말도 있으나 한 눈에도 사실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이 글씨는 명필인데, 송시열은 알아주는 졸필이 아니던가. 차라리 송나라 주희(주자) 글씨의 집자(集字)라는 설이 사실에 가까울 듯싶다.

권신응이 그린 '청풍계'와 지금 사진 / 네이트 뉴스 
백세청풍 바위 아래 길 / 왼쪽이 청운현대아파트이고, 청풍계 계류가 지하로 흐르고 있음을 알려주는 맨홀 뚜껑이 보인다. 위 골목 밑에는 김상용의 집 터가 있다. 주소는 종로구 자하문로 33길 22-10으로, 자신의 고조부인 사헌부 장령 김영수(金永銖, 1446~1502)가 살던 집 터에 새집을 지어 살았다고 하는데, 신기하게도 그 표석이 땅에 매립돼 있다. 서울시의 유적 표석은 그 형태가 여러 가지이나 이처럼 땅에 매립한 형태는 처음 본 것 같다. 혹시 이것을 만든 사람은, 어쩔 수 없이 표시는 하되 감상용의 일생이 결코 표석으로써 내세울만한 삶이 아니었음을 알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종로구 자하문로 33길 22-10의 집 / 표석은 담 아래에 있다. 
땅에 매립된 김상용 집터 표석 
주변 풍경 선원 김상용과 청음 김상헌은 '백세청풍'의 문자 대로 평생 동안 청풍(淸風)과 같은 절개 높은 청빈한 삶을 살았을 것 같지만 보다시피 호화로운 삶을 영위했다. '백세청풍'은 '영원토록 맑은 기풍'이라는 뜻으로 백이·숙제의 충절 고사에서 비롯됐다. 그러나 이는 그저 겉멋일 뿐 그들은 백세청풍의 삶을 살지 않았고 산속에서 고사리를 캐 먹으며 산 일은 더더욱 없었다.
이처럼 말만을 앞세우는 것은 현대 정치가도 전혀 다름이 없으니, 어제 발표된 공직자 재산 신고 내역을 보면 그들 나름의 '백세청풍'을 알 수 있다. 우선 대통령의 신고 총액은 약 49억 7,722만 원으로 1년 전보다 약 18억 8,800만 원 증가했다. 증가 원인은 출판물 인세와 저작권 수익이 주요 증가 요인이라 하는데 도무지 설득력이 없다. 무슨 책(<결국 국민이 합니다>로 추정됨)을 얼마나 팔았기에 18억 원씩이나.....
한마디로 솔직하지 못하다. 국민들 중 그 돈의 출처를 모를 사람이 있겠는가? 하지만 이해는 간다. 공직자 축의금 제한 한도는 5만 원으로 제한돼 있기에 18억 원을 채우려면 온라인 송금을 포함해도 3만6천 명이 필요하기에.... 그러나 아들이 결혼했는데 아버지 재산이 불은 것은 이해가 안 된다. 아들은 아들 대로 챙겨갔다면 축의금은 더 많았다는 소리인가....?
대통령실(청와대) 참모진 재산 현황도 볼만 하니, 비서관급 이상 참모진의 평균 재산은 약 27억 5,000만 원으로 신고됐는데, 비서관급 이상 참모 47명 중 10명(약 21%)이 2채 이상의 주택을 보유한 다주택자로 나타났다. 오피스텔이나 상가 등 준주택을 포함할 경우 다주택 관련 인원은 18명까지 늘어난다. 청와대 내에 이재명이 말한 마귀가 비서관급 이상에서만 무려 열여덟 마리나 득실거린다는 소리다.
앞서 참고한 이숙인 연구원 논문에는 '이름난 가문일수록 빛의 크기만큼 그늘이 있기 마련이며, 역사 속에 묻힌 국가적 재앙 그늘에는 사회적 이익을 독점하거나 국가적 명예를 훔쳐 가문의 번영을 도모하는 사례가 있다'는 지적이 실려 있다. 그리고 그것을 김상용의 예를 들어 설명했다. 사회적 이익을 독점하고 나라의 명예를 훔쳐 이름을 얻은 김상용은 바로 이 명가의 조건을 묻기에 적절한 예가 될 것이기에.... 우리 대한민국의 빛과 그늘의 크기는 어느 정도일까 궁금해진다.
'토박이가 부르는 서울야곡' 카테고리의 다른 글
청운동 계곡에 분 봄바람과 피바람 (2) 2026.03.31 청풍계에 남은 바위 하나 (2) 2026.03.29 정조가 올랐던 세심대를 찾아서 (0) 2026.03.26 궁동 정선옹주 묘 & 중국사람 조심해야 될 구로구 (4) 2026.01.02 조선 망국의 역사가 응축된 돈암동 흥천사 (5) 2025.12.30